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의도적이든 아니든) 무모한 전략적 계획(아프간 전쟁 존속, 이란 제재 강화)을 강력한 상징(처벌받아 마땅한 신체 훼손의 만행, 저주받기 충분한 반정부 인사의 처형)으로 포장함으로써, 이 사진들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의식을 파고드는 대신 생각을 강요할 위험은 없는가? 상징의 힘이 강할수록 아프간전 자체에 대한 논쟁은 약화된다. 이성의 힘으로 차단해야 할 무엇인가를 감정이 막아내지 못하는 탓이다. <타임>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면’이라는 표제를 붙여, 아이샤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잡지가 발행되기 며칠 전에는 위키리크스(Wikileaks·정부나 기업의 불법적인 행동을 익명으로 폭로할 수 있는 사이트-역자)가 7만7천 쪽 분량의 문건을 통해 이 서구 전쟁의 정신적·정치적·군사적 실패를 폭로했다. 하지만 하나의 이미지가 던지는 충격파는 수천 페이지의 연구·분석보다 빠르다. 이성의 빛을 상실한 사진이 가진 힘은 실로 놀랍다.
사형제를 지지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소중한 자녀의 죽음, 끔찍한 살인을 이유로 사형제의 정당성을 비호해왔다. 감시카메라에서 마약 복용 검사의 일반화, 감형 없는 징역형,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자유’를 침해하는 갖가지 정책이 통과됐다. 그 가운데는 충격적인 사진, 이 제도들만 있었더라도 방지할 수 있었을 끔찍한 범죄를 담은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분명 ‘상징’은 정의로운 전쟁(우리는 게르니카나 아부그라이브에서의 일도 정의롭다고 얘기하지 않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상징에만 기댄 여론 선동은 언젠가 희생자 목록이 바닥나기라도 하면 금세 역풍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난다면’ 정말 신체 훼손 같은 만행이 끊이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도 딱히 이를 막아낼 도리는 없지 않았던가. 탈레반에도 서구의 미사일 폭격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거나 신체가 절단된 민간인의 사진은 무수히 많다. 언젠가 <타임>에 이 사진 중 하나가 실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도 잡지 표지를 장식할까? 그렇다면 어떤 신화가 쓰이는 걸까?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아이샤를 만난 어느 미국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사실은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벌하기 위해 아이샤의 얼굴을 훼손하고 마을 대표로부터 사후 승인을 받은 것은 이 여성의 시아버지다. 앤 존슨, ‘아프간 여성은 이미 버림받았다’, <네이션>, 2010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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