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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구겨진’ 영화를 ‘빳빳이’ 펴는 힘: ‘불한당원’이 증명한 영화 관객의 존재론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구겨진’ 영화를 ‘빳빳이’ 펴는 힘: ‘불한당원’이 증명한 영화 관객의 존재론
  • 송아름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5.2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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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이들을 만난 1년이었다. 산술적으로 따졌을 때, ‘우리’의 돌발적인, 게다가 잦기까지 한 만남은 분명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관객동원 90만을 간신히 넘긴 영화, (여러 사이트의 평점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정말 인심을 후하게 써서 약 반 수인 45만이 영화를 좋게 봤다 치고, 말도 안될 만큼 더 인심을 써서 그 중 반이 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쳐도 그 수는 처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이들과 만나는 것, 혹은 그들의 소식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맞다. 이 글은 작년과 올해 치러진 모든 영화 시상식에서 호명되었던 ‘이름을 가진’ 관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의 관객은 늘 수치 속에 뭉개졌다. 흥행여부를 가늠하기 위해 머릿수만 헤아려지는 사이 관객은 측정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그들의 개별성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영화의 흥행여부를 관객이 쥐고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도 관객들의 선호가 극장에서부터 박탈당하는 것을 슬며시 감추어 놓는다던지, 영화 자체보다 몇 십만, 몇 백만, 혹은 천 몇 백만이라는 숫자놀음에 숨어 도무지 관객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며 관객을 원망하는 프레임은 관객들이 너무도 오랫동안 ‘당해온’ 처사였다. ‘불한당원’이 직구를 날린 곳은 바로 여기였다. 관객이 분명한 차이를 발견한 영화, 그런데 극장에서 사라진 영화, 그렇기에 다시 살려야 하는 영화. 불한당원은 이 모든 것을 실현시키면서 영화의 판도를 움직이는 관객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증명해 냈다.

비슷한 외향을 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달랐던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이하 <불한당>)을 알아본 이들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보기 위해 극장을 빌렸고, 영화 속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즐겼으며, 영화 속 설정을 빌어 유희를 즐기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이들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인해 <불한당>에 관한 잡지들과 시나리오 콘티북이 출시되었고, 수많은 기사들이 이들의 존재를 알리고자 했으며, 불한당원의 1년을 담은 다큐멘터리까지 기획되고 있다. 이는 불한당원이 전에 없던 일을 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테다. 이렇게 관심을 받을 만큼 쏟아진 불한당원의 화력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전무후무할 화력에 대한 관찰과 고백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관객이 쓴 영화 밖 반전 드라마

