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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로맨스’와 이윤택의 파렴치 너머에는
홍상수의 ‘로맨스’와 이윤택의 파렴치 너머에는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8.02.28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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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와의 춤을>, 2005 - 빅토르 스티벨베르크

이윤택, 고은, 조민기….

시인, 연출가, 배우, 기자, 검사, 신부….

서지현 검사에 의해 본격화한 미투 운동이 법조계와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사회 전체를 충격과 탄식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미투 사례가 뉴스란을 도배한다. 현기증이 날 만큼 폭발적으로 이어지는 미투 릴레이와 별개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미투 운동이 현상적 사건화를 넘어서 한국사회의 지반에 중대한 균열을 가져오리라고 예상한다(혹은 기대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우려한다).

개인적으로는 미투 운동에서 촛불혁명의 현재진행형을 목격한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촛불혁명이 완성됐다는 얘기는 참으로 외람되다. 부패한 거대 정치권력을 무너뜨린 다음에는 그런 거대 부패를 가능케 한, 또는 그런 부패에 기생하거나 그런 부패구조의 구성요소로 기능한, 다양한 영역에 포진한 억압적 권력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다. 특히 ‘여성’에서 이른바 정통이론의 창의적 해석과 역동적 전개의 가장 큰 잠재력이 거론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이지만 그에 상응한 수준의 가장 뻔뻔한 인지회피가 일어나는 억압과 폭력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은 가장 오래된 운송수단”이란 인류학의 언명이 시사하듯 이렇게 누적돼 현재완료와 미래완료로 작동하는 억압과 폭력은, 가해집단과 피해집단이 인류사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로 존재하며,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가해/피해의 구조 전승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 번도 극복의 길이 제대로 열린 적이 없다. 

이제 노도처럼 일어나는 미투 운동이 새로운 길을 열리라는 기대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의 의의와 그 파괴력에 대한 성원이 크다 해도, 이런 혁명적 일격이 모든 억압과 폭력의 기제를 일소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인되지 않는다. 동시에 미투 운동이 만들어내는, 또는 만들어낼 균열이 너무 뚜렷해서 혐오와 폭력의 기제가 종전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리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미투 운동이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성취로 자리매김하겠지만, 더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활적 변화의 시작점이라는, 혹은 시작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이다. 핵심은 혐오와 폭력 기제의 철폐이지, 그 작동방식의 변경이 아니다. 

이윤택은 예외적 인물인가

연극 연출가 이윤택의 행태가 폭로되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행태와 연극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무엇보다 그를 비난한다. ‘남녀노소’ 중 남자들은 나아가 이윤택이 뉴스 속 인물이며, 현실의 자신은 이윤택과 다른 ‘선량’한 남자라고 믿거나 그렇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남자의 노소 중에서 ‘노’ 쪽으로 옮아가면 즉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혐오 및 폭력의 사회기제에 더 오랫동안 노출된 젊지 않은 남자들의 상당수가, 거울 앞에서도 ‘선량’을 주장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거의 예외 없이 “나는 이윤택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을까. 최소한 ‘이윤택과는 다르다’고 믿을 법하다.  

착각이다.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떤 여성도 혐오와 억압을 피해 갈 수 없듯이 이윤택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성 또한 없다. 가부장제는 남성지배이며 동시에 여성에 대한 혐오와 다양한 유무형의 (성적) 폭력을 일상적으로 또한 보편적으로 작동시키는 가해장치다. 여성이 자신의 잘못과 무관하게 억압과 폭력에 무작위로 노출되듯이 남성 또한 자신의 의지로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으로 길러진 건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천적 존재로서 각각 가해진영과 피해진영에 속하게 됐을 때 가해진영에 속한 사람이 특별한 노력 없이 이런 가해/피해 구조를 자각하기란 대체로 난망한 일이다. 피해진영에 속한 사람과는 다르다. 

