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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2018년 여름 온난한 비망록
[안치용의 프롬나드] 2018년 여름 온난한 비망록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8.08.18 0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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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어제와 오늘의 아침과 밤 바람이 달라졌다. 특히 밤 공기에서 다른 계절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더라. 오고 감이 세상사의 이치임을 깨우치고도 남을 나이이지만, 이 여름은 덥고 힘들었으며, 길고 길었다. 앞으로 폭염과 열대야가 다시 온다는 예보가 있긴 하더라만, 확정된 전환에 마음은 가을로 치닫는다.

 

그렇게 더웠다는 1994년의 여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땐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났을 텐데, 올 여름만큼 덥지 않았던 것 같다. 기억의 왜곡일까. 엄밀하게 말해 사실 왜곡되지 않은 기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 나의 감각이 맞는 감각이지 싶다. 여름의 한창일 때 상투적으로, 정말 상투적으로 에어컨이 고장 나더라.

 

10년을 훌쩍 넘겨쓴 에어컨. 올 여름을 못 넘기리라곤 상상조차 못 하였는데 폭염이란 말이 사방을 비산하던 어느 날 기절하듯 에어컨이 죽더라. 몇 년 전 겨울, 16년을 탄 나의 자동차가 갑자기 시동을 멈춘 것처럼 그렇게 사상 최악의 더위 속에서 에어컨이 멈췄다.

 

옛 에어컨이 멈춘 다음 날로 새 에어컨을 샀지만 구매하고도 1주일을 그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에어컨 없이 지냈다. 땀에 절어 간신히 잠들었다가 물 먹은 솜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끔찍한 여름. 언제 끝날까 싶더니 어제 귀가하는 골목에서 서늘한 바람 한 자락이 맞아주더라.

 

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상투적으로 몇 번쯤은 박인환의 시를 떠올릴 계절이 성큼 창밖에서 신호를 보낸다. 어려서 읽은 시는 무섭다. 나이가 들어도 감성의 첫 자락을 우아하지 못한 방식으로 휘젓기 때문이다. 나이 듦 자체가 애초에 우아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아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당장은 오래된 시를 읽기보다는 폭염 때문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여름 안에 마쳐야 한다.

 

새 에어컨은 성능이 좋아지면서 몸집은 줄어들었기에 옛 에어컨이 둔중하게 차지한 흔적 안에 날렵하게 서있다. 마루 구석의 바닥에 남은 그 네모난 흔적, 세월의 때는 새 에어컨과 비교되어 더 음산하게 느껴지지만 새 에어컨이 미처 채우지 못하고 남은 옛 에어컨의 네모 안은 세월의 보호 탓인지 거기만 새 마루처럼 하얗다.

 

PC 앞에서 앉아 일하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새 에어컨과 그 밑동, 옛 에어컨이 남긴 네모난 흔적, 그리고 세월의 때와 그 안의 무구(無垢)를 내려다본다. 옛 에어컨이 남긴 네모를 고스란히 내 몸 안에 나이테로 쌓으며 그렇게 여름을 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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