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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서열화를 거부하는 ‘대학평가’
신자유주의적 서열화를 거부하는 ‘대학평가’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7.12.2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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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의 모 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불문학과 교수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영어로 논문 몇 편을 쓴 지원자가 그보다 논문 편수가 몇 배나 더 많은 쟁쟁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종 합격했다. 면접에서 탈락한 이들이 전한 실상은 더 놀랍다. 프랑스어 교수법이 그의 전공이지만, 그가 제출한 논문들은 한국과 몽골 간의 죽음의 풍습, 발효음식 연구 등 프랑스어 교습법과 전혀 관련이 없는 주제에 관한 것들이었으며, 게다가 그것들은 불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돼 있다는 것이다.    

미국 학술단체에 등재된 SCI급 논문 한 편이 국내 학술지 5편 이상, 또는 훨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교수 채용시스템 탓에 빚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다. 대학순위를 발표하는 국내 재벌 언론사가 각 대학의 연구능력을 평가할 때 ‘SCI급 논문횟수’를 가장 중시하는데, SCI급에는 SCI, SCIE, SSCI, A&HCI, SCOPUS 5가지를 말한다. 이 중 공학은 SCI, SCIE, SCOPUS, 사회과학은 SSCI, 문화예술은 A&HCI와 각각 관련이 있다. 여기에 교육부마저도 정부지원금 순위를 정하기 위한 대학평가 시에 ‘SCI급 논문횟수’를 최우선시하다 보니, 대학마다 논문의 질이나 진정성을 따지지 않고 SCI급 논문 보유자를 우대한다. 말이 국제저널이지 미국의 크고 작은 학회들이나 대학들은 저마다 SCI급 논문을 발행하는 걸 보면, 그다지 선별력이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다.  

상위 순위에 목멘 대학들은 교수 신규채용 시 또는 연구비 지원 및 승진심사 시 불문학, 독문학, 일문학, 심지어 국문학마저 SCI급 논문을 필수조건으로 내세운다. 그렇다보니, 불문학 전공자가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풍습이나 발효음식 같은 주제의 논문들을 불어가 아닌 영어로, 그것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한글 논문을 번역회사에 맡겨 원저자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공저의 형태로 내놓는 뻔뻔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돈이면 다 해결된다. 대학들은 저마다 순위를 올리기 위해 SCI급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는 교수들에게 편당 1~2천만 원을 인센티브로 지급하며, 영어 논문 쓰기를 독려한다. 그러나 시간강사들이나 비정규직 교수들은 이에 해당하지 않아, SCI급 논문에 노크하려면 논문 번역료로 자기 돈을  2~300만 원 들여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글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SCI급 저널의 게재까지 풀서비스를 해주는 대행업체들이 성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적대로, 현대의 사탄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돈’(1면, 10면)이라지만, 우리의 대학은 지성과 영혼을 밀매하는 소굴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그보다 더 위험하다. 

어디, 논문뿐인가? 경쟁력이라는 슬로건 하에, 대학마다 웃지도 못할 일들이 수없이 빚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정한 최소한의 교수채용률에 맞춰 대학마다 정규직 교수를 뽑지 않고, 정규직 급여의 1/3도 받지 못하는 강의전담교수니, 산학협력교수니, 초빙교수니 하는 비정규직 교수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런 평가방식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수업은 또 어떤가? 학생들이나 교수들조차 소통하기 힘든 영어수업을 얼마나 개설했는지, 기초적인 한국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학생들을 얼마나 유치했는지가 평가항목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국사를 영어로 수업하는 기이한 일들이 빚어지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대학의 현주소다.   
 
본지는 기존의 ‘대학평가’를 거부하는 ‘도발적’ 대학평가에 나섬으로써 독자분들과 더불어 진지한 고민을 나눠보고자 한다. 한국 CSR연구소와 함께 지난 한 해 동안 국내 대학들을 대상으로, 교수진이 아닌 학생들의 관점에서 노동·인권·학생·지역사회·환경·공정성·거버넌스를 살펴봤다(38~39면). 예컨대, 본지의 평가방식에선 심사위원과 투고자 자신만 읽는다는 교수들의 논문 편수와 소통불가의 영어강좌개설 여부는 당연히 제외되고, 그 대신 학생들의 봉사과목 시간이 가점됐다. 신자유주의적 서열화를 거부한 본지의 대안적인 대학평가가 대학이 우리 공동체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올바른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크게 일조하리라 기대해본다. 이제, 대학이 변화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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