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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온도, <세 번째 살인>
살인의 온도, <세 번째 살인>
  • 정지혜 | 영화평론가
  • 승인 2017.12.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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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살인>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이다. 법정을 무대로 사건의 진실을 찾아간다는 설정은 120분짜리 상업영화에 적절하며, 최근 인기 있는 유형의 이야기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는 왜 하필 이 장르를 선택했을까 좀 더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는 영화라는 스펙트럼에서 그런 위치에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히로카즈가 영화라는 실존적 매체를 탐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실존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인과율에 따라 최근 세계의 언어로 세상을 규명하는 일이니 말이다. 이야기는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자기 존재를 입증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을 만나는 일은, 그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에 답을 떠올려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와 나누는 두 시간의 짧고 긴 대화, 그의 지적인 호소에 대한 호응인 것이다.

▲ 반쯤 가려진 살인자의 얼굴
영화의 줄거리는 시게모리가 미스미를 변호하고, 최후에 판결을 받는 것으로 간단하다. 반면 주인공인 미스미와 시게모리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미스미는 이전에 고향 홋카이도에서 살인 전과가 있는 사람이며, 이 전의 살인사건에서 판결한 판사의 아들이 시게모리다. 미스미는 한 세대를 거쳐 이들 부자를 각각 판사, 변호사로 만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며 흥미롭게 진행된다.
 
영화는 대담하게도 살인범의 살인현장을 관객에게 목격시키며 시작한다. 살해당한 피해자는 수변의 수풀에서 스패너에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다. 여러 차례 가격당한 피해자의 시신은 어둠 속에서 불태워진다.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살인자의 얼굴, 어두운 밤, 살해현장과 그 뒤의 도심 풍경 사이로 지나가는 교각 위의 전철. 그 미끈한 모양과 철제진동 소리가 마치 범죄현장과 빛나는 도심이라는 두 공간 사이에 장막을 치는 듯하다. 

이것은 마치 답을 미리 주고 문제를 풀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벗어난 오프닝 덕분에 만회하기 힘든 불안한 출발점에서 영화가 시작하게 됐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됐고 이 불안정한 지점을 시게모리가 이어받는다. 관객은 이제 시게모리가 해답을 찾는 과정을 채점하게 된다. 시게모리가 사건을 맡으며 충격적인 첫 장면의 열기는 금세 식는다. 냉정한 베테랑 법률가의 시선으로 사건은 새로운 물살을 탄다. 시게모리는 감형을 위한 전략적 요소를 빠르게 훑어나간다. 시게모리는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미스미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계속 말이 바뀌는 데다가, 미스미가 이미 검찰조사에서 살인을 자백한 것이다. 시게모리는 판을 뒤집을 단서가 필요하다. 그는 재판 전략상 유리한 새로운 증거를 찾아 미스미의 인생을 맴돌고 영화는 미스미를 향한 의심의 시선을 흔들어댄다.

통제되지 않는 세계의 얼굴, 세계의 심연  

영화는 의도적으로 드라마적 요소나 신파적 요소를 정면에 드러내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 건조한 공간만큼의 거리는 사유를 유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심적 거리 위에서 영화가 정서적 서브텍스트 속으로 우리를 끌어가는 모습이다. 시게모리는 변호를 준비하다가 딸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사고를 수습하러 간다. 사춘기 소녀의 위악과 거짓말, 그것을 뚫고 툭 튀어나오는 돌발적인 진심 사이에서 우리는 인간의 복잡한 성격에 대해 상기하게 된다. 별거 중이었던 시게모리와 딸은 오래간만에 마주 보고 앉게 된다. 둘의 사이에는 어떤 장벽도 없지만, 어떤 질문이나 응시가 오가도 서로의 진실을 알 수 없다. 살인범과 변호인보다는 아버지와 딸의 정서와 심리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 정서적‧심리적 삶의 태도는 곧 신념을 결정하는데 주요한 작용을 한다. 우선 감정이 있고 그다음 생각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인물들의 심연으로 들어갈수록, 인간적이고도 비인간적인 ‘단짠단짠’ 정서 층위를 발견하게 하고 이는 미묘한 감정으로 또 예리한 사유로 연결된다. 인간이란 이렇게 간단치 않은 존재인 것이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재판 전략상 필요한 요소를 찾겠다는 시게모리의 건조한 시선의 밑에서, 매스컴은 피해자의 아내와 피의자 간 내연관계에 대한 의심을 폭로한다. 이는 영화세계 내부의 욕망이기도 하다.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 사소한 이유로 저지른 살인보다 참작을 받아 낮은 형량을 받게 된다는 전제에 따르면, ‘살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덜 끔찍하겠지, 차라리 치정이나 원한 같은 인간적 이유를 설명해줘’라는 것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의 욕구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관성과 극 내부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만나게 된다. 시게모리와 관객은 모두 미스미의 숨겨진 드라마, 예컨대 극적이면서도 이해 가능한 인간적 연유가 있는 범죄로 사건을 종결시키고 싶어 한다. 살인의 진실을 찾는 것은, 살인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욕구다. 살인 사건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찾는 일과 영화감독으로 세계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일이 동질성을 갖는 것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 봉합에서 관객은 극 내부에서 현실 세계로 딜레마를 가져나오게 된다. 
 