각성의 계기 없이 젊은 날을 흘려보낸 (세계는 논외로 하고) 한국의 (젊지 않은) 남자들이 이윤택과 욕망의 음험한 원형을 공유한다고 나는 추정한다. 성적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폭력과 억압을 동반한, 가해 경향을 본질로 하는 성적 욕망은 사악하다. 이때 사악하다고 간주되는 이 성적 욕망은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과는 무관하다. 성도착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혹은 발전한다 해도, 개인 간의 소통과 동의, 그리고 상호 쾌락을 위한 사디즘/마조히즘은 원론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 개인 간의 합의에 따라 성적 쾌락을 위해 동원된 폭력의 욕망은 근본적으로는 사도마조히즘이어서 이윤택의 지배-가해-배설의 일방적 욕망과는 다르다. 개인 간의 합의를 거론한다면 성을 매개로 상대를 마주한 응당 대등한 인간을 전제해야 하는데, 대등이란 개념 자체가 사회적인 맥락을 가지는 것이어서 현실에서 이윤택의 욕망 유형과 사적(私的) 사도마조히즘 유형을 구분해 내기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사회계약론에서 최초의 인간을 상정했듯, 상호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발적 대상화를 감행하는 성 앞에서 벌거벗은, 진공인 탈(脫)사회·탈(脫)권력의 사랑의 공간이란 개념을 남겨두지 않을 수 없다.  

사도마조히즘과는 구별되게, 이윤택의 행위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해/피해 구조에서 사회의 특정 영역에 존재하는 가해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남성 가부장의 전횡으로 파악할 수 있다(이 가해 피라미드는 특정 영역에만 존재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다양한 크기로 중첩돼 빈틈없이 또한 총체적으로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이윤택의 욕망과 행위가 본질적으로 권력 기제에 의해 작동했다는 뜻이다. 물론 가해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다고 해서 모두 이윤택처럼 전횡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는 요행히 전횡하지 않는 ‘선량한’ 가부장을 만나 전횡을 모면했다 해도, 가해 피라미드 자체를 피해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해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른 남성 입장에서는 ‘성공의 트로피’ 혹은 ‘전리품’으로 주어진 전횡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양심적인’ 면모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그 피라미드에 속해 있으며 가해 기제의 작동을 중단시킬 의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재로선) 역량도 갖추지 못했다. 요즘 평생 가장 큰 유명세를 치르는 중인 이윤택은 사회-성 도착의 남성지배 욕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연히 어떤 수치심도 없이 나아가 모종의 자부심으로 표출했다. 이윤택이든 아니면 다른 ‘선량한’ 가부장이든, 혹은 이윤택의 수하이든 ‘선량한’ 일개 남성들이든, 그들이 사회-성 도착의 남성지배 피라미드의 일원이며, 전체로서 가해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작동케 한다는 사실이 주어진 진실이다. 

남성지배의 억압·폭력의 가해 피라미드는 끄떡없다

잠정적 이윤택인 (젊지 않은?) 남자들이 미투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선 자신을 부정하는 근원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현재는 ‘선량한’ 일개 남성들이 “이윤택은 나쁜 놈이지만, 나는 이윤택이 아니다”는 입장을 반복하는 국면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정점에 오른 이들은, 그 가운데 ‘일부’는 미투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일부’ 중에 파렴치하고 악질적인 남성들은, 그들을 향해 쌓인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고 자기 고백을 감행한 여성들에 의거해 정점의 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덜 파렴치하고 덜 악질적인 ‘일부’는 살아남아 정점을 지키다가 ‘명예롭게’ 퇴진하게 될 것이다. 미투 운동은 자기고백이란 희생과 더불어 입증책임의 이행이란 수고를 수반하기에, 외형상으로는 결국 정점의 ‘일부’ 남성을 제거하는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도 따라붙는다. 

2016년 8월에 김포공항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미투가 있었다. “노래방에서 가슴에 멍이 들도록 (남성 관리자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자살을 기도했다”는 참담한 고발이 공분을 샀지만, 그 뒤로 뭔가 달라졌다거나 제대로 된 조처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미투 운동이 개인의 결단을 집적해가는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이른바 양이 질로 전환하는 특정한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불가불 개인성이란 한계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미투 운동의 타격 대상이 이윤택이나 조민기 등과 같이 유명한 남성 개인이거나, 미투 운동의 고백 당사자가 서지현 검사나 최영미 시인처럼 유명한 여성 개인일 때 대체로 유효하다.

양질전환이 이뤄지기 전까지, 남성지배는 이런 양질전환을 막기 위해 총체적 보호기제를 작동한다. 이윤택, 고은 등에 대한 미투 고발을 협소한 정치적 현안으로 의미를 왜곡하거나, “해일이 오는데 조개 줍는다”는 식의 전가의 보도 같은 정치적 우선순위를 조작하는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 문제를 남성 기득권에 대한 여성 기득권의 공격이라거나, 여성 내의 세대 간 전쟁이란 분석 등도 본말을 전도시켜 남성지배를 온존시키려는 책략이다.