알다시피 한 영화에 대해 열렬히 찬사를 보내던 팬덤의 시작이 불한당원인 것은 아니다. 멀게는 <형사>(2005)을 지지하며 하던 ‘형사중독낭, 도령들’에서 가깝게는 <아수라>(2016)의 ‘아수리언’, <아가씨>(2016)의 ‘아갤러’들이 ‘불한당원’을 앞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형사중독원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영화 재상영 운동을 벌였고, 아수리언들은 2016년 말 국정농단사태를 규탄하기 위한 촛불집회에 ‘안남시민연대’ 깃발을 들고 참여하며 실존하는 공동체로 현실에 파고들었으며, 아갤러들은 특정 장면만을 자른 파일이 공유되는 것을 막았고 열거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의 2차 창착의 우주를 창조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낳은 이 파생효과들은 엄숙하다고까지 칭할 수 있을 만큼의 진지함과 또 그만큼의 유희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고, ‘<불한당> 현상’은 쉽게 이 연장선상에 놓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외부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러니까 공유할 수 있는 이들 사이의 유희가 도드라졌던 기존의 팬덤과 다르게 불한당원의 ‘화력’은 (‘<불한당> 현상’이라고까지 칭할 수 있을 만큼) 이 영화를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끌었다. ‘도대체 저 영화가 뭐 길래 따로 관을 잡아 상영하는지’, ‘도대체 저 배우가 찍은 영화가 뭐 길래 이런 환호를 듣는 것인지’,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뭘 하는 작자들이길래 번번이 영화 예매 서버를 터트려버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불한당>을 다시 보게 만들었고, 입당을 추동했으며, 기사들을 쏟아냈다. 결국 불한당원을 이전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이 직접적인, 가시적인 실체로 목격되는 ‘화력’에 있다는 점일 텐데, 이 화력에 대한 힌트는 그 어떠한 불씨도 지필 수 없을 것이라는 무관심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로운 일이라면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잘라 말해 <불한당>은 2017년 개봉을 앞둔 영화들 중에서 어떠한 주목도 받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로 영화적 미학을 증명했던 이명세 감독에 대한 기대나 TV드라마 <다모> 직후의 하지원, <늑대의 유혹> 직후의 강동원 등 배우에 대한 호감은 <형사>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일 수 있었고, <아수라>는 김성수 감독의 귀환과 함께 정우성 ·  주지훈 · 황정민 · 곽도원 등의 배우를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흥분을 한껏 고조시키며 다양한 홍보로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가씨> 역시 영화의 원작에 대한 기대와 박찬욱 감독에 대한 믿음이 김민희 · 하정우 · 조진웅 · 김태리 등에 대한 호응과 맞물리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이 영화들의 팬덤이 영화의 흥행유무나 특정 배우에 대한 옹호와 맞물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영화들에 옹호,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팬덤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기대어 본다면 <불한당>은 영화에 대한 기대는 둘째 치고 정체조차 짐작하기 힘들만큼 영화에 대한 정보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게다가 입봉작으로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했던 변성현이라는 젊은 감독의 차기작, 흥행과 기대에서 멀어졌던 배우 설경구와 아직 영화로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배우 임시완의 조합은 그다지 흥분을 일으킬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남성영화의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무겁기만 한 서체로 ‘믿음’, ‘의리’, ‘배신’ 등의 자막을 쾅쾅 박아 넣었던 <불한당>의 예고편은 이 영화를 그렇고 그런 남성영화의 하나일 것이라 추측케 했을 뿐이다. 영화의 개봉 즈음 <불한당>이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되었다는 호재가 들려왔지만 개봉 직후 감독의 발언이 구설수에 휩싸이면서 <불한당>의 예매취소는 늘어났고, 관객은 줄었으며, 그렇게 <불한당>은 극장에서 사라졌다.

모든 악재가 겹쳤던 <불한당>의 실패는 아마 대부분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관심도 없던 결과였겠지만, 이 사이 정말 ‘우연히’ <불한당>을 보았을 몇 안 되는 관객들은 이러한 결과에 차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불한당>은 ‘형,나,경’ 한 장면만으로도 단순한 언더커버 느와르로 칭할 수 없다는 것, 복도 씬에서의 절묘한 조명과 짝짝이 대회의 말미 터져나가는 음악의 타이밍, 최선장을 급습하던 때의 액션과 음악, 창고 씬에서 하나비 씬으로 이어가는 커트의 애잔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관객들은 답답해했으며, 전에 본 적 없는 두 남자주인공의 절절한 감성을 느끼지 못하는 굳건한 프레임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 관객들이 알아본 이 새로운 영화가 메인 스트림에서 바닥을 쳤다는 것. 그렇기에 그것을 알아본 관객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는 것. 즉, ‘불한당원’의 출현과 활동 그리고 그 결과는 추락했던 <불한당>이라는 영화가 쉽게 폄하될 영화가 아니라는 관객들의 확실한 믿음으로 쓰인 일종의 ‘반전 드라마’라인 것이다.

구겨지면 구겨질수록 빳빳이 폈을 때의 쾌감은 올라간다. <불한당>이 분명 기존의 영화들과 다르다는 믿음은 상영관을 찾게 했고, 이 영화의 감정을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묘사해 준 배우에 대한 열성적인 응원에 닿게 했다. 이처럼 구겨진 <불한당>을 펴기 위한 불한당원의 고투는 <불한당>이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 그리고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던 영화들과 함께 후보에 오르고, 수상을 하는 것으로 보상을 받았다. 즉, 우리가 알아본 이 영화가 ‘잘된 영화’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자신들이 펴 놓은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영화의 승리라 할 수 있는 이 반전 드라마는 불한당원들이 쓴 것이면서 그들의 화력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발화점이 된다.

