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의 말처럼, ‘혁명은 아다지오(아주 느리고 침착하게)로 시작해 안단테, 비보를 거쳐 비바체(빠르고 경쾌하게)로 완성’되는가? 미투(#MeToo)와 위드유(#WithYou) 운동의 급물살에 우리 사회의 오랜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하나씩 해체되는 걸 보면서, 새삼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면, 촛불시민 혁명 당시에 우리(여성들)가 꿈꾼 유토피아는 무의미한 것일까? 그저 권력을 탐한 또 다른 세력에게 기만당한 것에 불과할까?
촛불혁명 이후 권력이 ‘그들로부터 그들에게로(수구보수적 남성들에서 수구좌파적 남성들로)’ 이동했으나, 정작 촛불혁명에 참여한 ‘절대다수’에겐 스스로 다짐하고 약속받은 유토피아가 오지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 모를 일이다. 최근에 불거진 ‘수구좌파’ 인사들(과연 그들을 감히 수구좌파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의 위계적 성 유희(피해자들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긴 폭력이겠지만)는 촛불혁명의 ‘절대다수’에 한없는 배신감을 안겨주면서, 한때 그들에게 기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의 허망함을 갖게 한다.
2016년 말의 촛불시위가 권위주의적인 과거의 ‘그들’을 패퇴시킨 아다지오적인 미완의 혁명에 그쳤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취할 ‘우리만의 유토피아’는 보다 더 자각적이고, 보다 더 본격적이며,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미투운동은 비바체의 앙상블처럼 빠르고 경쾌하게 메아리쳐야 한다.

여성을 성(性)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고자 하는 국제적 노력은 1995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여성대회 이후 본격화했다. 젠더와 섹스는 우리말로 ‘성’이라는 같은 말로 표기되지만, 최근 페미니즘적 어법에선 젠더는 사회나 문화를 함축하는 사회학적 의미의 성을 뜻하고, 섹스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성을 뜻한다.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다수 선진국에서 젠더는 남녀차별적인 섹스보다 대등한 남녀 간의 관계를 내포하며, 인간으로서 모든 사회적인 동등함을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페미니스트들은 처음부터 인권의 기만적이며 추상적인 관념을 비난했다. 프랑스대혁명, 미국혁명 등 굵직한 인류 혁명사의 결과물인 ‘인권과 시민권’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을 배제하고서도 과연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1970년대부터 각국의 주요 단체들이 모든 여성의 이름으로 말할 권리의 요구를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미국에선 인종문제가 이 운동을 심각하게 분열시켰다. 중산층 백인 여성들이 낙태권을 요구한 반면, 서민층(또는 빈곤층) 흑인 여성들은 낙태보다 무료 치료를 요구했다. 백인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타파를 요구할 때, 직장에 나가는 백인 여성의 자녀를 돌보며 생계를 잇던 흑인 여성들은, 자신의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여유를 갈망했다.
비난은 뿌리까지 번졌다. 퀴어운동 단체는 ‘여성’이라는 범주를 가부장제에서 나온 것이라 간주했다. 종의 문제까지 번진 것이다. 한동안 여성운동은 이렇게 수많은 하위 미세분파로 분열되었다. 여성운동이 분열되면서, 싱글맘, 이주여성, 그리고 그들의 딸들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확고해지면서 각국 여성들의 삶이 더욱 각박해졌다.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지자 많은 여성들이 전업주부로 돌아가야 했고, 직장 내에서도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은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계속된 차별과 배제를 견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여성들의 투쟁이 계속되면서 거대한 변화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2002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여자들의 고등교육 진학률이 남자들보다 높아진 것도,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기득권과 제도권에 위탁하길 거부하고 나섰다.
인간존엄성은 우리가 최우선시해야 할 지고지순한 가치다. 사실, 오래전부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외친 여성들의 목소리는 메아리쳤지만, 늘 무시되고 왜곡돼왔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떤 연유로 여성들은 그렇게 배제됐을까?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게 일상이었고, 민주주의 시대에는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강요받았다(그들의 ‘대의’라는 것은 가부장적 체제 내에서의 정권교체나, 보수vs.진보 진영 간의 헤게모니 싸움, 또는 문화나 예술의 ‘흥행’ 같은 거였다!).
어느 상품 광고에서는 “여성이 행복한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강조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을 돈 많이 쓰는 소비자로 간주하고, 그들을 유인하기 위한 얄팍한 상술일 뿐이었다. 냉혹할 만큼 존엄성 훼손을 당하는 여성들이, 한낱 편리한 가전제품이나 호화로운 아파트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큰 오산이다. 미투 운동의 가장 큰 대의는 인간존엄성이며, 이를 위한 여성의 주체성 회복이다. 이제 여성들도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찾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또한, 선거연령 하향(만18세)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참정권 투쟁을 인간존엄과 주체성 회복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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