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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분명하고 확실함의 카오스 영화 ‘곤지암’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분명하고 확실함의 카오스 영화 ‘곤지암’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8.04.16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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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곤지암 정신병원. 그 병원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병원장은 탁구를 친다. 병원장은 곤지암 정신병원의 중심인물이고 그 시대의 흥망성쇠를 같이 경험하고 함께 몰락했다. 시대의 부흥과 맞물려 권력가가 인정했던 병원장의 모습 속에는 조금의 기우나 염려섞인 표정을 찾지 못한다. 그녀(병원장)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 사진 속 환자들의 정상적이지 않은 표정들은 감출 것도 없고 치유될 수도 없어 보인다. 그런 그들이 모두 죽었고 병원장은 끝내 자살했단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곤지암 정신병원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포착하는 또 다른 배경은 담력 테스트를 자처하며 호기로운 자신을 드러내려던 중학생 2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사적 사실을 등에 업은 배경과 현재의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행방불명된 사건이 충돌하면서, 티 나는 거짓말은 진실을 담은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상상력이 풍부하다라기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의무에 더 치우치려 한다.
 
곤지암 정신병원은 CNN이 선정한 가장 소름돋는 7대 장소 중 하나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의기투합은 설득력을 얻는다. 다분히 즉흥적으로 보이는 주요 인물들의 모임은 사실 철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채 진행된다. 먼저 이 조직을 이끄는 하준(위하준)은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일련의 공포체험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이런 부류의 영화, 즉 페이크 다큐, 혹은 파운드 푸티지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사실이라고 설명하려한다. ‘악령이 깃든 곳은 성수(성수)에 반응한다’는 식의 테스트는 그러한 설명의 순진한 클리쉐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클리쉐로 유발되는 인식은 초자연적이고 괴기스러운 현상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진실의 폭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등장인물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포착하고 설명한다. 하지만 영화 [곤지암]은 현상 자체가 확실해도 설명 단계에서 많은 것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작은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가슴에 새긴 채 곤지암 정신병원으로 진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더군다나 모두가 차분하게 자신의 카메라를 사용한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카메라와 사실관계를 잘못 인식하고 있지 않다. 모두 올바르게 카메라를 사용하고 정해진 곳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수렴된다. 그러다 결국 402호라는 밀실로 모두 수렴되어 갇히거나 행방불명된다. 
 
먼저 이 영화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섭고 괴기스러운 형상이 한 몫을 하지만 이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계획대로 올바르게 진행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잘못돼가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면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확실함과 분명함의 만남이 반드시 올바를 수 없다는 식의 역설을 드러낸다. 그들은 확실히 봤다거나 분명히 이 방향이 맞다는 식의 절규를 하지만 이는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카오스에 빠져버리고 있음을 자각하는데서 나오는 발악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둠이 유발하는 공포나 카메라에만 포착되는 언캐니한 인물의 등장 그리고 소름끼치는 귀신의 얼굴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포착하는 카메라적 시선을 이용하여 분명하고 확실한 카오스를 보여줌으로써 그 공포를 극대화 한다. 분명한 카메라의 눈은 확실하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면치 못한다는 깨달음만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관객들은 곤지암 정신병원의 초자연적 현상이 왜 발생했고 병원장의 자살이유는 무엇인지 끝끝내 알지 못한다. 이 장르의 특성 상 세세한 서사는 사족일 뿐이다. 그저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사라진 행방불명된 인물들만이 아직 곤지암 정신병원의 초자연적 현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곤지암 정신병원이 왜 문을 닫았고,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마지막까지 남게되는 메시지는 곤지암 정신병원이 무서운 장소라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다. 이 메시지는 들어서는 순간 행방불명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장소가 바로 곤지암 정신병원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장소의 그 메시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역시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말해 버리고 만다. 나는 마지막 402호의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반드시 알려주고야 말겠다는 곤지암 정신병원의 외마디 비명같이 들렸다. 
 
이것이 파운드 푸티지, 페이크 다큐가 갖는 일반문법이고 강력한 메시지다. 사실을 포착하는데 결국 그것이 우리의 현실세계라는 것. 이를 증폭시키기 위해 요컨대 이 장르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호기심, 카메라 기술의 발달 여부, 공포의 시간, 모두의 행방불명’이라는 도식을 갖는다. 이 같은 도식이 영화 속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장면 여기저기에서 기존 영화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외 없이 여기에서도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주인공의 행방불명은 가장 중요한 법칙과도 같이 작용한다. 대부분의 이런 형식의 영화 등장인물은 예외없이 사라지거나 죽는다. 그렇다면 왜 ‘사라짐’의 여운을 이 장르는 문법화 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라짐의 문법이야 말로 우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카오스의 공포로 접어들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결국 이 카오스는 우리의 현실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귀신의 모습, 갑작스레 드러나는 굉음, 절규 등에서는 재미를 느끼거나 안도감의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된다면 사라짐이라는 이 영화의 문법을 통해 또 다른 공포, 다시 말해 실존적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그저 허무하게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물음, 그 분명하고도 확실한 메시지 바로 그것이다.
 
 
글·지승학
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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