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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최백호와 함께하는 중년남자의 설 단상
[안치용의 프롬나드]최백호와 함께하는 중년남자의 설 단상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8.02.15 2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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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하루 앞둔 저녁, 서울의 도심공원은 고즈넉하다.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단어 그대로 고즈넉하다. 개 두 마리와 함께 늘 다니는 입구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다. 늘상 스콜을 흥분시키던 참새 떼마저 보이지 않는다. 조만간 이 작은 공원에서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낼 벚나무 밑동에다 스콜은 한 다리를 씩씩하게 들고 영역을 표시한다.

 

저녁 산책을 나오기 전에 설맞이 특식을 먹었기 때문일까, 개들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떡국 끓일 고기의 일부를 떼어내어 잘게 썰어 피자 토핑처럼 사료 위에 얹어 주었다. 남아서 주는 게 아니라 나눠주는 게다. 아마도 이 표현이 과거의 개와 현재의 개 사이의 유력한 구분법의 하나이지 싶다.

 

어제는 노모와 모처럼 단 둘이 점심을 먹었다. 여전히 육식을 좋아하는 구순 가까운 노모에게 고기를 사드릴 때면 가장 먼저 가위질을 해야 한다. 시킬 때 연한 고기를 시켜야 하고 고기가 삶아져 나오거나 불에 익으면 아주 잘게 가위로 썰어서 놓아 드린다. 효자 코스프레라기보다는, 나보다 약한 생명체에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나 할까. 나는 나의 개들에게도 고기 같은 걸 잘게 썰어서 제공한다. 어머니와 개를 같이 대한다고 누군가는 불효막심하다 하겠다.

 

나 같은 86세대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조금 측은하게 파악하면 자신 또한 늙어가며 더 늙은 부모를 돌보고 동시에 취직하지 못하는 자식까지 부양하는, 설이니 화투용어를 들어 ‘양박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대학 진학 준비 과정에 막 진입한 자식에게는 약간 흐린 눈으로 뭔가를 잘게 썰어서 주지 않아도 되는 걸 그나마 개인적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같은 현상을 다르게 파악할 수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잘게 썰어주는 고기를 받아먹는 것에 비해 내가 그 일을 해줄 수 있다면 거창하게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측은이란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나 역시 누군가 먹여줘서 성장했으니 누군가에게 그런 일을 한다고 유세 떨 일은 아니다. (물론 아직 한참을 가위를 잡아야 하겠지만) 또한 내가 노모처럼 허리가 굽고 이가 성하지 않은 데다 손까지 굼떠지면 장성한 자식이 가위를 잡게 되리라고 대체로 예상할 수 있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의 풍경이다. 설령 먼 훗날에, 혹은 그리 멀지 않은 훗날에 나를 위해 누군가 가위를 잡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일은 아니다. 이미 지금 나이로도 너무 많은 육식을 했기에 그 나이엔 육식과 담을 쌓는 방책을 우아하게 검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금 상이한 맥락으로, 노래에서도 같은 현상이 다르게 파악되는 걸 느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젊은 대학생들과 자주 교류하게 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이 생각보다 내 젊은 날의 노래를 많이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김광석, 이문세, 김현식, 공일오비 등 86세대 청춘기의 대표적 가수와 노래를 줄줄이 꿰고 있어서 놀랐다. ‘응팔’ 같은 드라마, 아이돌 편중을 벗어난 다양한 가요프로그램의 유행, 젊은 가수들의 옛 노래 리메이크 등이 원인으로 꼽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사가 감성적이고 곡조가 급진적이지 않아 따라 부르기 쉽다는 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들은 86세대와 86세대의 노래를 뭉뚱그려 이해한다. 예컨대 요즘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백호 같은 가수를 나와 같은 범주로 본다. 하긴 1950년 부산에서 태어난 최백호와 1960년대에 서울에서 태어난 나를 동년배로 취급하는 행태가 내 입장에서나 의아하지, 그들 입장에서는 이해할만한 것일 수 있다. 그들에게는 1950년대(최백호는 1950년대에서도 시점에 걸려있지만)나 1960년대나 그게 그것이다. 같은 연도에 출생해도 ‘빠른’까지 따지지만 심리적 수용 변별력이 작동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선 무감각해진다.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가수에 대해선 노래의 발표연도가 중요하지 가수의 출생연도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이 명곡이라고 감탄하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해서’가 발표된 1995년에 나는 세상 물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직장인으로서 총각의 마지막 해를 보냈다.

 

나보다 나이가 ‘제법’ 많은 최백호와 나를 동년배 취급하는 게 억울하다거나 어이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점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86세대의 노래를 향유하고 열광한다면 그때 그 행동은 이른바 ‘클래식’의 수용이 되지만, 내가 그 노래들을 좋아한다면 중년 혹은 꼰대가 그저 자신 시절의 (옛) 노래를 좋아하는 것이 된다. 옛 노래를 옛사람이 수용할 때 현재성이 구현되지만 그 현재성은 박제된 형태이다. 옛 노래를 새 사람이 수용한다면 현재성이 소거되지만 대신 역동성을 얻는다. 복제 없는 원본은 박물관의 수장고에나 어울릴 법한 물건이다. 반면 원본 본제의 다양한 변주는 삶의 휘황한 광채이다. 이때 적어도 원본이 망실되지는 않았음이 옛사람과 새 사람 모두에게 가능성이 된다.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슬퍼할 건 없다. 언제나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그게 사실이 아니어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를 기회가 정말 많이 줄었다. 조직 내에서 독립생활을 하다가 아예 조직마저 떠난 게 옛 문화와 결별한 결정적 계기였을 것이다. 빈도와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새로운 노래를 배워서 부르지 않는다. 기회가 닿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해진 몇 곡의 노래를 부른다. 세월이 흘렀고, 이제 몇 곡으로 충분하다.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이 나이엔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많다. 가령 앞서 이야기했듯 어쩌다 가위를 들거나 늦은 밤 시간에 거실의 PC에서 미드 몇 편을 연달아 보기도 하여야 한다.

 

또한 최백호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지만, 최백호만큼 나이가 들지 않은 것도 아닌, 1987년 아스팔트에 섰던 중년 86세대는 일상의 아침이나 설 전날의 저녁에는 개들과 함께 산책한다. 오늘 저녁에 마주친 개의 주인이 나직이 물었다. “수컷인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개들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속으로 묻는다. ‘내 개 말인가요?’ 꼰대처럼 나이를 거론하자면 ‘낭만에 대해서’(작사/작곡/노래를 모두 최백호가 맡았다.)를 발표한 최백호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다. 가사처럼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는 굳이 따지면 궁금할 것도 같지만 별반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 소녀는, 만약 죽지 않았다면 설음식을 준비하며 가끔씩 뻐근한 허리를 펴고 있으리라고 대체로 예상할 수 있다. 한 번의 설을 더 쇠면서 드는 생각은 이제 지난 것들은 지난 시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백호의 노래가 훌륭하긴 하지만 있건 없건 “돌아올 사람”을 운운하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다. 꼰대답지 못한 발상이다. 아마도 최백호가 이 노래를 발표할 때 너무 젊었던 모양이다. 내 관심사는 이곳에서 어떻게 잘 늙어갈지이다. 새 노래를 배울 필요도 없지만 옛 것은 옛 노래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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