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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이 승리하는” 판타지의 현실성
“선한 사람이 승리하는” 판타지의 현실성
  • 이서라 l 미국 네바다주립대 방문연구원
  • 승인 2020.04.2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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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정국은 한국사회의 정치문법을 어떻게 바꿨는가? 총선에서 여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은 데는 감염병에 대한 방역의 성과가 일정 부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적어도 선거에서 과거의 낡은 정치와는 결별한 것처럼 보인다. 이념, 지역주의에 기댄 호소, 네거티브 공세, 언론의 왜곡·편향 보도 등등 과거에 표심을 흔들었던 선거 막판의 요인들이 이번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2020년 봄, 한국사회는 국제질서의 판도가 바뀌는 국면전환의 시기와 맞물려 절묘하게도 “새로운 정치, 새로운 대한민국의 재건”을 고민했던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와 주인공 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을 소환한다. <60일, 지정생존자>는 하루아침에 “깡그리 없어져버린” 정치판에서 국가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국가 지도자의 성장과정을 그린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대통령을 포함한 국무총리, 국회의장, 국무위원 등이 한날 한시에 사망하고 테러에서 살아남은 학자 출신의 장관이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돼 60일간 대통령으로서의 권한과 직무를 위임받는다. 

현재 우리사회는 테러가 아닌 바이러스로 구태정치가 무너진 형국이지만,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여전히 산적해 있다. 이상적이면서 실현 가능한 민주정치 구현에 대해 <60일, 지정생존자>는 생각해볼 만한 몇몇 지점들을 제안한다. 드라마가 이 시국에 소환된 이유이기도 하다. <60일, 지정생존자>는 “정치판은 다 썩었다”라는 정치혐오자들의 전형적인 메시지를 지양하고, 한국 정치사 안에서 벌어지는 이슈와 갈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 한국에 실재하는 정치 지형을 담아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정치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그려낸다.

 

민주주의적 통치방식을 소환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영화 <60일, 지정생존자>

<60일, 지정생존자> 주인공 박무진은 사회의 규칙과 질서를 뒤집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인종·장애·국가·출신·민족·종교 그리고 사상에 있어 차별을 찬성하고, 평등을 반대하는 이기적인 족속”들이 사는 세상과 “두려움과 공포로 대중을 복종하게 만드는” 정치공학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그 질서를 뒤집고자 고군분투한다. “좋은 사람이 만드는 좋은 세상이 가능함”을 꿈꾸는 설정은 이미 시스템으로서 정치 문법을 위반하는 판타지다.

드라마는 정치 리셋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한다. 민주주의자였던 전임대통령의 민주적 통치방식에 대해 ‘이 나라의 정치문법에 맞았는지?’ 물으며, 권한대행이 총격을 당하면서 생긴 짧은 공석기간 동안 벌어진 국가위기 상황을 예의주시한다. 선한 정치가, 또 좋은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왜 꼭 와야 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테러의 내부 공모자로 밝혀진 전임대통령의 비서실장(한주승)은 ‘좋은 대통령이 되고자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지도자’의 편에 서서 테러의 이유를 밝힌다.

 

“이 나라는 양진만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없는 나라니까요. 성급하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기다리는 법을 모르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자 양진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지도자였습니다. 양 대통령의 임기 내내 처참한 지지율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  국민들에게 어울리는 통치 방식을 쓰기로 한 겁니다. 인간들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두려움과 공포니까. 결국 대중은 자기 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자를 두려워하고 복종하기 마련입니다. 지난 실패 속에 얻은 내 교훈입니다.”

 

그는 좋은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없는 나라, 혹은 국민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테러를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민주적인 통치철학을 구현하려 했던 대통령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 사회 자체를 한꺼번에 ‘날리는’ 리셋으로 그 한계를 돌파하려 한 것이다. 선한 대통령의 선한 방법은 이 나라 국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통치방식이며, 이들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민주주의가 아닌) 두려움과 공포임을 알리고, 이런 속성을 암암리에 이용하는 현재 정치계의 민낯을 폭로한 것이다. <60일, 지정생존자>가 민주주의적 통치방식을 소환하는 방식은 이처럼 일반적인 드라마와 결을 달리하며, 그 책임을 국민에게도 지웠다.

