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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늑대를 끌어안고 살아가기 <인랑>,(오카무라 히로유키, 2000)
[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늑대를 끌어안고 살아가기 <인랑>,(오카무라 히로유키, 2000)
  • 이대연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2.12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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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인해 유랑이 형벌을 받지만, 평생 유랑하며 불행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는 에덴 동편 놋 땅에 성을 쌓았다. 카인의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의 아들들이 육축 치는 자와 노래하는 자, 대장장이의 조상이 되었다. 어느날 라멕이 자신의 아내들 앞에서 노래하였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창세기 4:23~24)”

<인랑>은 인간과 늑대에 대한 이야기이자 개와 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카인과 라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시이 마모루는 ‘케로베로스 사가’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고, 오카무라 히로유키는 사실적인 그림체와 음울한 분위기로  20세기 최후의 셀 애니메이션 명작을 연출했다. ‘케로베로스 사가’는 일본이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 패망했다는 가상의 역사를 설정한다. 대체역사물인 셈이다. 미국은 고립주의를 유지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한 일본은, 히틀러가 제거된 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건된 독일의 핵 투하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그런데 일본의 현실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도성장 정책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슬럼을 이루고 정부에 극렬히 저항하는 모습은 적군파가 활발히 활동한 일본의 1960년대를 닮았다. 섹트니 특기대니 하는 가상의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분기점에 서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설정하여 역사의 방향을 비틀고 왜곡시키는 작업이 없더라도 상상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독일에 의한 일본의 패망이라는 가상의 설정이 씨줄 역할을 한다면 ‘빨간두건’ 이야기가 날줄을 이룬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쾌한 권선징악이 아니다. 끔찍하고 잔혹한 페로의 판본이다. 빨간 두건은 엄마의 피와 살을 먹고 결국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빨간 두건’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극의 흐름에 개입하며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테러리스트에게 무기나 폭발물을 운반하는 어린 아이나 여성을 빨간 두건이라 부르고, 무장 테러조직인 섹트를 제압하고 도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창설한 특수 무장조직인 특기대의 첩보, 암살 조직의 명칭이 ‘인랑’이라는 사실이 알레고리를 더욱 강화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딱 떨어지거나 명확하지는 않다. 오히려 영화의 흐름을 교란시키기까지 한다. 이 씨줄과 날 줄 아래 ‘왜?’라는 후세 카즈키의 질문이있다. 

특기대원인 후세는 지하 수로에서 빨간 두건의 일원으로 폭발물을 운반하던 아가와 나나미와 마주친다. 공포에 질린 소녀는 폭발물의 기폭선을 잡아당기지만 후세는 총을 쏘지 못한다. 다만 “왜…?”라고 질문할 뿐이다. 질문의 이유도 내용도 말해주지 않지만, 마치 길모퉁이를 돌다가, 혹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도 문득 마주칠 수 있는 삶에 대한 어떤 근원적인 질문을 닮았다. 그 잠깐의 망설임과 질문 탓에 소녀는 자폭하고 후세는 동료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지만 문책을 받고 양성교육소에서 재훈련을 받는 처분이 내려진다. 그리고 그의 친구이며 경쟁조직 공안부의 일원인 헨미는 그가 ‘인간’이라고 판단한다.
 
