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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말하는 개'와 카톡하며 울음 우는 소녀
[안치용의 프롬나드] '말하는 개'와 카톡하며 울음 우는 소녀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8.05.31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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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옛 장소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한때 뻔질나게 다닌 곳들. 저 구석에 저장돼 휴면중인 기억을 불러내느라 뇌가 분주하다. 그러나 아주 절박하지 않는 한 뇌란 놈은 대충대충 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지 다들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났다. 기억에 의지해 버스정류장 쪽으로 간다. 웬걸, 정류장의 노선표를 훑어보니 집에 가는 버스가 없다. 기억은 여기서 탔다고 우기고 노선표에는 없고.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서 전철을 타기로 한다. 그물모양의 전철노선도는 진리다. 그 앞에는 기억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운 좋게 자리까지 얻어걸리는 바람에 마음이 해이해져서 기억의 배신을 잊고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한다. 그런데 맞은편 상황이 눈길을 끈다. 젊은 처자가 하염없이 울고 있다. 그러려니 하고 눈을 감으려다가 뭔가 낯설어서 살펴보니, 눈물만큼이나 손가락이 분주하다.

 

카톡하며 우는 여인. 20대 초반 정도의 여자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으며 카톡에 열중이다. 눈물이 흐르는 눈은 핸드폰에 고정됐고, 양손에서 이어진 몇 개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또 신경질적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손의 모양이 카톡하기 좋아 보인다. 그러한 기계화한 감성의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사연을 떠올리게 되지만 내 머리는 식상하게도 결국 사랑에 혐의를 두고 말았다.

 

졸음이 사라지고 같이 마음이 심란해진다. 취기 때문인지 아주 잠깐 따라 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모종의 자기검열이 작동하지 않았다 하여도, 술 취한 중년 아저씨가 느닷없이 울거나, 또는 소녀인지 여인인지 그 중간쯤인지 하여간 맞은편 풍경의 주인공을 흉내 내 똑같이 카톡하며 울어도, 그 모양은 영판 아니올시다. 누가 뺨이라도 쳐주면 모를까. 한데 정말로 울고 싶지도 않은데 누가 뺨을 쳐줄까.

 

지금의 내가 결코 하지 못할 일이 울음 우는 여자처럼 우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눈물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전철 안에서 카톡하며 울음 우는 일 같은 건 애초에 지금 나의 존재 내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카톡하며 울음 우는 여자가 아름다운 건 내 존재와는 다른 형태의 존재에서 발산되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겠지만, 카톡하며 울음 우는 여인처럼 우는 건, 말 그대로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도 카톡하며 울음 우는 여자를 몰래 보며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은 할 수 있다. 카톡하며 우는 여자는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말하는 개’ 하고 너를 바꾸려고 해”라고, 어느 소설가의 에세이에 등장한 일화 비스무리 하게 통보를 받았을까. 사실 사랑은 늘 그렇게 떠나간다. 혹은 그렇게 떠나보낸다. 사랑하는 아내를 ‘말하는 개’가 대체한다. 사랑하는 아내는 갑자기 자신을 사랑한 남자에게서 대체를 통보받는다. 사랑의 자리는 언제나 주체의 옆이다. 그러하기에 옆을 다른 무엇인가에 내어주는 순간 사랑은 떠나가 버린다.

 

“비참한 인간이 더 비참해지려” 드는 걸, ‘말하는 개’라고 해서 이해할리는 만무다. 나아가 비참에게는 최상급만이 자신에게 허락될 수 있는 가장 큰 특전이란 걸 개가 알 리가 없다. 만일 비참해지려면 가장 비참해져야 한다. 반면 ‘말하는 개’라면 이렇게 조언할 법하다. 조금 더 사랑하든지, 조금 덜 사랑하든지 했어야 하였다고. 만일 애초에 그런 선택을 내릴 줄 알았다면 인간이 비참해지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둔한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지만 항상 분명하다. 조금 더 사랑해야 한다. ‘말하는 개’는 비웃는다.

 

과거의 어느 시기에 매일 타고 다닌 노선이 사라진 (아직도 익숙하다고 믿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이다 돌아온 밤. 카톡하며 울음 우는 여자를 보며 귀가한 밤. 기억의 배신이 사랑의 배신만큼 요망할까만 자기 뇌의 사보타지가 주는 배신감의 충격이 더 작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사족을 머리에 입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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