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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화려한 연출, 빈약한 공감-영화<PMC:더 벙커>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화려한 연출, 빈약한 공감-영화<PMC:더 벙커>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8.12.31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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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PMC:더 벙커>

김병우 감독의 <PMC: 더 벙커>에서 캡틴 에이헵(하정우)은 남과 북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총쏘고 명령을 내리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그의 모든 행동들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마도 그런 그의 모습과 무장한 팀원들 그리고 근 미래의 남북관계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일이란 마치 반전 없는 직쏘의 폐쇄공간의 함정을 보는 것처럼 맥이 빠진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만 김병우의 이번 영화는 카메라와 공간의 만남을 현명하게 조율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분명 그는 이 영화에서 남과 북을 사이에 두고 거기에서 또 다른 복잡한 관계를 창조해내고는 우리를 철저하게 관찰자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관찰자의 즐거움이란 사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진 인물의 고군분투를 보며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좋아하는 데서 오는 것인데 김병우가 만들어 놓은 관찰자의 즐거움 안에는 무조건 좋아할 수만은 없는 어떤 허탈함이 숨어있다. 이러한 상황을 관찰자의 뒤에서 더 떨어져 지켜보면 ‘승리한 적군’과 ‘참패한 아군’의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그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적군의 편도 아군의 편도 아닌 무능한 관찰자가 되어 두 편 중 하나를 택하기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애매한 상황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나이지만 영화<PMC: 더 벙커>에서는 이 애매한 상황이 그다지 좋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는 애매함이 좋게 작용하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첫째로 이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를 꽤 복잡하게 만들고자 했던 속셈을 너무 쉽게 들켜버리고 만다. 둘째로 반미영화가 아니고 반공영화도 아님에도 이 영화는 반미/반공영화가 아니라는 논리를 누락하고 만다. 예컨대 미국의 조작으로 서울 한복판에 스커드 미사일이 날아들다가 요격되는 건 그렇다 쳐도 배신하는 마커스(케빈 서지 듀랜드)는 미국인이고 ‘킹’의 목숨과 맞바꾸는 로건(스펜서 다니엘스) 역시 미국인이지만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에이햅과 윤정의(이선균)라는 사실은 어딘가 어설프다. 오히려 이것은 남북의 공조관계를 미화하기 위해 미국의 무언가를 소모해 버리는 식으로 읽힐 뿐이다. 에이햅의 다리가 의족이고 윤지의가 의외로 정의로운 인물임이 드러나면서부터는 더욱 노골적으로 다른 팀원들을 너무 쉽게 소모해 버린다.

 

에이햅이 ‘킹’을 살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공교롭게도 마침 윤지의의 정의로운 모습(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동료의 생명을 살리려 노력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윤지의를 동조자로 쉽게 여겨버린다. 이후 영화 중후반에 이르면 에이헵의 이 믿음은 점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그 위력은 두 가지 조건에서, 즉 공조와 협공이라는 조건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윤지의의 정의로운 성품 덕분에 에이햅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 다시 말해 ‘킹’을 살려야 한다는 극적인 그 순간을 위해 이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는 뜻이다. ‘킹’이 심정지를 일으킬 때(공조), 그리고 벙커를 공격해오는 또 다른 미국의 공격을 ‘킹’을 위해 막아야 할 때(협공) 에이햅에게는 항상 윤정의가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 목적을 자연스럽게 공유한다. 여기서부터 에이햅은 윤정의를 동조자가 아니라 동족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바로 이 부분이 앞서 말 했던 “단순한 이야기를 꽤 복잡하게 만들고자 했던 속셈”을 너무 쉽게 들켜버리고 마는 지점이 된다. 게다가 역설적이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구해내는 순간이 바로 핵이 폭발하는 순간이 돼버린다.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에이햅은 자신을 위해서 했던 일들이 국가, 아니 세계를 위해서 한 일이 되고 에이햅과 윤정의는 서로에게 공조와 협공을 이끌어내는 매개자 역할을 자처한 꼴이 된다. 그렇게 승자의 에이햅은 참패자의 윤정의를 만난 덕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또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룬다. 요컨대 이 영화는 FPS 게임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시니컬한 어른 동화에 가깝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너는 나를 구하고 나는 너를 구했더니 세상은 종말을 맞았다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서일까? 이 영화는 생각보다 시시한 것들의 외양을 재료로 삼아 그 의미와 강도를 수십 배 부풀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현란한 카메라 워크는 이야기와의 동조관계를 따지기보다 그저 감독의 기량의 과시일 수 있어 보인다. 감각적인 게임식으로 표현하려 지나치게 몰두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상과 음성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이 아니라 서로 돕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정도이다. 윤정의가 다급하게 에이햅에게 ‘킹’을 살리기 위해 응급조치를 지시하는 장면에서는 한국관객들 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임에도 에이햅은 신기하리마치 척척 알아서 잘해내니 말이다.

 

그것은 그저 대화의 구조에만 집중하는 단편적 편집들의 나열일 뿐임을 들켜버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남은 두 번째 비판, 반미/반공영화가 아님에도 이 영화는 반미/반공영화가 아니라는 논리가 누락돼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영화 속 서사구조는 공간의 재현과 에이햅이 처한 상황 묘사에는 적극적이지만 에이햅과 윤정의의 관계 설정은 단순한 합의, 이를 테면 같은 동포라는 식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논리 결여는 설명된다. ‘우리가 남이가?’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일종의 단순한 이야기를 거대 담론에 녹여 내면서 겪게 되는 괴리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봉합했는가이다.

물론 이 영화는 김병수 감독의 특기를 원 없이 발휘한 영화인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그럼에도 이 화려한 영화의 만듦새에서 내가 이상하리마치 공감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생각해보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내린 나의 결론. 어쩌면 우린 아직 남인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20년 이후의 어느 시기, 다시 말해 우리가 더 이상 남인 채로 남아있지 않은 때에 이 영화를 또 보게 된다면 그 때는 분명 지금과는 다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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