(아마도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불한당>이 흥행에 성공했다면 불한당원의 출현, 혹은 그 화력이 어느 정도였을까를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억울함이 해소되었을 때, 해소를 넘어 상대를 제압했다면 더 높아졌을 희열은 <불한당>의 악재들을 뒤집고 얻어낸 <불한당>에 대한 관심과 수상이라는 극복과 맞물린다. <불한당> 이후 ‘지천명 아이돌’로 불리는 배우 설경구의 서사는 바로 관객들의 반전드라마의 극점에 있다. 한재호라는 인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관심 받지 못하는 배우 설경구에 대한 전에 없던 지지는 남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는 연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배우가 <불한당>으로 수상했을 때 관객들의 드라마는 정점을 찍을 수 있다. 불한당원이 앞으로도 등장할 수 없는 팬덤인 이유는 이 모든 상황이 겹쳐 관객들이 쓸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확률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변별점의 발견과 <불한당>의 동사화(動詞化)

영화 <불한당>의 개봉 한 달 쯤 전에 나왔던 영화 <프리즌>(2017)은 감옥 안에서 감옥을 평정하고 바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물을 중심으로 남성들의 권력욕, 그 사이의 배신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였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의 주요 인물의 설정, 감옥에서의 몇몇 특정 공간들은 <불한당>에서의 감옥 시퀀스와 상당부분 겹친다. 감옥 안에서 휴대폰은 물론 맘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이들(<프리즌>의 익호(한석규)와 <불한당>의 한재호(설경구)), 감옥에 들어온 경찰(<프리즌>의 유건(김래원)과 <불한당>의 조현수(임시완)), 감옥 내 권력자와 손을 잡고 그들을 돕는 감옥 내 관리자(<프리즌>의 강소장(정웅인)과 <불한당>의 보안계장(진선규))의 설정들과 감옥 내 식당이나 운동장 등은 두 영화가 겹치는 지점이지만 그 관계 그리고 공간이 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프리즌>에서의 감옥이 억압된 공간이라는 점을 통해 역설적으로 폭발하는 권력욕의 극치를 보여주며 현실적인 공간으로 자리한다면, <불한당>에서의 감옥은 마치 한재호와 조현수의 놀이터, 혹은 그들을 위한 공간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만큼 억압의 강도가 최소화 되어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도, 공간도 특별한 차이는 없지만 분명한 변별점을 지니는 것, <불한당>은 이 지점에서 다시 관객과 만난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프리즌>과 <불한당>이 전혀 다른 영화로 읽혔던 것은 <불한당>이 여타의 남성영화들과 다르게 두 주인공을 둘러싼 감정선을 깊이 묘사했다는 점을 먼저 들 수 있을 것이다. 한재호와 조현수의 조명이 구분되고, 세심하게 음악을 배치하고, 한재호가 조현수를 쫓는 시선을 화면에 등장시키고야 마는 집요한 시선들은 분명 ‘의리’라는 이름으로 퉁친 채 흘려보내온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한재호를 맴돌고 있는 병갑(김희원)에 대한 관계의 설정이나 역시 한재호를 물고 늘어지는 천팀장(전혜진)은  기능적으로 소비되던 2인자, 혹은 민폐의 여성 경찰이 아닌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지면서 그들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러한 생동감 있는 관계들은 관객들과 영화가 더욱 탄력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을 빚어내는 2차 창작을 불러 들였다.

이러한 불한당원의 적극적인 행위들은 거의 ‘<불한당> 하다’라는 동사화(動詞化)로 까지 확장시킬 만큼 방대한 것이다. 비단 2차 창작 뿐 아니라 ‘<불한당>을 하는’ 행위들은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는데 여기에는 영화 <불한당>에서 보여준 재치 있는 설정들이 일조한다. 조폭이 등장하고 마약 밀거래가 등장하며, 경찰들이 작전을 짜고 역할을 나누는 동안 <불한당>에서는 단 한 번도 룸살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힘겨루기를 할 때 마치 저 공간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등장했던 그 지겨웠던 룸살롱은 <불한당>에서 분식집으로, 식당으로, 오픈된 카페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재호와 병갑이는 경찰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고생들이 북적대는 즉석 떡볶이 집을 찾았고, 대표가 바뀐 조직원들의 회식은 평상이 넒은 오리고기 집에서, 경찰들이 작전을 모의할 때에는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는 쇼핑몰의 카페에 자리잡으면서 전혀 다른 공간이 등장했다.

