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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스트럭>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원더스트럭>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안숭범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5.31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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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의 영화는 음악으로 승화되는 등장인물의 열의에 찬 현재가 중요하다. 그런데 음악이 추스르지 못하는 그다음 순간의 혼란이 더 중요하다. 등장인물들의 생활배경이 되는 시대의 분위기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스러운 사연이 시대의 요구와 다투다가 상처 입는 과정에 더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의 영화는 퀴어의 발생학에 대한 사적 탐색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검열해내지 못한 욕망에 내비치는 본원적인 ‘끌림’을 일반 경험론으로 소화해낼 필요가 있다. 

동화적 온기를 가진 <원더스트럭>은 작지만 뚜렷한 ‘차이’이면서 그만큼의 ‘변화’다. 이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헤인즈는 신비로운 서사무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선명한 이정표로 기능하는 피사체들을 진열해 놓았다. 그것들은 해석의 심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이자 영화의 전언을 수렴하는 데 필요한 출구다. 이 글은 <원더스트럭>의 중요한 분기점에 놓인 몇몇 이정표를 가려낸 후 그 너머를 상상하려는 자들을 위해 작성됐다. ‘그 너머’에서 헤인즈는 영화에 대한, 영화에 의한, 영화를 향한 동화적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처연하면서도 초연한 아름다움을 가진 이 레트로의 세계. 지금부터 당신은 그 사이에 난 길로 나아갈 것이다. 

뉴욕-나를 정의하는 세계, 
우리를 관통하는 세계

헤인즈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하기 위해 정착한 곳이 뉴욕이다. 아마도 뉴욕은 그의 사적인 성 정체성과 영화감독으로서 예술가적 자의식이 본격적으로 실험되던 장소였을 것이다. 먼저 <캐롤>을 보면 내부 구성원을 인준하는 1950년대 뉴욕의 보수적 도덕률이 미묘한 공기처럼 자리한다. 테레즈와 캐롤의 사랑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그 공기’를 배경으로 힘겨운 여정을 이어간다. 동성애자인 헤인즈의 사적인 성 정체성과 뉴욕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해석이 그 여정 곳곳에 인상적으로 녹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원더스트럭>에서의 뉴욕은 감독으로서 자신의 작가의식을 발양시킨 영화적 순간들의 집이라고 느껴진다. 우선 <원더스트럭>은 1927년과 1977년의 뉴욕을 매우 세심하게 묘사한 구상화로 보인다. 그러나 <이티>와 <에이 아이>와 같은 스필버그식 동화적 추상화의 일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양가성은 현실의 뉴욕을 사적이고 내밀한 사연으로 윤색시키는 인물들로부터 파생한다. 

이 영화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두 아이가 그들 각자의 별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로즈가 찾는 별은 말 그대로 무성영화 시대 스타였던 엄마의 환영이다. 뉴욕은 엄마가 옮겨 간 연극무대를 내부에 감추고 있는 장소다. 한편 벤의 별자리는 대면한 적 없는 아버지의 희미한 흔적이다. 뉴욕은 아버지의 자취를 품은 서점을 감추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로즈에게 뉴욕은 무성영화와 연극무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심미적 영감의 거처이고, 벤에게 뉴욕은 책 속 신기한 박물 그림과 아버지의 한 시절을 품은 지적 호기심의 정처다. 헤인즈도 그들처럼 뉴욕에서 자기만의 별자리를 찾아 영화의 여정을 시작했을 것이다.

박물관-기억과 상상의 코라를 지나

<원더스트럭>에서 50년의 시차를 넘어서 로즈와 벤은 만난다. 더 적확하게 기술하면, 그들은 질적으로 다른 두 번의 만남을 가진다. 첫 번째 만남은 교차편집처럼 보이는 평행편집을 통해 마술적으로 성사된다. 로즈와 벤은 각각 흑백(1927년)과 컬러(1977년)의 변별적 세계에서 50년의 시간적 이격을 가진 채 뒤섞인다. 이때의 ‘뒤섞임’은 편집의 효과로 관객에게만 공지되는 것이지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된 운석 곁에 이른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실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에서 그들이 초월적으로 만난 것 같은 착시효과, 혹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체험하게 된다. 

두 번째 만남은 컬러의 세계, 곧 1977년의 세계로 할머니가 된 로즈가 넘어오면서 성사된다. 킨케이드 서점은 현실적 만남이 성사된 최초의 장소이지만, 그들 사이의 정체성이 각자에게 공지되는 진정한 만남은 퀸즈 박물관에서 이뤄진다. 그곳에서 로즈는 아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아들만의 것을 소개하고, 벤은 아빠와의 재회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자리에 남은 아빠만의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 다른 성격의 별이 된 (로즈의) 아들과 (벤의)아빠는 동일인으로 포개어지고, 기억과 상상으로 꿈꾸던 뉴욕은 창조적으로 재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인물에게 자연사 박물관과 퀸즈 박물관이 갖는 상징적 지위를 재해석해야 한다. 자연사 박물관은 흘러가는 속성으로서의 ‘시간성’과 절연된 박제화 된 시간이 영감과 충동으로 일렁이는 곳이다. 그곳 어딘가에 있는 ‘호기심의 방’은 엄마, 아빠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어린 로즈와 벤의 안식처다. 그들이 근원적인 충동과 대화하며 상상과 기억을 분출, 생성하는 ‘코라(Chora)’의 세계인 것이다. 영화 말미의 정보를 바탕으로 보면 사적인 기억과 체험(로즈에게 ‘아들의 늑대 모형’/벤에게 ‘아빠의 늑대 꿈’)을 위로하고 끌어안는 미분화된 공간이다. 그 연장선에서 자연사 박물관 복판에 놓인 운석은 상상과 기억, 혹은 상상적 기억으로 닿아가려 했던 것(별)의 잔해와 같은 표정이다. 

