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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초현실과 국가의 경계를 넘은 연대의 속삭임
‘옥자’: 초현실과 국가의 경계를 넘은 연대의 속삭임
  • 정아경
  • 승인 2018.04.20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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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의 예고편은 관객을 끌어들이기는커녕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동물을 함부로 파는 미국 자본은 나빠!”라는 교훈이 지나치게 전면에 드러나서 관객을 가르치고 관객의 머릿속에 감독의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은 아닐까하는 거부감이 들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것이 <옥자>의 전부는 아니었다.

<옥자>에는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주제도 강하게 드러나지만, 그 외에도 환상동화 같은 몇 가지 요소들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주제가 있다. 여기에서는 형식에 해당하는 환상영화적인 요소를 하나하나 다루면서 내용상 어떤 다른 주제를 전달하려 하는지 검토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옥자>는 엄격한 의미에서 환상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가상의 동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환상영화 같기도 하다. 하지만 토도로프가 환상문학의 정의로 제시했던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망설임을 이끌어내는지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옥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이 나오는 영화가 이미 많았기 때문에 놀랍거나 신비스럽지 않고 미자, ALF, 루시 미란도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내 변하지 않는 평면적인 인물로서 비현실적으로 이상적(理想的)이거나 인위적으로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이 현실인지, 현실이 아닌지 망설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환상영화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이 옥자에는 없는 것만 같다. 왜 이렇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과장된 설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옥자>를 환상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환상영화처럼 보이는 이 요소들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옥자가 상징하는 것들

먼저, 영화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는 ‘옥자’를 보자. 옥자는 미국 미란도 회사의 지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 동물이다. 그러나 미란도에서 생산만 되었을 뿐, 곧 한국 산골마을로 옮겨져 할아버지 희봉과 손녀 미자에 의해 무려 10년 동안 길러진다. 영화 초반을 보면 미자만 일방적으로 옥자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옥자도 미자에게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옥자는 미자가 나무열매를 수확하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미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해내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재워주기도 한다. 옥자가 미자에게 하고 있는 역할은 크게 보면 자연(mother earth, 루시 미란도가 슈퍼돼지를 소개하는 첫 장면에서 이 단어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이 인간에게 하는 역할이다. 옥자는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 자연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옥자는 우리 민족에게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지다시피 했던 전통문화를 대신해서 서구의 문화가 해왔던 역할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서구에서 전파된 기독교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서구에서 알려진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위해 투신했으며, 서구의 영화와 노래로 여가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에 있을 만큼 한국의 기독교는 번창했으며 평화적인 시위와 법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을 탄핵시켜 서구에서도 주목받을 만큼 민주주의를 확립했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 문화 유입의 역사는 미란도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옥자가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여 미란도를 놀라게 한 것과 유사하다. 또 미자에게 옥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것처럼 이제 그 문화는 한국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옥자의 설정이 옥자를 문화의 상징으로 해석하는데 매우 유용하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왜 ‘옥자’가 초현실적인 가상의 동물이 되어야 했는지 드러난다. ‘옥자’는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현실 속에는 없는 가상의 동물이 되는 편이 좋았던 것이다.

옥자가 서구의 문화라는 상징을 받아들인다면, 옥자를 둘러싼 미자, 미란도, ALF(Animal Liberation Front, 동물해방전선)의 쟁탈전은 서구에서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길러진 문화의 산물을 누구의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만일 실제로 현실에서 이 갈등이 일어났다면, 옥자는 재론의 여지없이 미란도의 소유다. 실정법적인 관점에서 옥자의 소유권은 미자가 아니라 미란도 그룹에 있다. 옥자를 처음 개발하고 생산한 것도 미란도 그룹이며 희봉은 정해진 기간 동안만 옥자를 사육하고 돌려주기로 계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잃은 채 본래 서구의 것일 수밖에 없는 문화를 잘 따라해 온 것일 뿐이며 그 문화의 주창자라고 불릴 수는 없다. 