불한당원이 2차 창작을 넘어선 ‘불한당 하기’를 하며 스스로 즐길 거리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낭창한 분위기 속에서 헐벗은 여자들이 술을 따르고, 술을 나누며 서로의 간을 보는 예의 그 흔한 장면들이 배제된 <불한당>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누비고 다녔던 그 현실적인 공간들을 당원들의 공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신림역에 위치한 즉석떡볶이 집에서는 약간만 귀를 기울이면 불한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부산에 있는 오리고기 집에서는 영화 <불한당>의 촬영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다. 이 공간들을 넘나들었던 영화적 상상력은 관객들을 통해 또 다른 상상의 공간이 되었고, 여기에서 관객들이 발견한 유희는 영화의 유희적 확장이라는 나아간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재호와 병갑, 고회장(이경영)이 마약 밀매를 위해 위장기업으로 세웠던 오세안무역의 독특함 역시 색다른 ‘불한당 하기’의 분위기를 이끄는 데에 일조했다. <불한당>의 남성들 세계에서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것 중 하나는 힘을 빡 준, 서열과 위계가 분명한 군기잡기의 모습이었다. 현수 앞에서 힘자랑을 하려다 오히려 고회장에게 뺨을 맞았던 병갑은 차에 숨어 훌쩍일 만큼 눈물을 흘렸고, 재호는 후배들과 장난스레 캐치볼 수준의 야구를 즐긴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적절히 풀어져 있는 오세안 무역의 분위기는 처음 ‘병맛’ 수준의 광고로 갑작스레 등장하는 것으로 이미 그 성격을 알려주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견고하고 폭력적인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충분히 수용 가능한 분위기의 세계, 그것은 불한당원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진입 가능한 곳이었다.

크루즈 선상파티라는 불한당원들의 기획은 이 상상이 극대화된 영화적 실천의 한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세안 무역’이라는 업체명과 적절히 구분된 직위가 새겨진 명함을 나누고, 영화 속 장면들을 따라하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영화가 그려놓은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이자 연대, 그리고 놀이였다. 이처럼 <불한당>은 여타의 영화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지점들로 여타의 남성영화들과 구분되는 매듭들을 지어 놓았고, 불한당원들은 이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며 놀이화 하고 있었다. 분명 ‘겨냥’하지 않았을,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았다는 감독의 설정들에 관객들은 오히려 ‘저격’ 당하면서 그 새로운 지점에 대한 ‘동사화’를 끊임없이 창조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극적 해석과 반응에 놓인 솔직한 전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역시 <불한당>이라는 영화가 주는 독특한 미학에 대한 환호에서 비롯된다. 최근의 한국 영화들, 게다가 무수히 등장하는 남성영화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교차하는 조명의 변화와 색감, 처절함을 걷어낸 환희가 넘치는 액션, 완성도 높은 ost의 절묘한 흐름 등은 <불한당>에서 단연 도드라졌다. 불한당원들이 내놓는 예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더 이상의 해석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지점을 예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영화에 대한 날카로운 순간의 포착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해석 역시 흥미롭게 생산된다. 물론 이때의 전제는 이 영화가 애초에 밝혔던 두 남자의 감정선과 맞닿는 지점에 이 모든 미학들이 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불한당원의 해석이 비약이거나 어설프게 퀴어 코드를 탐닉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의 의도한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불한당>의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설경구는 <불한당>을 찍으며 임시완이라는 배우를 사랑했다라고 이야기했고, 변성현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며 멜로영화를 더 많이 봤다라고 밝히면서 이 영화가 두 남자 사이의 감정선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영화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배우 김희원과 전혜진 역시 감독의 의도를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병갑의 캐릭터 완성에 이러한 지점 역시 분명하게 고려되었다. 이는 관객들을 ‘겨냥’하면서 아슬아슬한 퀴어 요소를 흩뿌려 놓고 이를 부정하는 브로맨스나 남남케미 등의 단어로 희석시키거나 전혀 의도가 없었다는 말로 부정해버리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두는 것이었다. 

