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듣기 전에 산책을 마치려고 저녁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하뿔싸, 한 발 늦었다. 소리가 없어서 오는 줄을 몰랐다. 봄비. 대문 밖에 가늘고 길다. 내 개들의 윤기 나는 털끝에 방울진 봄색이 어쭙잖다.
오리털을 숨죽여 채운 겨울 파카가 예기치 않은 물세례에 녹녹해졌다. 빗줄기 속으로 녹록지 않게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개들의 엉덩이가 봄비 속에서 나름 요염하다. 오는 줄 모르고 길 나섰다가 젖는 줄 모르고 젖어버렸으나, 돌이켜 보면 그럼에도 내 개처럼 꼬리 치며 반갑게 받아낸 비 같은 사랑, 좋았겠다. 그 비가 봄비면 더 좋았겠더라.
최화우(催花雨)라서 저 흑백의 식물들 곧 총천연색의 꽃망울과 꽃다운 이파리를 터뜨릴 텐데…. 비는 봄비인데, 봄비인데, 겨울 파카가 한기에 젖어 몸을 떨다가, 뜬금없이 <롤리타>의 첫 부분을 떠올린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그였다면 최화우를 님펫들의 군무라고 불렀으려니. 봄비는 잠 비라, 님펫에 견주어 손색없는, 공원에 들어가 세 걸음 걷다가 우아하게 몸을 구부려 봄비 아래 예쁜 배설물을 남겨두고 돌아서는, 내 잠의 동반자 걸리버를 안고 소파 위에서 선잠을 기획하다.
개를 안으면 배가 따뜻하고, 돌침대에 누우면 등이 따뜻하다. 내리는 비 소리만으로도 저절로 봄비인 줄 알게 되고, 씻겨 내려가지 않고 남은 개 오줌 너머로 몽마(夢魔) 웅성거리는 소리 듣는다. 사랑의 기억은 봄 앞에 가위눌린 풀씨처럼 잠결에 망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