미자가 일으킨 지각변동

그런데 너무나 싱거워 보이는 이 다툼은 미자와 ALF라는 유치해보일 정도로 비현실적인 인물들에 의해 활력을 얻고 예측할 수 없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 중 주인공 ‘미자’는 관객이 망설임 없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인물이다. 달리기로 트럭을 따라잡는 순발력과 흔들리는 트럭 뒤에 매달려 버틸 수 있는 완력 등 체력적인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미자를 말리는 할아버지 희봉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자본중심적, 업적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당위와 행동을 결정하는데 반해, 미자는 생명중심적, 관계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가히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으며 영화에서는 후자가 더욱 강조된다.

미란도 그룹의 회장인 루시 미란도는 처음부터 자신의 업적과 더 많은 자본을 위해 옥자를 개발했고 옥자를 슈퍼돼지라고 치켜세우는 이벤트를 기획했으며 결국에는 업적과 자본을 위해 옥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또 미자를 도와주는 ALF도 미란도의 악행과 동물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겠다는 업적을 명분으로 옥자가 위험한 장소에 끌려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미자는 자신의 저금통을 깨면서도 옥자를 찾아나서는가 하면 업적을 위한 ALF의 제안도 거절한다.

옥자가 영화 내내 미자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습은 미란도나 ALF가 아닌 미자가 옥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암시한다. 미자는 옥자를 기르는 과정에서 옥자가 누구인지, 옥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옥자는 인간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즐거움, 공포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동반자이기 때문에 감정을 무시당하면서 단순히 돈을 벌거나 업적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옥자는 이를 알고 있는 미자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보호받을 수 있다.

옥자와 미자의 관계는 우리가 이른바 서구문화에 기대어 살아가면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지, 또 어떻게 대중문화를 인간의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그 기원이 된 서구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면 그 문화의 담지자로 불리고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서편제>등 임권택의 한국적 영화들과 황석영의 <손님>등 민족주의적 소설에서 진정한 한국 문화는 서구에서 유입된 문화들을 제외한 것이라는 관점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옥자>는 서구에서 유입된 문화들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길러냈다면, 또 우리가 그 문화에 합당한 대우를 해준다면 곧 우리의 것이라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미자가 비현실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영웅적 용기와 천사 같은 생명 사랑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면, 이런 전개는 어려웠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적인 사람들의 법적, 경제적 감수성에 따르면 옥자는 당연히 미란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적인 인물 미자는 관객들이 너무 익숙하여 당연시하게 된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비춰주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은 어쩌면 다른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ALF가 보여주는 좌절과 희망

그런데 <옥자>의 탈식민주의적 메시지가 가장 집약되어 드러나는 등장인물은 옥자나 미자가 아니라 ALF이라는 동물 보호 단체다. ALF는 미자 만큼은 아니지만 한 편으로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현실적인 모습을 반영하면서 비현실과 현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ALF는 미란도로 이송 중이던 옥자를 고의적인 교통사고로 빼앗아오는 등 동물 보호를 위해 비교적 과격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미란도 직원들에게 안전벨트를 하라며 권유하고 쫓아오는 사람들을 따돌릴 때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작은 쇠구슬을 풀어놓는 식이다. 소속된 단원들 중에는 지구에 흔적을 남기기 싫다고 하면서 토마토 먹기조차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생명보호에는 완벽을 추구한다.

그런 ALF도 털어버리지 못한 먼지가 있었으니, 4명의 서양인과 1명의 한국인 재외교포로 구성된 이 단체가 서구 중심적인 불평등한 국제 질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런 모습을 희화화 하면서 그 구성원들을 비판한다.
 
리더인 ‘제이’를 중심으로 한 서양 단원들은 재외교포 ‘케이’의 통역과 기계 등에 의존해서 활동하면서도 자신들과 맞지 않는 모습에 야유를 보내기도 하고 공동의 잘못을 전적으로 케이의 잘못인 것처럼 책임을 지우기도 한다. 예컨대 미자에게 옥자를 실험실에 보내도 되겠냐는 동의를 구할 때 그들은 애초에 판단에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옥자가 끔찍한 폭력을 당할 것을 의심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옥자는 무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업적을 세우기 위해 일종의 기만행위를 했지만 그에 대한 책임과 비난은 미자의 말을 반대로 통역했던 ‘케이’에게만 일방적으로 지워진다.

