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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타는 조용히 울고 있어요”
“내 기타는 조용히 울고 있어요”
  • 오동진 | 영화평론가
  • 승인 2017.12.0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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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 리뷰
다큐멘터리, 특히 지난(至難)한 시대를 기록·기억하는 작품들일수록 후대(後代)의 관객들에게 공유의 폭을 넓히려면, 작은 방편이나마 일정한 설명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공감이라는, ‘역사적 인식의 공유’라는 초병(哨兵)을 앞세울 필요가 있다.

권경원 감독이 만든 분발(奮發)의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는 1990년대, 더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쉽게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겉으로는 1991년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다루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때 희생됐던 126명에 이르는 수많은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함의(含意)는 단순하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에서 이 다큐의 진의가 찾아진다. 권경원 감독이 원하는 것은 결국 ‘1991년’, ‘강기훈’ 등등 과거의 키워드에서 지금 당장의 우리 현실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점핑(Jumping)시키려는 듯하다. 왜 ‘그때’를 기억하지 않느냐고 질타한다는 건 ‘그때’가 아니라 ‘지금’을 이야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때’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지금’ 시대의 본질을 올바르게 알게 하고 싶은 것이다. 

작품을 보다 보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채 안 되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1991년이라는, 진짜와 가짜의 혼돈이 판을 치던 그때와 유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소곤소곤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더,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국가에 대한 예의>는 3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어 거침없이, 그리고 거두절미해 지금 잠깐의 승리로 몽매(夢寐)해지고 흐릿해진 대중의 뇌 속으로 파고들며 역사의 기억을 들춰낸다. 그 뇌파의 충격은 곧바로 온몸으로 전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율이 이어진다. 그 참담했던 시절을 우리가 너무나 편하고 익숙하게 잊은 채 살고 있다는 죄의식이 펼쳐진다.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으며, 무엇보다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진정한 국가’에 대해 오랜 기간 ‘예의와 책임’을 지키지 못했다는 통렬한 반성과 각성에 이르게 한다.

1980년, 그리고 1991년

이제는 사라진 단어, 한국의 ‘학생운동’ 역사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역경의 시대는 사실 90년대였다. 가짜와의 싸움, 곧 의사(擬似) 민주주의와의 투쟁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1991년이 그랬다. 한때 반골(反骨)이라고 자처했던 사람들일수록 ‘이제 좀 그만하자’는 분위기가 사회에 퍼져 가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노동계에서 투신과 분신이 줄을 이었다. 집회와 시위 도중 일명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인한 심각한 부상과 사망도 계속됐다. 사회경제적 안정을 희구(希求)하는 미디어들의 허구적 보도와 달리 핏빛 죽음이 학내(學內)에서 사회단체로 그리고 노동현장으로 이어졌다. 한국사회가 바야흐로 학생운동 중심에서 사회계급 운동으로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집결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 운동에 있어 1990년대는, 수많은 고문과 억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분단과 북한이라는 상황 및 존재에 대한 정세 파악에) 무지했던 反독재운동기의 1970년대에서 사구체(사회구성체)라는 현란한 수식어들의 논쟁(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만으로 자기 무덤을 팠던 독단적 운동기의 1980년대를 거쳐 비로소 대학-사회단체-노동계 등 諸단체가 연대하는, 이른바 ‘산학협동’의 사회 이데올로그(Ideologues)들이 탄생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990년의 ‘3당 야합’이 선수를 쳤다. 마침 사회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피로도가 쌓여 가던 시기였다. 