인간의 대척점에 늑대가 있다. 그러나 늑대의 지시대상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인물과 사건을 ‘빨간 두건’이야기에 도식적으로 대입시키도록 몰아세우지만 고정되지 않는다. 막연히 기만하는 존재, 주저 없이 상대를 물어뜯는 어떤 존재, 인간의 내면에 깃든 짐승의 속성을 의미하는 듯하다. 후세는 분명 인간과 늑대의 갈림길에서 방황한다. 그런데 그 선택은 가능한 것일까?  ‘빨간 두건’이야기에는 바느르이 길과 가시의 길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이 나온다. 빵과 우유, 치즈와 버터를 들고 엄마를 찾아가는 소녕에게 늑대는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묻는다. 소녀가 바늘의 길로 갈 것이라고 답하자 늑대는 가시의 길로 달려가 엄마를 죽인다. 프로스트처럼 ‘가지 않은 길’을 아쉬어하고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 만일 소녀가 가시의 길을 선택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엄마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빨간 두건 소녀는 (아무리 늑대에게 속아서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사람일 수있을까? 기만당했다는 항변은 의미가 없다. 교관 토보에는 후세에게 말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과 함께 살아도 늑대가 인간이 될 수는 없어. 자기가  운반한 폭탄으로 많은 생명을 빼앗은 저 여자의 죄가 절대로 지워질 수 없는 것처럼.” ‘인랑’ 조직의 대장인 토보에는 자신들이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늑대”라고 말하지만 늑대의 탈을 쓴 인간과 인간의 탈을 쓴 늑대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어쩌면 아예 없는 것인지 모른다. 내면에 인간과 짐승을 함께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각자의 선택은 입장과 논리로 표출된다. 테러조직인 섹트에게는 섹트의 논리가 있고 특기대에게는 특기대의 논리가 있다. 그리고 공안부 역시 나름의 이유와 입장이 있다. 소녀의 자폭으로 상심한 후세에게 친구 헨미는 각자의 논리와 입장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위로한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서 잇는 자리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폭한 소녀의 언니(라고 알려진) 케이는 후세를 사랑하게 되고 그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그녀에게 도망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그들이 놓여 있는 자리, 그 입장과 논리로부터의 이탈이며 재설정이다.  그러나 후세는 거절한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 케이는 빨강망토 이야기를 외치며 후세에게 절규한다. “왜 이렇게 눈이 커요? 왜 이렇게 귀가 뾰족해요? 왜 이렇게 손톱이 날카로워요?” 이것은 늑대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며 그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질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마치 로미오에게 왜 이름이 하필 로미오냐고 한스러워하는 줄리엣의 탄식 같다. 그러므로 원망의 대상은 운명이다. (자의든 타의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늑대가 되어 상대의 살과 피를 먹을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관계맺음의 방식인 것이다. 

입장과 논리의 크기가 줄어들면 개인이 되고 확대되면 국가가 된다. 그리고 늑대가 사육되면 개가 된다. 아무리 포악하고 난폭한 존재라도 관리되고 통제될 수 있다면 위험하지 않다. 특기대의 별명이 케로베로스인 까닭이다. 케로베로스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사냥개 모습을 한 괴물이다. 케이와 후세가 번갈아 ‘빨간 두건’을 낭독할 때 영상은 풍요를 누리는 일본 중산층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평화로운 인파 사이로 시위대의 깃발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위로 ‘빨간 두건’의 한 장면이 케이와 후세의 목소리로 겹쳐진다. 빨간 두건은 늑대의 거짓말에 속아 엄마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그것을 경고하는 고양이와 새를 모자와 신발을 던져 쫓아낸다. 그리고 졸음을 호소하는 소녀에게 늑대가 말한다. “이리 와서 눕거라.” 

여기서 ‘늑대’는 개인의 내면에 깃든 야수성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라는 권력의 문제로 확대된다. 그러나 <인랑>에서 ‘국가는 최고의 도덕’이 아니다. 그것은 기만하고 통제하고 물어뜨는 존재이다. 대체역사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극 중 일본의 현실이 우리가 아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도 이것이다. 미국에 의한 패망이냐,독일에 의한 패망이냐, 하는 것은 바늘의 길과 가시의 길처럼 동일한 결과가 기다리는 선택의 기로이다. 태초에 신을 기만하고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은 성을 쌓았다. 그곳에서 라멕이 노래했고, 그의 아들들이 문명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권력 아래에서 늑대는 길들여지고 사랑은 상처받는다. 케이를 구하러가기 위해 두툼한 책을 파고 보관한 총을 꺼낸다. 책의 제목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그것은 바그너의 각색본이었다. 

케이는 후세와 처음 만난 날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죠?”라고 묻는다. 강 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 마치 두 갈래길 같다. 그러나 강물은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는 것은 무이미하다. 대체역사라는 것도 그렇고, 인간과 짐승의 구별 역시 그렇다. 어딘가 모호하고 잘 구분되지 않는다. 결론은 같다. 인간과 짐승을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케이의 말대로 “입장이 달랐을 뿐.”  그것이 짐승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인 한 언제나 짐승일 수밖에 없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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