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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이봄영화제, 7월 ‘예술이 현실에 말을 거는 방식들’ 개최
제1회 이봄영화제, 7월 ‘예술이 현실에 말을 거는 방식들’ 개최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 승인 2018.07.0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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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봄씨어터와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함께 제1회 이봄영화제를 시작합니다. 
매달 정해진 주제로 평론가들의 해설과 함께 영화를 깊고 풍성하게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예술은 삶과 현실의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말이다. 심지어 혹자는 퇴폐적이고 자폐적인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당면한 상황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 뿐이라는 혐의를 예술에 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말로 예술이 도피적이기만 한 걸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밀실의 주인인 동시에 광장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 중에서 순수하게 개인적이라거나 순수하게 사회적이기만 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각각의 인간 행위양식들은 저 나름의 독특한 말 걸기 방식을 가지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청취할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예술에게 교과서와 동일한 방식의 말하기를 요청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테다. 예술은 예술에게 허락된 고유의 방식으로 현실을 위무하고, 살아갈 의미를 부여하며, 더 나아가선 현실의 한계를 돌파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함께 귀 기울여 그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자. 
 

7월 17일(화) 19:00 
<죽은 시인의 사회>(1989), 피터 위어, 128분 - 해설

시는 존재가 머금고 있는 넘치는 고유함과 약동하는 생명력의 표현이다. 따라서 어느 누군가가 ‘시를 산다는 것’은 본디 자신에게 허락된 특별한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가 죽어버린 현실 사회 속에서 존재자들은 자기 자신다움을 박탈당한 채 단순히 ‘어떤 역할들’만을 감당하도록 종용받는다. 몸은 살아있되 죽은 영혼을 질질 끌고 버텨내는 매일이 되는 셈이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한다면 그럼에도 시적인 것의 꺼져버린 불을 다시금 되살리려는 시도가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일까? 갖은 압력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씨앗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한 것일까?      

 
7월 31일(화) 19:00
<피아니스트>(2002), 로만 폴란스키, 148분 - 해설

오랜 시간에 걸쳐 서구사회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광기에 의해 폐허가 돼버렸다. 한 줌의 도덕마저 망실해버린 가운데 오직 인간을 잠식한 원시적 야수성만이 세상을 안개처럼 뒤덮고 있다. 특정 민족에 대한 혐오라는 악마적 전염병이 깊어져가고 가진 총과 칼의 수가 종의 상대적 우월함을 대변하는 지표로 자리매김한 참혹한 상황 속에서라면, 사실상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게 예술이요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어쩐 일에선지 유대 민족주의자, 동포의 배반자, 외국인 레지스탕스, 심지어 적군의 간부조차도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쓴다. 도대체 왜? 포화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아노 선율 속엔 천 겹의 패스트리와 같은 묵직한 무엇인가가 압축돼있다. 그 밀도와 농도 무게 속에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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