얼마 전 밸런타인데이에 고가로 팔린 초콜릿 브랜드를 하나 들라면, 벨기에 산 ‘고디바(Godiva)’를 빼놓을 수 없다. 주지하듯 고디바는 중세 영국의 영주 부인으로 전해지는데 백성들에게 부과한 과다한 세금을 깎아달라며 알몸으로 거리를 행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디바의 행위는 분명 영웅적이고 고결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백성들의 삶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게다가 고디바에겐 자신의 고결한 행위를 정반대로 뒤집은 ‘Peeping Tom’이란 역사적 부산물이 따라다닌다. 세월이 흘러선 그 고결함이, 사랑을 상품화한 자본주의의 휘장으로 전락한다.

미투 운동이 고디바의 거리행진과 같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디바의 행위는 인간의 존엄함과 가치에 관한 역사적 논거를 남겼고, 미투 운동 또한 개인성을 포함해 운위되는 다양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남성지배의 오랜 역사에 매우 중요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한 번에 성취되는 역사는 없으며 전능한 진보 또한 없다. 역사는 다양한 층위의 많은 균열이 같은 시점이든 다른 시점이든 축적돼 모이다가 구질서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운 어느 순간 진보를 성취한다. 그런 진보 또한 불가역적이지는 않지만 역사는 누구 말마따나 인간의 자유를 신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자유가 신장돼야 하는 인간에, 여성이 포함되지 말아야 할 정당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자발성과 사명감에 기댄 미투 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궤적을 그릴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지만, 물길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는 누구나 안다. 전능하지도, 총체적이지 않은 소소한 진보들이 모여 커다란 진보를 성취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교훈이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과 사랑의 문제

미투 운동으로 인해 이제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확연한 전선이 형성됐으며, 앞으로 전선의 대치가 심해지고 긴장이 계속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남성 특히 젊지 않은 기득권 남성을 향한 여성 쪽의 적대감은 불가피하게 확대될 전망이다. 억압과 폭력의 가해장치가 작동하는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은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였고, 피해자다. 반면 남성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사고는 모종의 파시즘을 연상시켜 회피됐다. 그러나 가해자가 사후적으로 확인될 뿐이고 가해가능성이 없는 남성을 내기 말고는 파악해 낼 수단이 거의 없는 현실 상황을 감안하면, 여성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상정하는 태도가 훨씬 현명해 보인다.

남성 모두가 잠재적 성범죄자로 간주돼야 한다는 논리가 남성에게는 당연히 억울하고 부당하겠지만, 남성의 본질에 각인된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여성에 의한 남성의 잠정적 범죄자 낙인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호응한다는 점을 살펴보면 억울할 것도 없다. 불쾌하기는 하지만 여성이 그동안 감당한 질곡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처럼 남성 자체가 불편을 겪고 문제를 경험하지 않는 한 남성지배와 여성혐오는 종식되지 않는다. 미투 운동이 최우선적으로 사악한 남성 가해자를 처단하는 과정이 돼야겠지만, 동시에 남성 또한 남성지배의 피해자임을 인식시키는 전반적 변혁이 치밀하게 모색돼야 한다. 무엇보다 가해자진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존엄을 훼손한다는 공준(公準)이 미투 운동을 통해 새삼 상기돼야 한다. 폐해가 있다손 쳐도 어떤 기득권도 크든 작든 그것을 스스로 내려놓은 적이 없다. 영국이 제국주의를 스스로 포기했을 때는 자국이 제국주의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구차하게, 사랑의 문제가 남는다. 앞서, 상호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발적 대상화를 감행하는 성 앞에서 벌거벗은 사랑을 이야기했다. 기호로서 남녀 간의 이 사랑의 가능성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황량할까.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로맨스에 뛰어든 홍상수의 욕망과 미투의 대표 사건이 된 이윤택의 욕망은 상이하다. 억압과 폭력이 아닌 소통과 교감으로서 말 그대로의 사랑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형태로 모색될 수 있으며, 사랑은 마침내 사랑이어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우리는 불가피하게 여자와 남자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그리하여 사랑과 조우하기도 하는,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는 인간은 허망하다. 이런 상투적 마무리를 감수할 정도로 미투 너머에서도 사랑은 새롭게 발굴돼야만 한다. 새롭게.  


글·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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