그렇다면 퀸즈 박물관은 상상과 기억을 향한 충동을 창조적으로 재현한 ‘예술하기(헤인즈에게는 ‘영화하기’)’의 공간으로 변별된다. 뉴저지주에 살던 무렵, 로즈는 좋아하는 영화배우(혹은 엄마)에 대한 기사를 스크랩한 후 그것으로 자기만의 건물들을 세우곤 했다. 훗날 로즈는 그 꿈의 예술적 재현으로서 뉴욕시 전체의 파노라마를 만든다. 퀸즈 박물관은 그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모형을 재생하는 공간이다. 자기를 매혹시킨 꿈과 그것을 허락하(지 않)던 현실이 예술로 승화된 장소다. 아빠를 향한 근원적인 그리움에 전화 수화기를 들다가 벼락을 맞고 청력을 잃은 벤은 그곳에서 아빠의 흔적들이 재구성된 세계를 관람한다. 그러니까 헤인즈의 기획 속에서 이곳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기억과 상상을 현실적으로 포월(包越)하려는 자에게 재현으로서 영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이다. 

청각장애, 그리고 별자리- 감각의 열림과 그 너머의 다른 별

1927년과 1977년은 영화사적 전환의 순간이다. 1927년의 전환은 무성영화가 토키영화로 대체되는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공기억의 일부다. 그렇다면 1977년은 헤인즈의 사적인 기억 속에서 영화가 각별한 변곡점을 맞은 해라고 추측된다. 어쩌면 그해 본 영화나 그 무렵 만들어진 어떤 영화 앞에서 헤인즈는 벼락을 맞는 듯한 충격과 감각이 마비되는 전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실, 시청각적 매체인 영화의 모국어는 언어 이전에 시청각적 기표다. 평범한 영화가 그 두 가지 감각(시각, 청각) 중 하나를 요구하지 않을 때, 해당 감각은 쓸모없게 된다. 그러나 좋은 영화가 하나의 감각을 닫을 때는 그 감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이 열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는 무성영화의 심미적 세계에 매혹된 로즈를 통해 헤인즈가 말하려는 바다.  

1927년의 말 없는 세계에서 음악과 음향은 연극적인 인물들의 몸짓과 합을 맞춰 무성영화 특유의 리듬감을 실감시킨다. 때론 흑백의 질감을 안은 주관적인 몽타주가 우리의 심리적 리듬까지 이끌어낸다. 운석 앞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배경으로 노트에 편지를 쓴 후 종이배를 만드는 로즈의 순간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때 흑백의 화면을 관통하는 카터 버웰의 음악 ‘Silent Whispers’는 침묵의 언어성까지 계시한다. 한편 1977년의 벤은 갑자기 완전한 침묵 속으로 빠져든 후 그동안 간과해왔던 이미지와 색채의 언어성을 회득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후반, 벤은 침묵 속에서 아들을 회상하는 로즈를 통해 상상적 아빠를 만난다. 이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내면의 감각으로 듣는 법을 함께 깨치게 된다. 
그 깨침의 순간, 세계의 침묵(뉴욕의 대정전)이 일어나고 그들은 영원한 결핍으로 가득 찬 시궁창 속에서 함께 별을 올려다본다. 그 순간 우린 벤이 쥔 이 영화의 단서, 곧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오스카의 글귀(“우린 모두 시궁창 속에 있어요. 하지만 그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요”)를 적확하게 대면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어떤 선험적 좌표를 상징하는 무성영화 속 엄마(로즈)와 책갈피 속 아빠(벤)를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1차 세계 대전 때 루카치가 쓴 글(“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의 자조 속에 갇힐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낭만적 포월의 뉘앙스로 흥건한 그 마지막 장면은 기존 헤인즈의 영화에 없던 온기 가득한 희망의 제스처다.

살아있는지, 살아있다면 거기 있는지 불명확한 아버지를 찾아 한 남매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그 영화에서 어둠이 자기 내부에 감춘 희미한 푸른빛을 본 적 있다. 자꾸 시각을 닫는 안개 때문에 그 너머가 심미적으로 들리는 경험을 한 적 있다. <원더스트럭>은 그 같은 방식을 동화적으로 번안한 자기반영성의 영화다. ‘당신은 밥 딜런을 안다’와 ‘당신은 밥 딜런을 모른다’ 사이에 ‘그러나’, ‘그런데’가 아니라 ‘그래서’를 넣던 헤인즈(<아임 낫 데어>)가 있었다. 그렇다면 <원더스트럭>은 ‘당신은 내 영화를 안다’와 ‘당신은 내 영화를 모른다’ 사이에서 ‘그래서’를 찾은 이들에게만 들리는 동화다. 퀸즈 박물관에 들어가기 직전 벤만이 목격한 마른 벼락을, 영원히 잃어버린 아빠의 그 ‘시각적 목소리’를 당신도 들을 수 있길 바란다.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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