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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과 파업권의 하찮음
머리카락과 파업권의 하찮음
  • 안영춘/편집장
  • 승인 2010.09.03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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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르 디플로’ 읽기]

여성들이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자르면 애국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가발이 수출에 ‘기여’한다는 계몽이 지배했던 것이다. 한국 수출지상주의 신화의 한 삽화다. 신화는 지금도 계속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하면, 계산기를 어떻게 돌렸는지 몰라도, 수출 차질액이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노동자의 기본권은 여성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늘 하찮고 위태롭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고용을 통해서만 구현된다. 한국의 노동부가 올해 고용노동부로 개명한 것을 국가의 고용창출 의지를 고양한 것이라고 보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의지도 구조의 자식이다. ‘고용노동부’라는 이름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구성 조건을 ‘노동부’보다 덜 에둘러 지시한다. 머잖아 ‘노동’이라는 쓸데없는 충수돌기도 떨어져나가고 ‘고용’만 남을 것이다.

노동은 고용의 깔때기를 거쳐 사후적 임금을 받는 반면, 자본은 유가증권으로 영리재산권을 가불해간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는 이 비대칭에 주목한다. 사실 노동자에게 할당되는 총급여에는 사회분담금이 있다. 프랑스 총급여의 40%를 차지하는 사회분담금은 퇴직연금의 재원이다. 고용의 외부에서 분담금이 충당되는 오랜 체계를 인정한다면, 자본에 공제되는 영리재산권도 분담금으로 돌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10~11면).

이름하여 ‘경제분담금’이 제도화하면 퇴직연금 등의 재원이 풍부해질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부가가치 분배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결정적 방식으로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가가치를 선취하는 쪽은 반드시 자본이어야 하는가. 노동이 고용을 통해서만 구현된다면 어떤 노동이든 고용으로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국가의 고용창출 부담도 일거에 해결될 텐데.

책상 서랍에서 꺼내기만 하면 될 것 같은 이런 기획은, 그러나 언제나 유보 상태다. 그 서랍의 주인이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계급간의 이해는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 독일의 노동자 임금은 극도로 억제되고 빈부 격차는 벌어진다(12면). 노동자의 몫을 자본가가 가져가는 일이 일국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임금 억제를 기반으로 펼치는 독일의 수출 드라이브는 유럽연합 다른 국가들의 경제를 위협한다.

물론 노동자들이 나서서 서랍 속의 기획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정상화’되도록 무주택자들이 여론과 대의민주주의 장치를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사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하우스 푸어’ 담론이 토건족과 투기꾼의 이해에 전용되는 실태를 <르 디플로> 한국판이 갈파했다(28~29면). 집값 하락은 무주택자에게는 당연히 축복이고, 주택 보유자의 대다수에게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며, 한국 경제의 체질도 크게 강화될 것이다.

대다수 주류 언론이 최근 이명박 정부의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해제를 구세주처럼 떠받드는 현실에서 여론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4대강 파괴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문화방송 <PD수첩>은 귀하다. 별반 새로울 게 없는 내용에 권력이 경기에 가까운 공포를 일으키는 이유를 <르 디플로> 한국판이 ‘방송의 장치성’에 관한 문화이론으로 분석해봤다(31면).

그러나 <PD수첩> 하나로 충분하지는 않다. 눈 밝은 독자라면 집값 하락 문제에 대해 <PD수첩>과 <르 디플로>의 접근이 다른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르 디플로>는 대안적이되 작은 독립 매체다. <PD수첩>에는 지속성과 분발이, <르 디플로>에는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글·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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