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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댈러웨이 부인과 낯선 별을 방문한 어린 개들
[안치용의 프롬나드] 댈러웨이 부인과 낯선 별을 방문한 어린 개들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1.18 2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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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별에 불시착한 줄 알았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지만 펼쳐진 풍경은 어쩌면 어제와 다른 별이라 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몸에 마구 올려놓은 옷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꾸 땅으로 움츠러드는 게 분명 내가 알던 1G의 행성이 아니지 싶었다. 물론 어제와 같은 개들과 산책하고 어제와 같은 집에서 나서서 어제와 같은 공원을 걷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문맥이 주어졌다고 해서 오늘의 공간이 어제와 같은 공간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또는 오늘의 공간이 어제와 다른 공간이라고 판단할 근거도 없다. 그냥 같다고 믿는다. 더 정확히는 같다고 받아들인다. 따지고 들면 함께 외출한 저 두 개가, 내가 스콜과 걸리버라고 믿는 저 개들이, 과연 어제의 그 개들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물어볼까. 사실 이렇게 불확실성의 기반에서 잠정적 확실성을 하루하루 얹어가는 ‘나’ 또한 어제의 동일자인지가 먼저 밝혀져야 한다.

 

앓느니 죽지. 아 이 말은 틀렸다. 죽느니 앓지. 이게 맞다. 한데, 앓는 병에는 죽지 않아도 꾀병에는 죽는다는 말이 있긴 하다.

 

개들이 낙엽을 밟는 소리와 인간이 낙엽을 밟는 소리가 다르다. 이 천체와 개개 생명체가 주어진 조건하의 접점에서 만들어내는 소리는 상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첫겨울 추위가 밀려온 공원엔 (내 눈에 보이는, 또는 지각되는) 세 생명체, 혹은 포유류 세 마리, 내 관점에선 인간 하나와 개 둘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의 스콜과 걸리버에게 이 공원은 어제와 다른 공원일까, 같은 공원일까. 인간인 내가 믿기에 저들에게는 역사성이 부재하다. 어제와 다른 냄새가 오늘 공원을 채우지만, 그것은 확실히 시간의 횡단면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가끔 그들의 시간을 종단하지만 그들은 시간을 횡단하여 단지 축적할 뿐이다. 나의 개들에게 축적된 횡단면들의 시간은 결코 스스로에겐 종단되지 않는다.

 

낯선 시간의 횡단면에서 세 생명체의 시간의 수직과 수평이 뒤죽박죽 쌓이다 무너지고 갇히다 누출되는 사이에 공원 입구로부터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울려 퍼지는 하이힐 소리는 저 쓸쓸한 잎들 아래에서 차가운 시멘트벽돌이 땅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개들은 여인을 바라본다.

 

나의 개들의 시선이 불편한 듯 여인은 우리를 피하여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요즘 유행하는 롱 패딩이다. 여인의 등에 “Passion, Connected”라는 글자가 적혀 있지는 않다. 우리를 피해 한 구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걸 보니,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탈출한 외계인은 아니다. 또한 개들이 그 여인을 보고 짖지 않는 걸로 보아 같은 포유류임이 확실해 보인다.

 

추측하건대 무의식에서 탈출한 시간이 의식에 순차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은 무의식을 순차적으로 구성하려고 든다. 시간의 순차성을 소거한 공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개들의 미덕은 포유류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시공과 무관하게 연결될 이유가 있다면 연결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우즈 강(江)의 자살로도 열정을 물 밑으로 가라앉힐 순 없었을 것이다. 열정 또는 열망이 익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남들에게 1G인 그 천체는 그녀에게 10G를 넘어선 현상으로 주어졌을까. 지진으로 지층이 일그러지듯, 시간의 종과 횡이 뒤엉켜버려도 누군가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기억한다. 지금 내 나이의 댈러웨이 부인은 손수 꽃을 사겠다고 했다. “가을 속으로 떠난” 이가 늙은 여류 작가만이겠는가. 나의 개들에게 부재한 역사의식을 이 시대가 보상하리라고 기대하기엔 이 천체가 너무나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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