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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전태일, 2010년의 바보들
2010년의 전태일, 2010년의 바보들
  • 오도엽/시인, 르포작가
  • 승인 2010.06.07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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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보가 그리운 시절이다. 아니 바보가 되고 싶은 시절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사람의 혼을 쏙 뽑아가고 있지 않는가. 서울 한복판에서 군복 입은 이들이 불을 지피며 전쟁을 하자고 광기 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푸른빛 ‘1번’ 어뢰에 부서진 것은 초계함이 아니라 이성이다.

 

▲ ‘한미사’ 공장의 전태일(맨 오른쪽)과 동료들. 전태일기념사업회 제공 .
‘바보회’가 있었다. 회장은 전태일이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단사. 1948년에 태어난 전태일은 어린 시절 삼발이 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에,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장사,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팔며 ‘밑바닥 인생’을 몸으로 겪으며 ‘거리의 천사’로 살았다. 1965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다. 이제 기술을 배워 돈도 벌고, 기회가 된다면 공부를 해서 대학교를 다니겠다는 꿈을 안고. 하지만 전태일이 만난 평화시장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도 찾을 수 없는 ‘노동지옥’이었다.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나 봐요.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젠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 않고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가 않아요.”

열세 살 소녀들은 창문 하나 없는 먼지투성이 작업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했다. 때론 공장 주인이 주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며 사나흘씩 밤샘 작업을 했다. 열세 살 어린 여공이 바보가 되고 있었다.

전태일은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어린 여공들에게 빵을 사주고, 자신은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 3시간을 걸어서 집에 갔다.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기에 보다 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한테 나눠주었더니 1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전태일은 풀빵의 사랑으로는 어린 여공들을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태일은 재단사 친구를 모아 바보회를 만든다.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언젠가는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중략) 그렇다면 좋다. 우리가 한번 바보답게 되든 안 되든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불길로 타올랐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는 그의 죽음을 ‘인간 선언’이라 불렀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1970년 8월 9일 일기에서)

스물세 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불꽃으로 산화한 지 40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바보가 그리운 시절이다.

스물세 살 박지연은 평화시장의 자그마한 영세공장이 아닌 세계 일류 기업을 외치는 삼성에 다녔다. 먼지투성이 작업장이 아닌 첨단 설비를 갖춘 현대식 공장에 다녔다. 폐병이 아닌 백혈병으로 죽었다. 세월은 흐르건만 멈춰 있고 세상은 바뀌건만 그대로다.

스물세 살 김예슬이 있다.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을 붙잡고 씨름하며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며 전태일이 애타게 찾던, 그 대학생이다. 김예슬은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공장이 아닌 대학에서 울린 ‘인간 선언’이다. 대학은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되었다고 고발한다. 대학에서도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기업에서 필요한 부품을 공급하듯 대학에서 기업에 필요한 인간을 맞춤생산하겠다고 칼질을 하고 있다. 2010년의 스물셋이 아프다.

전태일을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다. 쪽진 머리, 흰 저고리의 중년 여성이 한 청년의 얼굴이 담긴 액자를 비스듬히 껴안고 오열하는 모습이 담긴 책 표지를 넘기는 순간, 나의 스물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중앙도서관 구석진 자리에 앉아 무심히 펼친 전태일은 내 눈물샘만이 아니라 심장을 뒤흔들었다. 내 발길을 강의실이 아닌 거리로 향하게 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나온 때는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지은이가 누군지도 밝힐 수 없었다. 책은 나오자마자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금서가 되어 몰래몰래 사람들을 찾아갔다. 1991년에야 저자 조영래를 밝힌 <전태일 평전>이 나왔다.

다시 <전태일 평전>을 펼친다. 표지와 판형은 바뀌었지만 구절구절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친다. 여전히.

2010년 전태일 40주기를 맞이하여 특별한 책이 준비되고 있다. 레디앙, 삶이보이는창, 철수와영희, 후마니타스. 출판사 네 곳이 모여 책을 내기로 했다. “전태일에게 늘 받기만 했다.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샀던 전태일의 마음처럼 출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래, 출판사가 가진 것은 책을 내는 능력이다. 이 힘을 모아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가제)라는 책을 펴내자. 40년 전 전태일이 아니라 2010년 스물셋 전태일을 찾아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자. 책의 수익금은 전태일 정신을 알리는 일에 쓸 수 있도록 전태일재단에 기부하자.”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네 출판사가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은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전태일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상업 출판사가 ‘인간이 물질화’되는 흐름을 거스르고 ‘인간 선언’에 동참했다. 스스럼없이 ‘나를 버리고’ 전태일의 이름 아래 모였다. 전태일 정신이 이처럼 ‘황당한’ 일을 저지르게 했다. 책은 오는 9월께에 나올 거란다.

올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큰 역사적 사건이 100주기, 50주기, 30주기를 맞이하는 해이다. 거창한 행사가 줄을 잇는다. 이 역사적 주기에 전태일도 있다. 하지만 전태일 40주기는 전태일이 살며 실천했던 평화시장의 8평 작업장처럼 소박하다. 커다란 무대도, 이름난 이들의 추도사도 없다. 그런데 심상찮은 물결이 밀려온다. 십시일반. 전태일을 아는 모든 이들이, 전태일을 모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가진 호주머니 속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구울 것 같다. 시다의 어린 손에 건네졌던 풀빵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손에, 해고당한 이의 가슴에, 철거당한 세입자의 시린 몸뚱이에 찾아갈 거다.

“좋다! 우리는 바보다!” 바보회를 만들자는 전태일의 제안에 재단사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외친 말이다.

글•오도엽
전태일재단 기획실장. 시인, 르포작가. 시집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 기록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 <밥과 장미-권리를 위한 지독한 싸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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