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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렇게 폭력이 수확되었습니다 ― 은폐가 뿌린 재생산의 굴레: 영화 <폭력의 씨앗>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렇게 폭력이 수확되었습니다 ― 은폐가 뿌린 재생산의 굴레: 영화 <폭력의 씨앗>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7.11.20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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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환경에서도 생육이 왕성하며 수확량이 많습니다.

내 앞에 있는 누군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릴 때의 이질감, 폭력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실제로 이 행위를 해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짓인지를 알 수 있다). 내가 눈 맞추고 있는 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색해야 옳다. 물론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폭력은 꽤나 진득하게 인간에게 붙어 다녔다. 맞아야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은 폭력이 교화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남자는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폭력이 성장의 조건인 것처럼 의미화 된다. 우스갯소리처럼 흘러넘치는 이 말들은 ‘어느 정도’의 폭력을 허용하면서, 폭력의 존재를 긍정한다. 이 ‘어느 정도’는 누구도 측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은 분명 이러한 폭력을 허용한 결과이다. 규율과 명령이 정당화되는 곳, 분명한 서열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낼 수 있는 곳, 약한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곳을 견뎌낸 대가로 성장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의 성장이란 말인가. 이 시스템이 결코 성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가,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은 영화 <창>(2012)이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군복을 입은 한 청년이 우리 앞에 섰다. <폭력의 씨앗>(2017)은 그의 불안함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많은 관객들에게 암담함을, 한편으로는 슬픔과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폭력의 씨앗>은 군복에서부터 번져 나온 초록이 마치 이끼처럼 어깨와 목덜미, 양 귀 끝과 뒤통수까지를 덮고 있는 인상적인 포스터로, 이 영화가 군복에 국한된 것이 아닌 그것의 번짐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군복이나 교복과 같이 어떤 집단을 특정하는 옷이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그 영화는 늘 군대의 문제로, 학교 혹은 청소년의 문제로 좁혀 해석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 읽히기도 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군내에서의 장면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내와는 다른 ‘푹신’한 ‘사제’ 땅을 밟는 한 무리 군인들의 외박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폭력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은폐라는 폭력의 조건과 그렇기에 은근하게 스며드는 폭력의 재생산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시작한다.
 
씨를 뿌린 후 흙으로 잘 덮고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십시오.
 
외박을 받은 한 무리의 군인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선 어떠한 설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외박은 어디로 가야할지가 명확한 듯 서로의 시선 아래 얽혀든다. 외박을 해서까지 분대원들은 서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대를 앞둔 박병장(오규철)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고 그와 함께해야 하는 저녁 자리까지 예정되어 있다. 박병장은 주인공 주용(이가섭)에게 분대원 중 한명이 가혹행위를 고발했다며 색출할 것을 강요한다. 주용은 박병장이 지목하는 자신의 후임 필립(정재윤)을 보호하려 하지만 필립은 상병(박강섭)에게 맞아 이가 부러지고, 이를 치료하겠다며 치과의사인 자신의 매형을 찾아갔을 때 누나가 당한 또 다른 폭력을 목격한다. 
 
<폭력의 씨앗>은 결코 편안하게 서술할 수 없는 이 내용들을 4:3 비율의 좁은 화면 속에 가둬둔다. 게다가 주용을 끊임없이 쫓고 있는 카메라는 좁은 화면비와 맞물리면서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집요하게 시각화한다. 대부분의 화면에 두 사람 이상이 잘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는 늘 소곤대야만 하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대화들과 결합하며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는 폭행을 고발한 것이 누구인지 찾아내라는 위협, 이번 한 번만 네가 짊어지라는 강요, 자신이 아니니 좀 봐달라며 매달리는 애원, 매서운 매형의 시선 아래에서 이뤄지는 누나의 가장(假裝)된 안정 등이 전부이다. 시선을 맞추는 대화 없이 오로지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고, 시선을 피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이 대화들은 좁은 화면과 주용을 쫓는 카메라와 맞물리면서 답답함을 극대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화면구성이 단순히 감정을 유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운용방식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데에 있다. 좁은 화면은 주용의 뒷모습이 가득 차는 순간 그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앞에서 위협적인 언사가 들리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나든 관객들은 일단 주용의 뒷모습을 두리번거리는 카메라가 비켜난 후에야 그 상황을 목격할 수 있다. 가령 과거 폭력행위를 고발한 적이 있는 필립은 이번에는 결코 자신이 아니라며 항변하지만 상병은 그에게 심각한 폭행을 행사하지만 이는 주용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후 필립은 바닥으로 쓰러지는데 쿨럭 대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를 살피는 상병과 주용의 머리에 가려 쉽게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카메라에서 비껴난 후에야 입가에 피를 쏟으며 쓰러진 필립의 모습이 드러날 때 그 장면은 더욱 잔인해진다. 주용의 어깨 사이로 잠깐 잠깐 드러나던 조각들은 주용의 몸을 피하는 순간에야 드러나 참혹함을 보이는 것, 이는 꼭꼭 숨겨져 있다가 기어이 드러나고야 마는, 그리고 그래서 더욱 충격적인 폭력의 모습들과 닮아 있다. 
 
