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6월호 구매하기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술과 영화의 경계,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확장영화 '더 스퀘어'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술과 영화의 경계,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확장영화 '더 스퀘어'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8.08.21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인간은 나약하다. 넌 아무 것도 아니다의 발화체는 인간의 피에타를 상징하는 아베 마리아 음악으로 대위법화되어 시종일관 상응한다. 미술관권력의 해체로부터 인간의 보편적 자유를 그린다.
 
근본 질문이 있다. 공간에 가방을 놓으면 그것이 예술이 되나? 무엇이 예술을 형성하는가? 초기에 미술은 현실을 모사하는 것에서 예술성을 찾았다. 그건 기술로서의 예술이다. 예술이란 단어의 어원은 기술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대예술에 와서 그런 의미는 더 이상 의미롭지 않다. 기술은 단지 기술일 뿐이다. 따라서 예술은 사물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 출발한 것이 초현실주의다. 초현실주의는 인간으로 말하면 의식 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을 다룬다. 현실로 말하면 인간이 보지 못하는 가상의 시공간을 그려낸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예술을 형성하는가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 답은 질문이 되어 귀환한다. 예술은 본질적인 질문으로 인하여 예술이 된다. 질문이 없는 내용은 단지 인간이나 존재하는 세상을 모사해낸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걸작영화 <더 스퀘어>가 예술영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재미있는 내용을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질문들이 있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심각한 것에 이르기까지 질문들이 많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공간에 가방을 던져 놓으면 그게 예술품이 될까? 과거엔 캔버스에 가방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이제 가방 그리는 수고를(기술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가방을 어느 공간에 갖다 놓음으로써 그 가방이 의미하는 바를 전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내가 그린 가방이 어떤 의미일까요? 대신 내가 놓은 가방이 어떤 의미일까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으로부터 시작된 ‘레디메이드(ready-made)’예술은 현대예술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족적이다. 
 
▲ 미술관앞에 전시된 작품 사각형은 미술관권력의 해체를 상징하는 문명비판적 메시지를 준다
 
영화는 ‘더 스퀘어’ 즉 장방형의 선을 공간에 그은 작품을 전시하면서 겪게 되는 한 주인공의 환멸을 그린다. 영화의 소재 즉 사각형은 그 자체가 미술사의 논란을 암시하는 은유적인 대상이다. 사각형은 여러 은유적 지시체를 갖는다. 처음 제기한 질문인 공간에 가방을 갖다 놓으면 그게 예술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 자체를 암시한다. 미술사에서는 그러한 질문을 개념예술(Conceptual Art)이라고 한다. 미술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라는 것, 즉 개념(Concept)이 바로 미술이라는 주장이다. 
 
영화의 소재인 작품 ‘더 스퀘어’는 공간에 사각형의 선을 긋고 그 옆에 간단한 해설을 붙인 전형적인 개념예술이다. 설명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사각형 안에서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고 배려와 관용이 있어야 한다. 개념예술의 창시자인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유명한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인유(allusion)다.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라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세 가지 구성으로 설치되어 있다. 가운데 실제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사진으로 찍은 의자사진이 있다.  반대편 옆에는 의자를 설명하는 글이 있다. 이 세 가지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의 존재 방식이다. 첫째 실제 의자는 현존이다. 두 번째 의자사진은 이미지에 의한 재현이다. 세 번째 설명문은 재현에 대한 재현이다. 이렇게 현존재는 반드시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과 재현과 재현의 재현으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소통체계와 사물 인식의 과정을 보여준다. 
 