▲ 거울구도

사건을 바라보는 사법의 온도계는 미스미를 케이스로 바라보며 확실하게 통제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람 미스미에게 흐르는 인간성의 온도는 잴 수 없는 것이다. 미스미 역을 맡은 ‘야쿠쇼 코지’ 배우는 구치소의 면회장을 인과율의 논리를 뛰어넘는 극적인 무대로 만든다. 여기서 극적이라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지는 상징성이 극대화된다는 의미다. 그의 눈빛과 시선, 음성과 말의 속도 같은 인간적인 특징들이 냉정한 법률가의 견고한 시선을 점차 흔든다. 피의자와 변호사 간, 혹은 살인자와 법률가 간의 유리 벽 사이의 거리를 어떤 지점에서는 상쇄시키기도 하고 그 자리를 거울 같은 자기반영의 공간으로 대체시키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은 사건이 지니는 내부적, 외부적 정서와 시각을 재현하는 주된 요소다. 마주 보고 있는 시게모리와 미스미 간에 놓인 투명한 유리창의 모티브는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한다. 시게모리와 딸이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장면처럼 의미심장한 장면에서도 등장하고, 시게모리가 아이와 여성에게 길을 비켜주는 자동문에서처럼 사소한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이 유리창은 투명하고 차가운 성질로 상대를 직관하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투명한 프레임으로 보이지 않는 성벽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하학적 구도와 자연이라는 공간의 대비는 직선적 구도와 원형‧곡선의 구도로 대비되기도 한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전철이 주는 운동성과 눈비의 운동성 또한 대비되는 시각적 요소로 반복적인 모티브다. 이런 영화문법은 감독이 주로 사용해왔던 문법이기도 하다. 이 문법은 이번 영화에서 세계와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으로 중첩돼 새로운 의미망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큰 주의를 기울여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제도에 대한, 혹은 도시라는 공간이 함의하는 문명 세계가 지키고 통제하는 투명한 자동문에 대한 사유의 창을 열어 놓는다. 이 영화는 자칫 단순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감독의 전략들이 숨어있어서, 관객이 느끼는 궁금함과 긴장감을 통해 관객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진실을 감추고 드러내는, 클로즈업된 얼굴의 온도들이 감독의 질문을 따르고 있다. 영화는 사법의 온도를 통해 살인의 온도, 생명의 온도, 그리고 삶과 죽음의 온도를 추적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수호하는 도시로 명명되는 사회 시스템의 온도를 다큐멘터리언의 예리함으로 묻는다.

영화에서는 두 번째 살인까지만 등장한다. 세 번째 살인이라는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사형제도라는 사법살인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사형을 유도한 미스미의 자살로 볼 수도 있다. 커다란 새장에 살았던 여섯 마리의 새 중 몇 번째 새가 미사미일까? 이 <세 번째 살인>에서는 문학과 철학과 미학의 삼각구도를 만날 수 있다. 한 세대를 거쳐 다시 만나게 된 살인사건에서 판결했던 아버지의 아들은 그의 변호를 하게 된다. 그의 변호가 거치는 과정을 떠올려 보자. 합리적, 또는 냉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 미스미를, 인간 미스미 주변의 다리를 절며 사는 소녀를 바라볼 준비가 됐느냐고 되묻는 듯하다.  

 영화관을 나설 때, 꼬리처럼 따라 오는 질문이 있다. 세 번째 살인을 막기에 우리는 무력한가, 그렇지 않은가?  

▲ 전쟁으로 부서진 성벽 위에서 자라는 지중해의 잡초는 누가 이 전쟁에서 최종 승리했는지 말한다
 
글·정지혜 123456789reen@gmail.com 
영화 평론가, 작가, 콘텐츠 시나리오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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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 | 영화평론가
정지혜 | 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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