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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국적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지평 ‘마당을 나온 암탉’(오성윤, 2011)
[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국적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지평 ‘마당을 나온 암탉’(오성윤, 2011)
  • 이대연(영화평론가)
  • 승인 2018.03.12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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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동물농장>(1954)을 떠올렸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라이온킹>이나 <치킨런>이 더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헐리우드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이 이들 작품의 아류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한국적’이라는 찬사는 다소 궁색하다. 정의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연을 섬세하게 묘사한다고 해서 곧 ‘한국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라는 주장도 설명이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까닭에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찬사는 상업적 흥행과 순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서 발견되는 기시감들은 내러티브나 모티브의 맥락에서 앞의 두 영화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간단히 귀속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어쩌면 ‘한국적’이라는 것은 이 기시감의 잔여물들에 그 해명의 단초가 있지 않을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한 갈래는 양계장을 나온 암탉 ‘잎싹“의 이야기로 진행되고 다른 갈래는 잎싹의 품에서 자란 청둥오리 ’초록‘의 이야기이다. 이 두 갈래는 서로 삼투되고 길항하며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낸다.  <라이온킹>의 기시감은 초록의 성장담에서 연유한 것이고 <치킨런>의 기시감은 잎싹의 탈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몇가지 사실들만으로도 이들 기시감은 무력해진다. 이를테면 초록은 <라이온킹>의 심바처럼 왕이 아니다. 권력과 다스림에 기반한 위계적 질서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며, 혈통은 계승이 아니라 자아와 정체성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파수꾼‘이라는 지위는 혈연으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는 것이며, 다스리기보다는 희생하는 존재이다. <라이온킹>의 수직적 질서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로 인해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수평적 질서로 전환된다. 
      
그런가 하면 <치킨런>의 양계장 탈출기는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초반 5분 이내에 성취된다.  잎싹에게 그것은 진저와 친구들의 탈출처럼 장황하고 유쾌한 모험이 아니다. 잎싹에게 탈출은 단식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통과해야 도달할 수 잇는 잔혹한 행로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기대할 법한 낭만적 감상주의는 배제되고 현실의 처절함은 객쩍은 익살로 희화화되지 않는다. 짐작되듯이 탈출 이후의 그들을 기다리고 잇는 현실 역시 크게 다르다. <치킨런>의 진저가 만끽하는 무한한 행복 따위는 잎싹이 기대할 수 잇는 것이 아니다. <대탈주>(1963)과 <쇼생크 탈출>(1994)의 명맥을 잇는 <치킨런>에서 자유는 궁극의 목표이자 최고선이다. 그러나 잎싹에게 자유는 자유의지란 이름으로 윤리적 선택과 실천을 강요하는 냉혹한 내적 조건에 다름 아니다. 
 
양계장을 탈출한 잎싹은 마주치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나그네’, ‘도미솔’, ‘달수’ 등 상대방의 특징을 포착해 작명한다. 이름 붙이기는 상대방에 대한 긍정이며 존재의 재발견이다. 또한 관계맺음의 형식이다. 마치 에덴동산의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 같다. 이렇게 잎싹은 아담의 자리에 놓인다. 그런데 잎싹은 남성이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창세기1:22)하지도 않으며 ‘정복하고 다스리’(창세기1:28)지도 않는다. <치킨런>이 난종용 암탉이라는 양계장의 질서를 벗어나 자유롭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세곌를 향해 나아가고, <라이온킹>이 상실한 자리를 되찾아 정복하고 다스리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반면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잎싹은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이종인 오리 알을 품는다. 
 
청둥오리인 초록을 보살피는 암탉 잎싹의 모성은 본능으로서의 모성이나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호명되고 강요되는, 신화화된 모성을 벗어난다. 마치 <가족의 탄생>(2006)에서 이질적인 타자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듯, 잎새와 초록은 종(種)의 경계를 넘어 확장된다. 동시에 죽음 위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초록과 잎새의 만남은 나그네와 그 연인의 죽음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며, 결말부 잎싹의 죽음은 공동체의 구성원만을 향한 제한되고 협소한 모성이 아니라, 청둥오리 초록에게보여줬던 것과 같은, 종의 경계를 벗어난 모성의 실천이며 모성 간의 연대이기도 하다. 생명과 죽음은 모성을 매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로써 모성은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을 순환시키는 자연의 섭리로까지 발전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파격적 결말은 도입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두 번의 죽음은 사계절의 순환 위에 놓인다. 떠나간 철새떼는 계절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족제비의 새끼들은 계절을 따라 성장해 어미가 될 것이다. 행복한 결말을 향해 가는 <라이온킹>이나 <치킨런>의 직선적 시간은 <마당을 나온 암탉>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국의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배경으로, 순환의 흐름 위에 모성과 자연, 공동체적 윤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한국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서구 중심의 주류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성을 보여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그 독창성이 ‘한국적’ 애니메이션에 대한 모색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13분여에 이르는 파수꾼 선발 비행대회의 스펙터클이나 2D 셀애니메이션임에도 3D의 공간감을 확보하는 카메라워크 등은 탁월하지만 그것만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과 자본, 시스템은 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원작의 철학적 무게를 덜어내면서도 가벼움으로 변질시키지 않는 시선의 깊이와 장르적 클리셰를 통해 보편성을 확보하면서도 한국이라는 특수한 지역적 감수성을 불어넣는 절묘한 지점의 발견이 <마당을 나온 암탉>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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