 
 
게다가 그들이 돌아다니는 공간은 늘 문으로 닫아버릴 수 있는 막다른 곳 어디쯤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좁은 골목길을 찾고, 폭행을 고발한 것으로 보이는 이를 위협할 때에는 모텔로 들어선다. 잠시 기다리라던 필립이 사라졌을 때 그가 숨죽이고 있던 곳은 터미널 공용 화장실이며, 누나의 집은 안에서의 허가 없이는 열리지 않는 철옹성 같은 곳이다. 이 공간들은 스스로 열고 나오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누구도 알 수 없는, 폭력의 충분한 배양환경을 지닌다. 은폐될수록 더욱 잔인해지고, 그렇기에 쉽게 퍼져나갈 수 있는 폭력의 조건은 <폭력의 씨앗>에서 시각화 된다.
 
그렇다면 이 은폐는 어디에서 오는가. <폭력의 씨앗>은 너무 당연하게 일상을 지배하고 있어 쉽게 포착할 수조차 없었던 남성들의 연대의식을 그 해답으로 내민다. 남자니까 알 수 있고 그러니까 이해해야만 한다는 강요를 뒤집어쓴 폭력성, <폭력의 씨앗>은 바로 이 지점에까지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폭력을 고발하는 것에 머무는 여타의 영화들을 넘어선다. 남자니까 야망을 이해할 수 있을 거고, 남자가 바깥일을 하다보면 집사람과 부딪힐 수도 있고, 잘못인걸 알지만 또 남자가 화나면 손찌검을 할 수도 있고, 곧 풀어질 일이니 남자들끼리 소주한잔 하면서 넘기면 된다는 식의 무수한 연대의식은 <폭력의 씨앗> 여기저기에 매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 상황은 별 것 아니며 우리끼리 인정하고 화해하면 된다는 커다란 방패 아래에서 폭력이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분대원들이 외박을 나오자마자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은 매형이 굳이 누나와 주용을 불러내 선배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한 구도를 띤다. 이 대구(對句)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서열아래에서 눈치 보며 적절한 대답으로 선임을 띄워주었던 군인들은 나이를 먹어 장식처럼 부인을 옆에 두고 형님을 찾을 것이며 또 그를 띄우는 이로 변화해 있을 것이라는 확장이 이 장면에서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관심도 두지 않았던 처남을 팔아가며 형님이 잘 알고 있는 장성을 소개시켜달라는 매형이나, 그게 뭐 큰일이냐며 거들먹거리는 또 다른 중년 남성의 모습은 그때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꿋꿋하게 내려오는 남성연대,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곧 이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병풍으로 만들고, 배제하며 많은 것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폭력의 씨앗>이 진단하는 폭력은 그만큼 집요하고 일상적으로 퍼져 있는 것이었다.  
 
수확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납니다. 
 
<폭력의 씨앗>을 보는 내내 긴장되는 것은 비단 화면의 구성 때문만은 아니다. 주용과 주용을 만난 그의 누나 주아(김소이)에게는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오는데 이 전화를 대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감지되는 불안은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단 한 번도 음악이 들리지 않는 이 영화에서 대화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울리는 이 진동소리는 그들을 감시하는 시선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기 충분하다. 주용에게는 필립의 상태가 어떤지, 자신들이 혹여 피해를 입지나 않을지를 물어대는 전화와 외박 후 일정 지역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되는 군인의 신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전화가 걸려오며, 주아에게는 자신이 휘두른 폭력이 밝혀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남편의 전화가 쉴 틈 없이 걸려온다. 주용과 주아는 한 번도 편안하게 전화를 쥐지 못한 채 누가 들을세라 입을 가리고 통화하며 카메라를, 그러니까 타인을 등진다. 이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감시당하며 폭력이 배양되는 그 곳에 놓인다.
 
 
 
