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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달거나 비릿한 보통의 주사(酒邪) <가장 보통의 연애>
[영화평] 달거나 비릿한 보통의 주사(酒邪) <가장 보통의 연애>
  • 최재훈(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3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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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단어가 통용되면서, 원래의 의미와 느낌이 퇴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① 가을철의 잔잔하고 맑은 물결, ② 사모(思慕)의 정을 나타내는 은근(慇懃)한 눈짓이라는 뜻을 가진 ‘추파(秋波)’라는 단어 또한 그렇다. 단어의 원래 의미는 은은하고 설레는 느낌이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이 단어의 느낌은 좀 더 즉물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이 강하다. <가장 보통의 연애>는 서정적인 원래의 의미를 숨겨두지 않은 영화다. 세속적인 이해, 딱 그만큼의 추파를 주고받는 남녀 사이에 오가는 마음만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는 정서는 제법 훈훈하다. 지긋지긋하지만 끝내 곁을 주게 되는 오랜 친구 같다. 구질구질하기 때문에 더 공감이 되는 영화 속 인물들이 바로 현실의 나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끝났을 때, 끈끈하고 달콤한 기억으로 남는 로맨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현실의 로맨스는 현실의 비루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라기보다, 사람의 사랑이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구질구질함 때문이다. 그래서 연애는 종종 그 민낯을 드러내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는 지금 막 사랑을 끝낸 두 남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이 처한 이별의 끝은 비비크림조차 바르지 못한, 속칭 ‘쌩얼’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늘 연애의 문제는 한 사람의 사랑이 끝난다고, 상대방의 사랑도 함께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에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계속 밀어내고, 다른 누군가는 계속 치근덕대게 된다.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치졸하게 서로를 괴롭히면서도 서로의 빈자리는 왠지 다음을 위해 비워둬야 할 것 같다.

이제 막 중소 광고회사로 이직한 선영(공효진)은 막 바람난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태다. 새 직장에서 만난 팀장 재훈(김래원) 역시 청첩장까지 돌린 애인과 파혼한 상태다. 그는 이별을 믿지 않고 계속 되돌리려 하고,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린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어떤 기대도 욕망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얽히게 된다. 가장 부끄러운 민낯을 보여주며 시작한 그들의 관계는 연민을 넘어선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그 혹은 그녀에게 끌리는 각자의 마음에는 확신이 없다. 그들이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은 술에 취한(혹은 취한 척하는) 순간이다. 모호한 추파를 던지면서 그들은 점점 가까워진다. 술의 힘을 빌려 지질하게 구는 재훈과 세상 쿨한 척하지만 늘 상처받는 선영의 마음이 서로에게 와닿기 때문이다. 

김한결 감독은 각자의 사랑을 끝내고, 함께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의 공간을 취기 오른 술자리와 흔히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로 가득한 사무실로 한정 지으면서 그들의 사랑을 천상의 것이 아닌, 땅에 가까운 낮은 곳으로 계속 끌어내린다. 사랑의 밀어가 끝난 곳에는 쌍욕이 오가고,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관계는 끊어버리거나 극복해야 할 지긋지긋한 현실이 된다. 그렇다고 쓴 이야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막 시작하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단맛이 슬쩍 녹아있긴 하다. 하지만 그 단맛은 소주에서 느끼는 단맛처럼 그 맛을 알아야만 달다고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다. 다 겪어서 사랑도 연애도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사이로 일상적인 대화와 일상적인 만남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김한결 감독은 평범한 이들을 평범한 세상 속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의 가장 큰 장점은, 노골적인 대사와 사람들이 보여주는 치졸한 관계에 있다. 치사하고 보잘것없지만 가장 진담에 가깝기 때문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연애의 긴장감보다는 한잔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를 원하는, 청년도 중년도 아닌 사람들이 흔들리는 순간을 담아내지만, 거짓말과 비밀이 없는 관계에는 다행히 궁상도 없다. 솜사탕처럼 서로에게 녹아들 것 같은 사랑의 시작과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별의 사이에, 사람들의 관계는 속물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따뜻한 정서 때문인지 마치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것 같은 무안함이 아니라 ‘(나만이 아니라) 다들 저러고 사는구나’하는 보편적 감정의 위안을 준다.

살짝 입장을 바꿔 인물들을 보면, <가장 보통의 연애>가 보여주는 보통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재훈의 옛 애인 수정(손여은), 그리고 선영과 막 헤어진 동화(지일주)는 바람 좀 피웠다고 이별을 택하는 선영과 재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사과를 하면 상대가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지질하지만 그 나름의 입장이 있다.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나쁜 것들로 만들지 않고 그냥 구질구질하고 나쁜 기억을 주는 우리의 옛 애인처럼 그리는 방식은 주인공의 감정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가장 보통의 연애>는 헤어진 옛 애인들을 끔찍한 악역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한 번은 봤을 법한 캐릭터들도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현실감을 준다. 김래원의 연기도 좋지만, 이 캐릭터 영화의 장점은 공효진이라는 배우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면이 있다. 툭툭 던지듯 자연스러운 연기는 무심한 듯 혈관처럼 세심하게 관객들의 마음으로 파고든다. 

그리워지는 기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쓸쓸하다. 나란히 걷지 못하는 평행선의 이별에서 살짝 손을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 속에서 여전히 쓸쓸한 이야기가 된다. 대부분 우리의 연애는 늘 앞서가거나 뒤에서 따라가거나 혹은 스쳐 갈 뿐, 나란히 걷지 못했던 것 같다. <가장 보통의 연애>는 실연 후,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를 품는다. 그 속에 지긋지긋하지만 끝내 구심점이 돼 그 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이야기는 오히려 관객들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 상대방의 따뜻한 심장이 아니라, 계속 되짚어가면서 지워야 하는 나의 기억이라는 점은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한 공감과 함께 또 위안이 되기도 한다. 

 

김한결 감독은 목소리 높여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않지만, 영화 속에 은근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그것을 극복하는 선영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별을 극복하는 남자와 여자의 다른 시선, 다른 방법을 통해 이 시선의 차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각각 사람이 상처를 극복해 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 보려는 것처럼 보인다. 선영은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재훈은 살기 위해 매일 자신을 괴롭힌다. 그래서 재훈에게 선영의 일상성은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것처럼 보이고, 선영에게 재훈의 미련은 서운함으로 남는다. 하지만 선영과 재훈은 각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스스로 외면했던 헤어진 옛 애인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이해된 마음은 새로운 마음을 여는 문고리가 된다.

아마도 극장을 나선 당신의 곁에는 김래원처럼 멋지거나, 공효진처럼 예쁘지 않은 연인들이 서 있을 것이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지긋지긋한 싸움 끝에 헤어진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여전히 지겹지만, 그 만남을 지푸라기처럼 잡고 있는 사람이든, 설렘으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이든 지금, 여기 혹은 그때, 거기에서 당신의 손을 꼭 잡아줬던 상대방의 마음과 맞잡은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연애는 계속돼야 마땅하다. 소주처럼 비릿하다고 느끼거나 소주처럼 달큰하다고 느끼거나… 연애는 그런 것이다. 가장 보통의 술처럼, 가장 보통스럽게. 

 

 

* 사진 출처: 다음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2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텐아시아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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