최근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로 불편함을 드러내야 할 만큼 퀴어 코드는 일종의 소비의 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을 뭉개며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슬쩍 넘기려는 비겁함은 ‘오직 그 사람’이어야만 사랑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인물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퀴어 코드에 호감을 가질 관객들을 ‘겨냥’ 했으면서도, 그 영화가 담고 있는 감정을 결국 부정하는 방식은 이제 너무도 예민하고 명민한, 자신의 의견을 더하는 것에 거침없는 관객들에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역으로 영화를 관통하는 중심 감정을 선명히 밝혔을 때, 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관객들의 해석의 장은 무한히 확장된다. 때문에 <불한당>이 명확한 연출의도와 배우의 연기에 대한 해석을 분명히 했을 때 불한당원의 해석이 넘쳐흐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한당>에 대한 무수한 해석들은 베드신이나 키스신이 등장해야만 사랑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단순함에 실소를 보냈고, 작은 행동이나 숨소리, 누군가를 끊임없이 쫓는 눈빛,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망설임 등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를 의미화 했다. 관객들의 해석이 더해졌을 때, <불한당>에서는 새로운 감정 요소들이 다시 발견되었고, 인물에 대한 몰입과 연민은 더욱 높아졌다. 이렇게 불한당원들의 적극적인 해석은 배우들의 생각이나 덧붙여진 해석과 함께 또 다른 의미로 번져가기도 했고, 감독은 관객들의 질문을 통해 자신이 의도한 장면의 전혀 다른 해석 가능성에 대해 곱씹으며 고민을 하고, 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면서 해석에 대한 의견을 더했다. <불한당>은 이렇게 관객이 찾아낸 요소들로 영화의 중심에 놓인 감정에 대해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을 수 있었다.

물론 <불한당>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견들은 찬사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불한당원들은 사소한 실수들을 짚어내기도 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불편한 장면들 가령 영화의 초반 현수의 출소 후 함께 차에 타 진한 키스를 하던 나타샤의 등장이나, 오세안 무역 조직원들이 자신들을 잡으려는 천팀장에게 섹스 토이가 가득 담긴 상자로 성희롱을 하는 장면 등은 굳이 필요치 않았던 장면으로 꼽는다. <불한당>에 대한 해석들은 이러한 결점들을 분명히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와는 거리를 두면서, ‘그래서 어쩌라고’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당연한 것으로 위치시켰다.

<불한당>에 대한 이 수많은 해석들은 불한당원이 분명히 ‘영화’ <불한당>을 사무치게 사랑하는 이들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새삼스레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불한당원들의 1년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영화에 열정을 쏟으며 (사실 매우 소수였을)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과 흥겨운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한편으로 배우만 쫓는 ‘천박한 빠순이’로 ‘후려치기’ 당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했고, 전에 없는 현상을 전시·활용하려는 순간들을 견뎌야 했다. 어떤 현상을 판단할 때, 상대를 대할 때, 이(들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은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팬덤은 늘 (그 양상이 어떻든 간에) ‘구경거리’ ‘빠순이’로 간주되었다. 설사 배우만 쫓는 빠순이라 할지라도 무시당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는 것, 불한당원들이 쌓아놓은 1년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안쓰럽다.  

‘지난 1년’과 ‘앞으로의 n년’을 ‘현재’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불한당>은 극장에서 다시 상영 중이며 한재호(설경구)와 천인숙(전혜진), 고병갑(김희원)과 김성한(허준호)은 변성현 감독과 함께 관객 앞에 서면서 2018년의 <불한당>을 다시 쓰고 있다. <불한당>이 개봉했던 2017년 5월 17일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시점임에도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 그리고 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불한당원들의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불한당>의 ‘지난 1년’이 ‘현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무화(無化)시킨 이들의 열정은 한국 영화의 관객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수치로 환산되어 숫자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체. 영화는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길게 늘어놓았지만 ‘잘된 영화 <불한당>’을 알아보고, 알리려 했고, 즐긴 것 자체가 엄청난 화력이었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 팬덤은 결국 매우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겹게 보아왔던 영화들은 넘어서고, 의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를 영화의 언어로 유려하게 표현하는 것. 여러 가지 외적인 이유들로 이 단순함이 어렵다지만, 글쎄. 관객들이 알아보는 것은 분명 이 단순함 어딘가에 있다.

<불한당>(2017)과 분투했던 불한당원들
사진출처: 다음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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