전임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따라 좁은 길, 선한 길을 가려는 박무진 권한대행에게 전 비서실장은 “결국 당신도 양진만 대통령처럼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박무진은 이에 대해 “양 대통령님은 실패하지 않았고, 나 또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며 “시행착오는 겪게 되겠지만, 그 모든 과정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고 응수한다. 

주인공 박무진은 현실 정치인들의 복마전 같은 정치 공세 속에서 ‘정직과 신뢰’에 기반한, 그러나 정치공학적으로 승산 없는 선택들을 해 나간다. 차기 대권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되는 ‘지지율 떨어지는 선택’이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비서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행동에 옮긴다. 장관직에서 경질될 뻔한 사실을 부인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사실을 인정한다거나 그 어느 정권에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 한다거나 탈북자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을 멈추기 위해 무리하게 한주승 비서실장을 경질하면서까지 대통령령을 발령한 경우들이 그렇다.

드라마는 좋은 대통령이 되고자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지도자의 ‘정치적 희생’이 남긴 마음의 빚을 소환한다. “국민들은 누구에게 표를 던지는가?”하는 의문을 품고 이를 정치공학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한 의원에게서 스카웃 제의를 받은 비서실의 차영진 선임 행정관의 답변이 그렇다. “정치공학에는 만능 키가 하나 있습니다. 희생. 지지자들에게 마음의 빚을 남기거든요. 우리라도 저 바보에게 표를 던져야겠다 싶어지니깐 꽤 수익률이 높은 투자죠… 정치적 희생 한번 없이 양지바른 길들만 걸어오신 의원님께서는 정치공학적으로 승산이 없으세요.” 드라마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 승리하는’ 바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 동화 같은 세상은 여기에 없어” 

그렇지만.…

드라마는 “동화 같은 세상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우리가 다시 설계해야 할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위기상황들을 ‘정직함’으로 정면돌파하는 박무진에게서 ‘좋은 사람이 만드는 새로운 정치’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낀 비서진은 그가 차기 대권에 도전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양진만 대통령님이 꿈꾸던 새로운 정치, 새로운 대한민국을 다시 꿈꾸는 게 박 대행님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나?”하는 기대감을 내비치자 오랜 기간 현실정치의 벽을 경험한 비서실장은 일침을 놓는다. “내가 이 나이에 다시 그런 꿈을 가져야겠나? 좋은 사람이 만드는 좋은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 끝도 없는 희망고문에 내 전부를 걸며 일희일비 해야겠어? 그런 동화 같은 세상은 여기에는 없다고 다 알아버린 내가? 자네 참 잔인하군.”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들로부터, 기존질서로부터 일시적인 해방을 경험하도록 박무진이라는 판타지적 인물을 통해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 문예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이를 ‘카니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카니발의 세계에선 모든 위계질서에 따른 계급, 특권, 규범, 금지가 유예된다. 양진만 대통령이 꿈꾸던 새로운 대한민국은 공식세계에서는 그저 동화같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카니발의 세계에서는 실현 가능한 세상이다.

좋은 사람이 승리하는 판타지가 텍스트 밖 현실사회에서도 실현 가능한 사건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와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외신의 주목이 그런 기대를 갖게 한다. 필자는 개인적인 일정으로 잠시 해외 체류중이다. 아시아 어느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 ‘South Korea’의 국격과 위상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몸소 실감한다. 혹자는 “늘 부러워했던 선진국들이 ‘나머지’가 되고 한국이 최고의 모델이 되는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국제질서의 애처로운 종속변수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는 이것이라고 우리가 주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묻는다. 

코로나19로 기존과는 다른 국제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국내에 산적해 있는 복합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데 좀 더 전환적이고 사회통합적인 해결책이 모색되길 기대해본다.  

 

 

글·이서라

미국 네바다주립대 방문연구원. 대중문화콘텐츠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특정 콘텐츠 현상이 부상하는 사회적 맥락에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복고 콘텐츠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그 역설적 현실 반영성: 미하일 바흐친의 ‘라블레론’을 적용하여>, 신나게 작업한 논문으로 <‘응답하라 1994’는 어떻게 응답되었는가?: 수용자의 경험적 해석과 정서구조(Structures of Feeling)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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