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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는 쓴다, 나를 둘러싼 억압을 불지르기 위해 : 이창동감독 ‘버닝’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는 쓴다, 나를 둘러싼 억압을 불지르기 위해 : 이창동감독 ‘버닝’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8.05.2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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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명의 인물은 셋인가, 하나인가?

영화의 원작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지만 영화는 원작에 없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심리적 풍경을 담는다. 영화는 한국사회의 대립적 갈등요인을 드러내고 추적한다. 빈/부, 도시/농촌, 빛/어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남/북, 남/녀, 진실/거짓, 등이다. 이 모든 갈등의 대립쌍 가운데 중심에 놓인 것은 빈부갈등이다. 이들은 서로 얽혀 따로 노는 듯 하면서도 같이 기능한다. 

 
인물들은 가상의 인물들같이 보인다. 종수는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우연히 만난 해미와 또 다시 우연히 만난 벤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들이 자신의 안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인 것처럼 해석하게 만든다. 모든 만남이 우연이고 필연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이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중 하나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주제의 해석이 달라진다.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 태우기는 이 영화의 중심 모티프 중의 하나다. 하루키의 원작과 다르지 않다. ‘헛간을 태우다’의 의미는 영화의 주제를 가늠케 한다. 벤은 마치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비닐하우스, 비가 어떤 죄책감을 갖지 않듯이 홍수로 사람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합리화한다. 그저 쓸모 없는 비닐 하우스는 태워줘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해미가 실종되고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벤을 보면서 종수는 혹은 관객은 그 비닐하우스가 소모적으로 놀다가 버리는 벤의 여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종수는 해미가 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벤을 죽이게 된다. 그런데 죽일 때 실제로 불에태워 죽인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게 바로 벤이 말한 쓸모 없는 비닐하우스 태우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종수는 벤이라는 인격체를 쓸모 없는 인간으로 보고 자기가 태워죽여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주제를 해석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빈부차이가 단지 경제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사회심리적으로, 계급갈등적 요소로 발전했다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며 부유층 혹은 그에 기생하여 죄책감이 없이 사회의 건전성을 파괴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일탈을 일삼는 특수 계층 혹은 계급에 대한 분노 및 처벌을 제시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이창동의 그럴 듯한 주제의식이다. 그는 항상 소외된 사람들, 권력에 짓밟혀 억울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 및 사회적 관심에 대해 주장해 왔다. 
 
더 나아가서 벤과 해미가 사실은 종수가 만들어낸 인물들, 즉 그가 창작해낸 인물들이라면 그건 종수의 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자아들일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종수가 만들어낸 악당 벤도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이므로,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다 공유한 다라는 해석까지도 얻게 된다. 자기 모순적인 현대인의 실체를 또한 사유케 하는 주제다. 이 세상의 악한 행동들 역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순들이므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할 수 밖에 없다는, 인간의 나약함과 겸허함에 관한 주제인 것이다.  
 
▲ 그렇다. 실제와 허구가 뒤얽혀 있는게 삶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사실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도 하나도 믿을 수 없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함이 자주 어긋난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종수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닐까 하는 공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이 영화를 읽는 가장 극단적인 해석에 해당할 것이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난 장면은 그러한 해석을 가능케 해준다. 종수는 해미의 집에서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그 다음 장면, 그러니까 벤이 화장실에서 여자 화장가방을 갖고 해미의 집에 가서 해미에게 화장을 해주는 상상의 장면으로 이어지기 위한 숏이다. 하지만 그 일차적인 해석을 초월하여 더 나아간 상상으론 어쩌면 이 영화 전체가 종수의 상상이지는 않을까에 대한 추측도 가능하다. 
 
왜냐? 종수는 소설가 혹은 글쓰는 자니까. 관객을 잠시 그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지켜 보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종수 입장에서 보지 못하게 속인 영화적 장치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영향 받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도 마치 실존 인물이 우연히 손에 넣은 책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시작하고 전개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구였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게 보면 벤이라는 인물은 하나도 합리적인 구석이 없다. 그는 유한마담을 상대로 한 지골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에게 주어진 정보는 없다. 단순한 지골로로선 해석되지 않는 장면들이 너무나 많다. 그의 철학적이며 섬세한 태도는 뭐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현실적 동기가 영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철저히 종수의 의식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인 것이다. 그중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그의 ‘비닐하우스 태우기’다. 실제로 태웠다는데 종수는 태운 비닐하우스를 발견할 수 없다. 벤은 너의 마음속의 베이스를 들으라는 이상한 주문같은 말만 중얼거린다. 마지막에 얼핏 느끼게 된다. 바로 종수 스스로 자신에게 속삭인 말이라는 것을. 솔직해지라고. 위선적으로 살지 말라고. 벤은 종수의 내면적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인 것이다. 만일 종수가 그려낸 인물이라고 본다면 모든 스토리가 해석된다. 벤은 실제 있는 인물이 아니라 종수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증오하는 인물중 하나로 만들어낸 인물인 것이다. 
 
▲ 비정한 빗속, 떠내려가지 않을 방화의 몽상
 
해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만나자 마자 섹스하고 그리고 바로 떠난다. 그 사이의 장면 묘사에는 종수가 외로운 방에서 홀로 자위를 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표면적으로 그가 외로워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은 그 방은 해미의 방이 아니라 자신의 방인 것이다. 해미는 가상이고 자위는 실제이다. 물론 고양이도 없고 그는 혼자 고독하게 소설을 쓸 뿐이다. 그가 만들어낸 상상의 애인이 해미이고 그녀는 동창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모든 이야기가 그의 소설이라면? 어쩌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영화의 모든 이야기도 그가 쓴 소설의 전체 내용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 어머니만 사실이고 벤과 해미만이 상상으로 쓴 소설의 인물인데 현실과 허구가 서로 진실인양 하나의 영화속에서 뒤섞여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창동 영화의 진실은 알수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충분히 즐거운 영화이고 무슨 주제인지가 투명하게 드러나니까.  
 
글·정재형
영화평론가이며 동국대 교수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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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영화평론가)
정재형(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