김지하와 같은, (고문과 오랜 투옥으로 인한 것으로 믿고 싶지만) 변절보다는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를 보여 온 지식인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공개선언까지 하던 시기였다. 수구언론들이 춤을 췄다.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호도되기에 십상이었다. 차라리 YS와 같은 가짜를 진짜인 것으로 믿고 싶어 했다. 그런 점에서 YS는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용서받고 추앙받는 것보다(고인이 되기 몇 해 전까지 얼마나 극악한 수구의 아이콘으로 뉴스를 장식했던가), 역사 속에서 말없이 겸손하게 파묻히는 쪽을 택해야 옳다. 1993년 그가 대선으로 가던 길목의 한국 정치권은 학생과 사회운동권 인사들을 철저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 김영삼은 그 책임을 지지 않고 죽었다.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국가에 대한 예의>를 보고 있으면 1980년의 광주가 읽힌다. 이 다큐에 기록된 수많은 죽음 곧 강경대, 김귀정, 박창수 그리고 김기설의 영혼이 광주항쟁의 현장에 닿아 있음이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단 한 번도 우리는 역사적 청산(淸算)을 이루지 못했다. 1991년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은 결국 ‘광주’라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올바른 귀결을 요구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당시의 노태우(사실상 김영삼) 정권은 이 같은 사상의 확산을 억제하거나 제거하고, 해소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조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강기훈이라는 역사적 희생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 내에서,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백 퍼센트 주어지기까지 참혹하게도 2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국사회가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 역사를 올바르게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기훈 보다는 ‘강기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는 ‘결단코’ 그가 24년 만에 무죄 판정을 받게 되기까지의 법정기록이나 재판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일종의 음악영화다. 아마도 국내 유일의 음악영화제인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등에서 개막작으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그만큼 서정성이 뛰어나다. 선언(宣言)적이지 않고, 이념적 우위를 내세우며 뻐기거나 불필요하게 도덕적이지도 또 강압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매우 ‘슬기로운 다큐멘터리’라는 느낌을 준다.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지만 강기훈은 지난 24년간 그 스스로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역사의 대미(大尾)에서 사라지려고 노력해 온 인물이다. 강기훈보다는 ‘강기타’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 그는 역사의 영웅이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자신이 평범해져야 사회가 평범해진다고 믿는 듯했다. 사회와 역사는 평범할수록 좋다. 범인(凡人)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지며 사는 사회가 좋다. 강기훈이 궁극으로 꿈꾸는 것은 그런 사회다.

그래서 그는 기타를 치고 사진을 찍으며 살았다. 그런 면에서 다큐멘터리 <국가에 대한 예의>는 강기훈의 ‘의도된 초연함’을 기록한 작품이다. 그는 왜 비켜나 있으려고 하는가. 그는 왜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삼가면서 살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1991년 그와 함께했던 그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자신보다 더 강하게 기억돼야 한다는 사명감, 역사인식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이 다큐가 담고 있는 핵심의 전언(轉言)이다.
영화는 그래서 놀랍게도, 매우 감성적이다. 직선도로보다 분위기가 남다른 우회로, 산책길을 택하고 있다. 권경원 감독은 그 가는 길을 여러 단락으로 나눴으며 단락마다 강기훈이 직접 연주하는 기타 소리를 들려준다. 빌라 로보스의 <기타를 위한 전주곡>도 나온다. 영화 <디어 헌터>의 테마곡이었던 스탠리 마이어스의 <카바티나>도 들을 수 있다. 명연주자는 아니지만 강기훈의 기타에는 울림이 있다. 권경원 감독은 그 울림을 이어 매 단락에 1991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그 기억에 대해 부록처럼 이야기를 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해준다.

뒤로 갈수록 1991년에 치솟았던 혁명의 기운이 서정(抒情)을 만나 예술로 승화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때의 억울한 죽음들이 이제야 하늘로, 천국으로 가는 느낌이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해내지 못했던 보상이 주어지는 듯하다. <국가에 대한 예의>는 시대의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와 같은 내러티브와 스토리 구조로 다중(多衆)들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 수 있음을 입증한 영화다. 권경원은 그런 면에서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장(章)을 쓴 셈이다. 

엔딩 타이틀곡으로 비틀즈의 <내 기타는 조용히 울고 있어요,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를 쓴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불멸의 명곡에 나오는 가사야말로, 1991년을 기억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I look at the world / And I notice it’s turning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의역하면, 언뜻 세상을 바라보니 그건 그냥 돌아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내 기타만이 조용히 흐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마치 강기훈의 기타처럼. 그리고 강기훈이 바라보는 세상처럼. 

<국가에 대한 예의>는 이념의 투쟁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투쟁이 돼야 한다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의기(義氣)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자기고백서와 같은 작품이다. 세상은 늘 다큐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러나 종종 다큐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국가에 대한 예의>가 바로 그런 다큐다.  


글·오동진
문화일보와 YTN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영화 전문지 FILM2.0에서 영화전문기자로 일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서울환경영화제 부위원장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노무현재단이 주최하는 ‘사람사는 세상 영화제’ 예술감독을 하기도 했다. 전업 영화평론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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