그러니까 그들이 갇혀 있는 한 그들에게 특별한 출구는 없다. 이들의 고통은 늘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적절한 환경만 조성된다면 언제나 전달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폭력의 씨앗>은 은폐되었던 폭력들이 어떤 식으로 자연스럽게 대물림되는지를 보여주며 폭력의 스며듦에 대해 이야기한다. 외박을 나간 주용은 감정적으로 너무나 소모가 큰 상황에서도 후임에게 ‘사제’ 군번줄을 맞춰 선물해준다. 이를 받아든 필립은 밖에서 만든 것이 글씨가 조금 큰 것 같긴 하지만 군내에서 만든 것이나 이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주용은 크게 개의치 않으며 나도 선임에게 받은 것이니 너에게 해주는 것뿐이라는 심드렁한 대답을 한다. 바로 이 대물림, 과거에 그러했으니 이유야 어떻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그 굴레, 주용이 말하는 굴레에는 아마도 폭력까지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대물림의 굴레는 영화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필립이 다치고 필립을 병원에 데리고 가겠다는 주용에게 상병은 봉투에서 차비를 하라며 돈을 꺼내주는데 주용은 끝까지 이를 받지 않는다. 그 돈은 박병장 제대선물을 위해 모든 돈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제대할 때 받을테 니 굳이 지금 거기에서 빼낸 돈을 받지 않겠다는 주용의 대답은 결국 나도 이러한 체제 안에서 손해 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생각이 이러한 문화가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진행되게 했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졌든, 혹은 불합리한 것이든 간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궤도에서 이탈해 문제를 일으키거나 내가 제외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들은 끊임없이 이 문화를 만들어낼 것이며, 이는 내가 맞았으니 너희들이 맞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논리와 교묘하게 맞물려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폭력의 씨앗>은 이를 고군분투하던 주용이 필립과 몸싸움을 하다 결국 상병이 그랬던 것처럼 필립의 이를 다시 부러뜨리는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주용은 이번만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필립의 애원을, 또 이번에는 주용이 아니냐는 필립의 의심에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필립의 이를 치료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누나가 당한 폭행과 잘못하면 군에 복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이제 정말로 주용이 폭행 사실을 고발한 것이 아니냐며 다그치며 위협하는 필립의 목소리는 주용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 이때 주용은 네가 오해를 하고 있다거나 혹은 내가 그랬다는 식의 인정을 밀어둔 채 난투를 벌인다. 결국 간신히 치료 놓았던 필립의 이는 다시 부러지고, 바닥에 흥건한 피와 부러진 이는 과거의 동일했던 상황과 겹쳐진다.
 
 
 
이처럼 <폭력의 씨앗>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된 결과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들에 깊이 주목하면서 영화를 진행시킨다. 주용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상황들은 이는 결국 우리 주변에 폭력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면서 그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주용의 누나 주아는 끊임없는 폭력의 굴레가 한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주용이 외박하는 날 배웅하러 오기로 한 주아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주용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 연락을 하고, 결국 직접 찾아가서 연락이 닿았을 때 주아는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편에게 맞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오히려 흥분한 동생을 때리고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지우려 한다. 
 
 
 
때려놓고 금방 잘못했다고 비는 것을 받아주거나 참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린 잘 알지 않느냐는 주용의 말은 주용과 주아 남매가 과거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케 한다. 결국 그 집을 나오지 못한 채 갇혀버린 주아는 앞으로도 남편에게 사과를 하며, 폭력에 적응해 갈 것을 예상케 한다. 그저 ‘집안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쉽게 돌아서는 경비업체 직원이나, 주아의 집을 드나들면서도 상대를 살피기보다 전도하기에 급급한 이들이 주아의 곁에 머무는 이상, 주아 스스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 단단한 문을 쉽게 열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폭력의 굴레는 많은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적응하게 한다. 때문에 어디서나 만들어질 폭력의 생육환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재배기간이 짧아 파종 후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폭력의 씨앗>을 보는 이들은 누구라도 주용이 저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속해서 방해하는 듯 보이는 필립의 행동들에 짜증을 느낄지 모른다. 필립은 군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후임이며, 시간이 없는 상황에 군모를 버스에 두고 내려 주용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들고, 군모를 찾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주용에서 멀뚱히 서있기만 한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매형에게 부탁해가며 이를 치료해주었음에도 고맙다는 말이 없고, 종국에는 오직 자신이 고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주용과 드잡이를 한다. 필립의 이 모든 행동들은 주용의 행동을 가로막으면서 방해하는 듯 보이고 필립의 행동에 어떤 옹호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필립의 행동에 화가 나는 순간, 문득 필립에게 화내는 이 감정이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가 닿았다. 만약 필립이 군내 폭행을 고발한 것이라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기 보다 폭력을 묵인하려는 그 상황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또 그가 빠릿빠릿하며 강해야 할 이유 역시 없으며, 군모를 잃어버린 것이 왜 그렇게 큰 일이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즉, 필립의 행동에서 짜증이 났다면 이는 우리에게도 남성이라면, 그리고 군인이라면 가질 수 있는 어떤 기본이 있기에 그가 임무를 잘 수행해야만 한다는 생각의 틀이 작동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에게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은 곧 우리 안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은폐되어 있는,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물리적인 폭력은 아니라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식 자체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주용은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결국 부대로 복귀해 폭행을 고발했던 누군가를 색출하는 상황에 다시 놓일 것이며, 누나 주아는 그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남편과 함께할 것이다. 그 사이 주용이 과연 어떻게 변할지 아니면 고스란히 과거의 것들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폭력의 씨앗>이 하루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징글징글하게 반복될 하루가 주용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분명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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