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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마르케스가 유니클로에게 감사하는 겨울밤의 지구온난화
[안치용의 프롬나드]마르케스가 유니클로에게 감사하는 겨울밤의 지구온난화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2.16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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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은 감각이 좋고 장래가 촉망된다. 에너지를 과다 사용하여 종종 Burn Out 되는 것까지, 젊다. 여성혐오에 대해 전면적으로 맞서 싸우는 투사는 아니지만 상당한 결기를 품고 일상에서 적절히 대응하는 깬 여학생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그에게서도 이중성이 발견된다. 예컨대 최근의 식사 자리에서 요즘 한창 기세등등한 추위를 얘기하다가, “그래도 남자는 내복을 입어서는 안 되고, 목도리를 둘러서는 안 된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역시 약간 추워 보이게 입었다.

 

ㄱ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해방되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남자를 의식하지 않았고 혹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매우 오랜 기간 남자인 게 거추장스러웠다. 이제 결정적으로 나는 ㄱ의 관점에 의거하여 남자가 아닌 게 되었다. 그렇다고 여자일 리는 없으니, 자신의 성 정체성을 표명해야 할 때 시답잖게 대충 중성(中性)이라고 말한 바로 그대로 새로운 성의 영역에 접어들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의 파시즘적 언명에서 상처받지 않는다. 어떤 파시즘은 유쾌하다.(당연히 그 어떤 파시즘이 진짜 파시즘이어서는 안 된다.)

 

ㄱ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나만 해도 50살이 되기 전에는 바지 속에 내복을 입지 않았다. 답답해서. 50살이 되어갈 즈음의 어느 겨울날, “내복이 아니라 ‘히트텍’이다”는 유니클로의 주장에 설복된 이후 겨울마다 나는 바지 속에 짙은 회색의 내복을 입고 추위를 넘겼다. ‘히트텍’으로 우회한 길의 끝에서 나의 젊음은 나의 남성은 중년에게 중성에게 바톤터치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히트텍’은 딱 ㄱ의 파시즘에 부합하는 수준의 (스스로 평가하기에) 귀여운 자기기만이지만, 종종 사건은 기만이 개입되지 않았음에도 본질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최근의 한파가 그렇다. 지구온난화는 온난한 것이니까 덥겠다는 오해가 대표적으로, 반대로 북극의 찬바람을 북극 지역에 가둬놓던 제트기류의 흐름이 지구온난화로 느려지면서 찬바람이 남으로 밀고 내려와 한반도에 북극 한파가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다. 71년 만에 가장 빠른 한강 결빙이니, ‘13한 2온’이니 하는 현상은 지구온난화의 현상이다.

 

‘히트텍’은 분명 나의 몸을 데워주었지만, 뒤늦게 나의 청춘에 마침표를 찍는 일까지, 나 몰래, 나의 요청을 받지 않은 채 수행하였다. 또한 내가 동료 인류와 함께 자행한 50여 년의 탄소배출은 내 어린 날의 ‘3한4온’을 퇴장시켰다.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은 물론 멋지지만, 예컨대 온실가스의 농도가 진해질수록 지구 재앙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처럼, 역으로 진한 농도의 사랑은 사람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 때로 거리의 증발은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데” 그 타인에서 ‘사랑하는 그 사람’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데서 지구온난화와 동일한 문법이 사랑을 지배한다는 비극이 암시된다. 사랑은 언제나 파국이다.

 

청바지 천의 차가운 기운이 살갗에 곧바로 전해지는 느낌은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생동이기에 ㄱ에게 ‘히트텍’은 앞으로 오랫동안 불온한 책동으로 남을 테지만, 불온함이 삶의 본질적 구성요인임을 받아들인 나에게 그 느낌은 잃어버린 바통에 불과하다. ‘히트텍’이 이 한파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물론 나를 중성화의 평온함으로 인도하였기에, 더러 나쁜 소문에 휩싸이기도 한 유티클로에게 감사하는 밤이다. ‘히트텍’ 입은 남자를 배제한 ㄱ의 파시즘적 남성취향이 나를 족쇄에서 해방시켰기에 ㄱ에게도 감사한다. 그러나 온실가스에 감사할 수 없듯이 나를 떠난 사랑에게는 감사할 수가 없어 보인다. 영화 <마더!>의 결말처럼 사랑은 삶의 최종심급이다. 사랑에게서 버림받을 수는 있어도 사랑을 버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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