▲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 1965 - 조셉 코수스
 
첫 번째 현존이야말로 실존이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이고, ‘본질보다 선행하는 실존’(사르트르)인 것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성철)를 현시하는 차원의 대상이다. 모든 재현의 지시체며 근원이고 현상이다. 두 번째 의자사진은 재현이며 의사현실(pseudo-reality)이다. 우리 사회에는 현실 아닌 의사현실이 많다. 예술품들은 이러한 차원에서 기능한다. 그들은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현실인 것처럼 존재하는 현실이다. 박물관에 존재하는 많은 검증받은 모사품(Certified Copy)들도 마찬가지다. 박물관이 아니라도 일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유사품들이 있다. 유명인을 흉내내고 코스프레하는 캠프(Camp)미학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차원인 사진을 설명하는 글은 무엇인가. 그건 재현의 재현이다. 두 번째 차원이 캠프라면 세 번째 차원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재현)를 컵에다 새겨 파는 기념품(재현의 재현)이다. 그건 키치(kitch)의 세계다. 영화 <스타워즈>의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들이 그에 해당한다. 키치의 차원에 오면 상품화, 소비주의와 연결된다. 자연 그대로의 산(현존) - 국립공원화 혹은 공원의 사진(재현) - 사진을 넣어 이차가공한 기념품(재현의 재현). 현실은 이런 식으로 존재하고 그건 현실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의식에 있어서도 세 차원으로 존재한다. 
 
현존의 상태는 본래의 순수한 의식이다. 두 번째 재현의 의식은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특정 시각, 이데올로기로 치장된 의식이다. 주체의 형성이고 오인된 자아의 단계다. 상상계(라깡)다. 세 번째 재현의 재현은 탈주체화되고 구성된 주체의 형성이다. 자신이 말하고는 있으나 자신의 생각은 하나도 없고 전부 타자의 말로 범벅된 혼합된 주체형성이다. 혼성모방의 단계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의 단계다. 
 
영화에서 미술 작품 ‘더 스퀘어’는 단지 현대미술관이 처한 현실을 나타내는 소재일 뿐이다. 난해한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상업적 발상이 개입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확대해석되어 미술관은 위기에 몰려 주인공은 해직된다. 해직되어도 여론은 양분된다. 예술의 자율성과 정치적 억압의 이분법이 도마에 오른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다. 현실의 문제는 불교의 화두와도 같다. 들어와도 얻어맞고 나가도 얻어맞는다. 어찌 하겠느냐? 스승이 일갈한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게 삶의 문제다. 해법이 없다. 그것은 해법이 없는 문제다. 무문관(無門關). 문이 없는 문인 것이다. 
 
▲ 대지예술가 로버트 스미스슨의 작품. 대지를 활용하여 작품을 하며 대지가 곧 미술관이 되는 개념. 하지만 환경론자들의 반대에 부딫히는 모순에 처하기도 했다.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언급하는 인물이 있다.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 1938-1973)이다. 로버트 스미스슨은 대지예술가다. 대지예술(Earthwork)이란 무엇인가. 대지예술은 미술품이 미술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여 대지를 소재로 미술을 하는 유파를 말한다. 영화가 말하는 ‘더 스퀘어’는 마치 사각형에 사로잡힌 옹졸하고 소통하지 않는 미술관 권력을 말하는 은유다. 대지예술이 나타난 근거는 미술관이 예술을 빙자하여 현실 곳곳에서 살아있는 권력으로 군림했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대지예술은 미술관이 갖고 있는 상류문화, 경제, 정치로부터 독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시야에서 존재하고자 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경제가 악화되면서 대지예술을 후원하던 재력이 끊어지고 대지예술은 공공미술, 공공디자인이라는 또 다른 상업적  활로속에 머물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영화는 그러한 미술계 혹은 예술계의 속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미술관을 뛰쳐나오고자 했던 대지예술이 경기침체로 인한 후원의 감소 및 주창자 스미스슨의 조기 사망으로 인한 방향성 혼돈을 겪는 현실이 영화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스미스슨의 정신을 갖고 있던 예술옹호자 프로그래머는 상업화, 정치적 논쟁속에 휘말려 기획전을 망치고 은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는 이야기다. 이 우화는 무엇을 의미하나. 단지 미술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술이 인간의 삶속에서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예술이 혹 인간의 삶 위에서 고급하게 존재하면서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게 현실이라면 다시 서민의 삶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오락이나 상업이 아닌 본질적인 진지함과 철학의 영역으로 복귀해야 함을 촉구하는 것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