또한 동양인인 ‘케이’는 ALF의 다른 서양인들에게는 ‘제이’의 말을 팔에 문신으로 새기는 등 충성을 다하면서 한국인 여자 간호사에게는 큰 소리를 치고 다그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자신을 중심으로 질서를 구축하려는 서양인과 그 틈에서 서구적인 것은 떠받들고 자기자신과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비하하는 한국인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둘 모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ALF는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국가나 민족을 넘어 연대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옥자를 구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나선 미자를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들은 가족인 희봉이나 같은 민족인 미란도 한국지사도 아닌 ALF다. ALF는 비록 업적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옥자를 소유하려 하거나 거기에서 나오는 어떤 금전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동물을 보호한다는 대의 때문에 폭력과 비용을 감수해가면서 미자를 도와준다. 이 부분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비판했던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 연대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며 봉준호 감독이 가족주의적, 민족주의적인 틀에서 나와 조금 더 넓은 규모의 연대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옥자는 미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옥자는 누구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할 생명이다. 옥자가 상징하는 자연 또한 문화도 마찬가지로 특정 국가의 소유라 하기 보다는 전 인류가 참여할 수 있고 보호해야하는 것이며 인류는 생명, 인권, 문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연대해야 하는 것이다.

ALF는 미자처럼 이상적인 모습과 불평등한 현실을 희화화시킨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그들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인종차별적 행동을 대조하여 후자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영화가 추구하는 연대를 위해 한 가지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서구 중심적인 세계 질서와 무의식적인 서구 문화 사대주의임을 보여준다. 마치 후레쉬맨처럼  인위적인 ALF라는 단체도 역시 그 인위적인 특성을 통해 탈식민주의적인 주제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초현실과 국가의 경계위로

<옥자>에서 옥자, 미자, ALF라는 현실적이지 않은, 환상적인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특성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익숙한 가치관과 질서 대신 낯설지만 새롭고 더 추구할만한 가치관과 질서를 제안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들 자체가 아닌 다른 주제를 가리키기 위한 상징물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환상영화의 조건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옥자>에서 알레고리적인 면이 없이 가장 환상영화스러운 장면은 쿠키영상의 시작 부분에 등장한다. 미란도에 감금되어 있었던 ‘제이’가 갇혀 있던 건물에서 나오고 ‘케이’는 그를 마중한다. 그들의 뒤에는 한 때 옥자의 복사판인 슈퍼돼지들이 어둠 속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슬픔과 고통으로 포효하던 들판이 깨끗하게 텅 빈 채 하늘아래 펼쳐져 있다. 슈퍼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정말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관객들은 비로소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망설임을 경험한다. 우리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단순히 (현실이 아닌) 영화일 뿐이었나?

이러한 경험은 과거에 관객들이 자신과 조금 거리가 있는 현실에 대한 영상, 예를 들어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난 후 항상 있어왔던 것이며 또 <옥자>를 보고난 후 상영관 밖으로 나가면 겪게 될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도 직접 만져지지 않으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낀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 그 영상들은 기억에 남아 마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정신병자가 아닌 우리들은 정신과 육체를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만질 수 있고 더 오래 지속되는 가까운 현실의 맥락을 위해 멀리 있는 현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옥자>는 쿠키영상에서 돼지들이 사육되던 공간에 갑작스러운 변동을 줌으로써, 초현실처럼 느껴지는 것과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을 공존하게 하고 그 경계에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아마도 영화가 바라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환상적인 요소들 옥자, 미자, ALF등을 통해 보게 되었던 현실의 다른 측면들을, 잠깐 경험했다고 해서 비현실로 경계 짓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진 않지만 경계를 넘어 조금씩 확장되는 연대를 통해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미란도를 나온 후에도 더 큰 집회를 위해 뭉친 ALF와 미란도 한국지사를 나와서 그들에게 합류한 그 청년처럼 말이다. 이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초현실적인 미자와 옥자의 속삭임과 ALF가 벌이는 대가 없는 투쟁 속에는 감독의 의도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자연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도 있기 때문이다.
 
글: 정아경
한동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존재와 시간』의 말 개념‘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최근 한 집에 살게 된 신랑과 함께 TV를 보며 식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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