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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영화평]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 손시내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11.2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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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에 없었다>와 린 램지의 영화들에 대하여
▲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지난 10월에 개봉한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You Were Never Really Here)>(2017)는, 국내에서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로 이름을 널리 알린 린 램지 감독의 신작이다. 그녀의 영화들을 나열하고 보면, 장르나 구체적인 스토리의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 도드라지지는 않는 편이다. 하지만 4편의 장편들을 보고 나면 램지의 영화들이 공유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장편 데뷔작인 <쥐잡이(Ratcatcher)>(1999)와 <모번 켈러의 여행(Morvern Callar)>(2002),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까지, 그녀의 영화들은 언제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죽음이라는 소재가 사용됐다는 공통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말은 사실 대개의 영화에 붙일 수 있는 수사이기도 하다. 영화 내에서 죽음이 다뤄지는 방식이나 그와 연관된 인물들의 삶의 감각과 태도가 램지의 영화들에 그저 ‘죽음과 연관돼 있다’는 표현보다 훨씬 구체적인 방식으로 모종의 공통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 전작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램지의 인물들은 언제나 ‘자신과 관련 있는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는다. <쥐잡이>의 제임스(윌리엄 이디)는 스코틀랜드에 사는 하층민 소년으로, 쓰레기와 폭력이 가득한 거리와 집을 오가며 유년시절을 살아간다. 그가 친구들과 하는 일도 더러운 물가에서 뛰어놀거나 쥐를 잡아서 데리고 노는 것 정도다. 어느 날 한 친구와 놀다 다투게 된 그는 친구를 밀치고 도망치는데, 곧 그 친구가 익사한 채 발견된다. 어린 소년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죄책감과 그를 둘러싼 폭력 속에서 또다시 삶을 지속한다. 
 
<모번 켈러의 여행> 역시 죽음과 함께 시작한다. 모번 켈러(사만다 모튼)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그녀는 집에서 자살한 애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 한 편과 음악이 녹음된 테이프, 그리고 유서를 남긴 채 죽었다. 죽음의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음악들을 남기고, 소설을 인쇄해서 출판사에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하고서 떠났을 뿐이다. 모번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소설의 저자명을 자기 이름, 모번 켈러로 바꿔 출판사에 보내고는 애인이 남긴 돈을 가지고 친구 라나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비교적 많이 알려진 <케빈에 대하여>에서 또한 타인의 죽음이 중심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타인들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던 에바(틸다 스윈튼)는 케빈을 임신하고 양육하면서 계속되는 곤란에 시달린다. 정박된 삶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과 동시에 케빈이라는 아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곤란을 겪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인 에바만 감지할 수 있을 미묘한 사악함을 드러내던 케빈은 고등학생이 되자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영화가 시작하고는 곧장 그 일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곤혹을 치르는 에바의 현재와 그녀의 가족들이 등장하는 과거가 교차되며 영화는 계속 진행된다. 그러다 드러나는 끔찍한 사실, 고등학생이 된 케빈(에즈라 밀러)이 학교 체육관에서 활을 쏘아 학생들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아버지와 여동생 또한 살해했던 것이다. 에바는 그 이후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처럼 세 편의 영화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은 언제나 주인공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또 일종의 계기처럼 등장하지만, 쉽사리 의미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를테면 인물들은 죽음에 대해 속죄하거나 죽음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 혹은 죽음을 견디거나 버티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삶과 죽음과 폭력이 구분되지 않은 채로 뒤엉킨 세상을, 그냥 살아지기에 살아가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산다. 
 
모번 켈러는 거실에 피를 흘린 채 엎어져 있는 애인의 시체와 말 그대로 며칠을 함께 산다. 제임스의 세상은 수시로 죽음의 위협이 출몰하는 곳이다. 소년들은 또다시 물에 빠지고 길거리는 종종 폭력과 피로 뒤덮인다. 사건이 일어나고 케빈이 감옥에 수감된 이후, 에바는 집과 동네를 떠나지 않고 죽음의 흔적과 야유와 비난 속에서 살아간다. 린 램지의 인물들 혹은 사건들은 분명 도덕적으로 위태롭지만, 영화는 그들을 판단하거나 구원하려고 들지 않는다. 죽음을 나름대로 의미화하지 않고서는, 그러니까 소화하지 않고서는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이 죽음과 애도에 관련한 보통의 명제일 것이다. 
 
