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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봄비의 엄격성과 엥겔스의 옛사랑
[안치용의 프롬나드] 봄비의 엄격성과 엥겔스의 옛사랑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8.05.13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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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는 대체로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땅과 공기에 가득한 춘심을 자극하여 만물에게 그것을 적셔주기에, 말하자면 헛비가 아니기에 그러하리라. 봄철엔 흙비도 오는데, 비 아닌 비가 비행세하는 꼴이 못마땅하던 차에 제대로 봄비가 내려주면 늙다리 아저씨의 마음, 춘심까지 가지는 못해도 적잖이 넉넉해진다.

 

춘심이란 게 결국 사랑의 마음이어서, 이렇게 하루 종일 비라도 내린 날이면 라디오는 온통 비와 사랑 이야기다. 젖는다는 것 말고 비와 사랑에는 공통점이 많을 텐데, 불가불 마른다는 것도 공통점에 해당할까. 휴일임에도 털 젖을 줄 모르는 개들은 새벽부터 나가자고 성화다. 젖을지도 마를지도 모르지만 젖으려드는 개. 젖지도 마르지도 않으려 하지만 어느 사이 젖었다가 또 어느 사이에 마르는 인간. 그런 개와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아침에 봄비 마실을 다녀온다.

 

철판 너머는 젖었고, 철판 안은 말랐다. 젖지 않은 고립 속에서 촉촉한 목소리로 방송되는 라디오는 젖다 못해 흥건하다. 봄에 내리는 장맛비 같다. 봄비 속에 이렇게 라디오를 틀어놓고 운전하다간 앉은 채로 익사할 판이다. 사랑, 이별, 비, 촉촉한 목소리…

 

와이퍼가 뻑뻑하다. 옛사랑은, 뻑뻑하게 표면을 긁어대는지 잊고 살다가 비가 내리면 상기하게 되는 와이퍼처럼 그렇게 기억된다. 그러한 기억의 뻑뻑함에 직면하여 ‘와이퍼를 갈아야지’ 다짐하지만 늘상 다음번 비에 또다시 뻑뻑하게 일격을 당하곤 한다.

 

옛사랑을 두고, 누군가는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으로 평생 산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체증인 양 가슴 한 구석이 늘 묵직하다고 한다. 그런 옛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의 표정이 그립다. 나에게 옛사랑은 비 오는 날 켠 뻑뻑한 와이퍼처럼 너저분하다. 모든 지난 것이 자동적으로 아름다울 자격을 부여받지는 않는다. 아름답던 아름답지 않던, 지난 것 중에서 어떤 것들이 기억되어 와이퍼 밑에서 불편한 소리를 내는 저 마찰처럼 비선형으로 마음을 들쑤신다.

 

목에 걸린 가시나 가슴을 압박하는 체증 같은 그러한 선형 옛사랑의 기억은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 항상 마음의 일정 몫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비가 오거나 찬바람이 불거나 아무 상관없이 견고하다. 견고하게 언제나 아프다. 사실 늘 체한 사람은 전혀 체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랑은, 그런 기억은, 그런 사람이 사랑한 기억은, 너저분해질 수가 없다. 오직 봄비 같은 간헐적 계기에 들쑤심을 당하는 비선형의 기억만이 너저분해진다. 가벼운 기억이 더 호들갑스럽기 마련이다.

 

옛사랑이 없어서 너저분해질 위험 자체를 회피한 나의 개들은, 봄비에 젖을 만큼 젖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아내(결혼하지는 않았으니 연인?) 메리 번스를 사랑하고 메리의 동생 리디아 번스를 (처제로서) 아낀다. 메리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급사한 이후 엥겔스는 처제 리디아를 다음 아내(혹은 연인?)로 받아들여 같이 산다.(영화에서 이 이야기는 그려지지 않았고 살짝 암시된다.) 결혼제도에 회의적이었던 엥겔스는 나중에 리디아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엥겔스에게 아내의 기억은 같은 성을 쓰고 아내를 닮은 아내의 동생의 대체를 통해 더 강해질까, 약해질까. 아내의 기억은 아내로서 대체된다. 아니면 중첩될까, 혹은,

 

옛사랑은 지금 사랑이 아님을 확언하는 아름다운 표현 형식일 따름이다. 기억이란, 그렇다면 현존의 부재일 텐데, 하드메모리 없는 컴퓨터를 상상할 수 없듯이 현존의 부재 없는 현재는 얼마나 뻑뻑할까. 그렇다고 하여도 엄격한 관점을 취한다면 옛사랑 자체는 여러모로 사랑에 대한 모독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저 하염없는 봄비처럼. 그러나 봄비라는 게 엄격할 수 없다는 게 본원적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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