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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낙엽이 기형도의 시구보다 아름다운 밤에 나는 기침을 뱉는다
[안치용의 프롬나드] 낙엽이 기형도의 시구보다 아름다운 밤에 나는 기침을 뱉는다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1.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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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 모를 여인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굳이 4천 몇 백 원짜리 변태짓을 감내한다. 현대의 의료보험은 감기를 욕되게 만들었다. “병원 오기 힘들어요. 삼일 치 더 주세요. 나으면 알아서 끊을 게요.” “그러세요.”

 

한 주먹이나 되는 약을 입에다 털어 넣는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 혹은 잠? 침대가 지겨워 소파에서 뒹군다. 몸이 으스스, 안기 좋은 걸리버를 부른다. 이럴 때에 개의 체온이 인간의 체온보다 높도록 섭리하신 신께 감사드린다. 다리께 한 마리가 더 자리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안지 않으면 알아서 추운 주인의 몸을 덮어줄 충성스러운 개는 없다.

 

땀에 절은 하루가 답답하여, 늦은 밤에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를 입고 마스크를 쓰고 후드 점퍼의 후두까지 닭 볏처럼 올리고 공원으로 처음으로 외출한다. 바람 스산하고, 낙엽이 우수수. 공원의 바닥을 여러 모양 가지가지 색깔의 낙엽이 덮었다. 저 나무는, 저 나뭇가지는 얼마나 많은 잎들을 지녔던 걸까. 쏟고 또 쏟고. 그러고도 아직 내 머리숱보다 풍성하고 탈색도 더 우아하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고 젊은 기형도는 썼다. 젊은 기형도의 ‘노인들’이란 시는 봄을 노래한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내 몫이 아닌 슬픔들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제야 알겠다, 고 말하면 역시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내 나이에 근접한 슬픔들에 둔감한 나를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는 시구를 보며 부러지든 붙어있든, 날렵하든 둔중하든, 죽어 있는 가지는 죽어있는 게다,라고 응답한다면 슬픈 일일까.

 

이제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시를 쓰지 않는다, 고 쓰려다가 문득 언제 시를 쓴 적이 있었던가, 생각한다. 젊은 나에게 감동을 준 젊은 기형도는 어느새 나보다 더 늙어버려 빛바랜 시집 속에서 어느 가을에 속했는지 더 이상 분간되지 않는 검은 잎으로 건조하다.

 

비워보지 않고선 무게라는 게 짐작되지 않는다. 매 순간이 가을의 전설인 이런 밤엔 저 뒤편의 상록수가 얼마나 초라한지. 다시 태어난다면 결코 11월의 소나무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에 쿨럭쿨럭 깊은 기침이 새어 나온다. 앞쪽의 나무 하나 보란 듯이 푸르지 않은 나뭇잎을 공중으로 떨군다. 차가운 땅 위에 되는 대로 누워있던 잎들이 몸을 일으킨다. 바람이 부나 보다. 귀가하여 나는 입 속에 한 움큼 알약들을 털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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