어떤 영화들은 그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기도 한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도 케빈에게 ‘왜’ 그랬는지를 묻기 위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케빈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케빈은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죽음의 이유가 없듯이 삶의 이유 또한 없다. 린 램지는 그렇게 이유도 원인도 없는 삶을 영화를 통해 지켜본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그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다만 이 영화는 중반부를 넘어서 한 번의 변곡점을 마련하는데, 처음에는 그 선택이 의아했으나 곱씹어보니 그건 오히려 죽음과 삶에 관련한 램지의 일관된 테마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호아킨 피닉스)는 가출했거나 납치당한 10대들을 부모의 부탁을 받아 구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경찰을 믿지 못하거나 경찰에 알려지기를 꺼리는 이들이 주로 조의 고객이다. 그는 망치를 들고 다니며 단번에 일을 해내지만 자주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냉혈하고 잔인하다고 평가받지만 노모와 단둘이 살며 시답잖은 농담과 집안일로 일과를 보낸다. 그는 어느 날 상원의원의 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구출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정치인들 사이에 일종의 스캔들과 갈등이 연루되면서 니나가 다시 납치되고 조의 동료와 노모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까지의 조는 램지의 인물이 줄곧 그랬듯이 별다른 이유와 목적 없이 죽음과 뒤엉킨 삶을 지속하는 인물로 보인다. 파편적으로 출몰하는 플래시백으로 추측하건대 그는 아버지의 폭력 속에 유년기를 보냈고 온통 죽음으로만 감각될 뿐인 파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과 육체는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있다. 조는 자신의 집에서 노모를 살해한 자들을 쏴 죽인 뒤 마치 모번 켈러가 그랬듯이 그 곁에 가만히 눕는 사람이다. 어머니를 호수에 수장시킨 뒤, 조는 자신도 죽고자 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진동하던 그의 상태를 죽음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니나를 떠올리고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구출하고자 한다. 조의 추는 이제 삶 쪽으로 다시 기우는 것인가. 그는 짧은 순간이나마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충격적인 사건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그와 비스듬히 겹쳐진 채 ‘그저 살아지는’ 인물들의 행보를 좇던 램지의 영화가 별안간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인물과 그 영웅적 면모를 조명하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것일까. 소녀는 단지 그런 각성의 계기가 되기 위해 소모적으로 사용되는 것일까. 
 
조가 찾아간 저택에서 그가 목격하는 풍경과 그의 반응이 그런 우려의 답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이미 목이 그어져 죽어있는 남자의 모습이다. 어린 소녀를 구하고자 했으나 그녀는 이미 손에 피를 묻혔고, 조가 할 일은, 그러니까 목적은 사라졌다. 그는 의미를 구할 수도, 영웅이 될 수도 없다. 그는 “나는 약해”라는 말을 반복하며 어린애처럼 오열한다. 죽음도 삶도 잃은 남자가 영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무엇일까. 
 
에바가 ‘이유 없음’을 들었을 때처럼(<케빈에 대하여>) 영화가 별안간 끝나지도 않는다. 이때 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니나의 손길이 그를 다시 목적 없는 삶으로 불러들인다. 세계의 폭력을 두 눈에 담고 스스로도 죽음과 깊이 연루돼버린 소녀가 이 영화의 시간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에 두 사람은 함께 오른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이 잠시 들른 카페테리아에서 조는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 그리고 꿈이라도 꾼 듯이 다시 일어나 니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죽음과 삶이 뒤엉키고 그 경계가 불분명한 린 램지의 세계에서, 한 번은 죽음 쪽으로 다시 한번은 삶 쪽으로 가보려고 했던 조는 그 두 방향 모두가 아닌 곳으로,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램지의 영화에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죽음의 의미도 삶의 목적도 찾지 않은 채 그냥 지속되는 것이리라.  


글·손시내
영화평론가.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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