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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0.10.05 18: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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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추미애, 양정숙, 윤미향, 이상직 등의 뉴스에 밀려 국민의 눈에 들어오진 않았으나 국내 4대 그룹의 오너들이 지난 9월 초, “전격 회동한 자리에서 대기업 목소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한 미국 헤리티지재단 같은 싱크탱크 설립을 논의했다”(1)는 한 인터넷 언론의 짤막한 소식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목적이 은밀하면서도 대단히 정치적일 것이라는 예감을 시사한다. 

이미 대기업들이 저마다 산하에 연구소를 두고 있고, 수많은 경제학 박사들과 경제관료 출신, 경제기자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마당에 또 무엇이 부족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급한 사태 속에 굳이 만나 미국식 헤리티지의 설립을 논의했을까?(보도에 의하면 이들의 모임 직전에 롯데그룹을 포함한 5대 그룹의 사장들이 만나 헤리티지 모델을 먼저 논의했다고 한다). 최근 ‘공정경쟁 3법’의 국회 통과 강행움직임과 관련, 이들 기업이 각종 정책의 기획, 입안, 시행과정에서 소외돼 자신들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내야 할 필요성을 가진 것일까? 

 

 

유기적 지식인들을 영입하는 재벌의 심상찮은 포석

한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보수성향의 그룹 총수들이 임기가 절반도 남지 않은 문재인 정권의 후반기에 공동의 싱크탱크 설립을 논의한 것은 그냥 지나칠 정도의 가벼운 뉴스로 보이지 않는다. 그룹 오너 모임에 깊숙이 아는 한 재계 관계자가 “한국형 헤리티지재단이 무조건 대기업 입장만 전달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경제 현안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정책 제안 기능을 중립적으로 가져가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점에서 이미 앞으로 전개될 정치적 지향점이 감지된다.    

 이들 그룹의 오너들이 지향하는 보수주의 성향의 헤리티지재단은 어떤 곳인가? 쿠어스 맥주회사의 오너인 조지프 쿠어스의 재정지원 아래 폴 웨이리치, 에드윈 풀너 등이 중심이 돼 1973년 출범한 이 재단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 작은 정부, 국방의 강화,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 등을 강조하며 미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헤리티지 재단이 명성을 얻은 것은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0년대 이후다. 레이건 행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캄보디아, 니카라과 등의 저항세력을 지원했고 소련과 동구의 반체제 인사를 도왔으며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전략방위구상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헤리티지재단의 제언에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레이건 정부가 세금감축과 정부지출의 삭감을 주장한 것도 이 재단의 조언을 받아서였다. 헤리티지 재단은 연 300여 종의 정책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 상하 의원과 보좌관, 행정부의 정책 입안자, 주요 언론 등에 배포한다. 또 정부 규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나타내는 세계경제 자유지수도 발표하고 있다. 헤리티지재단은 공화당 정권이 레이건을 비롯, 조지 부시1세, 조지 부시 2세를 거쳐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집권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주요 그룹의 오너들이 보수당 집권의 청사진을 만든 헤리티지재단과 흡사한 싱크탱크 설립을 목표로 삼았다면, 이는 최근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퇴임하면서 강조한 ‘민주당 20년 집권비전’의 발표시기와 맞물려 묘한 대척점을 이룬다. 이 전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제도정치권만 보수가 약할 뿐, 모든 영역에서 보수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20년 집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2) 또 “노조·시민사회·언론이 취약해서, 정당이 밀려나면 다 밀려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 9단자’로 불리는 그가 노조와 시민사회·언론 관계에 대한 집권당의 취약성을 언급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노조와 관계를 어떻게 호전시키고, 시민사회 및 언론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말하진 않았으나, 최근 들어 이들 세력의 심상찮은 흐름을 감지한 듯 보인다. 그의 발언 속내를 들여다보면 민주당이 노조·시민사회·언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당의 장악력이 떨어지면 이들 세력의 공격을 받아 추락할 것을 우려하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죽은 지 80여 년이 흘렀으나, 그의 지적대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처럼 권력을 쟁취한 집권세력과 권력 동반자를 잃은 보수 자본세력 간에 더 많은 설득과 동의를 얻기 위한 지적·정책적 차원의 헤게모니 다툼이 은밀하고 치열하다. 오랫동안 권위주의적 보수우익 정권의 충실한 동반자로서, 때론 ‘전략적 배반자’(정권교체기 때의 카멜레온식 변신을 보라!)로서 우리 사회를 굳건히 지배해온 자본세력은 경제단체와 연구소, 대학,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재탈환하려는 반면, 집권세력에서는 노조와 시민사회, 언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시민운동 활동가 대거 차출

문재인 정권이 집권 후반기로 넘어서면서 노조와 시민사회는 자신들이 권력에 이용당했다는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고, 문정권이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나름’ 진보언론들은 최근 들어 보수언론보다 더 매섭게 정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특히 청와대와 집권당이 자신들의 입맛에 딱 맞는 시민운동가와 언론인들을 무더기로 스카우트하며, ‘살아있는 권력’과 긴장의 고삐를 늦춰선 안되는 진보 진영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고, 뒤늦게나마 이에 위기감을 가진 이들 세력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발휘하는데서 기인한다. 오죽하면, 참여연대 활동가들이 대거 청와대와 정부에서 사회 경제 금융 관련 주요 요직에 차출되면서, ‘참여연대 카르텔’이라는 비판을 받아왔겠는가. 문제는 국민들이 시민단체와 언론의 순수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집권당이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다시 그람시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상부구조의 형성에 대해 강제력에 의한 과거의 물리적 지배방식과, 동의 혹은 합의에 기초한 현재의 설득방식으로 구별하고, 전자는 억압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반면에 후자는 헤게모니를 통해 이뤄진다고 봤다.(3)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지적· 도덕적인 우위를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헤게모니를 갖춘 세력이라고 해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를 보면, 지금까지의 헤게모니는 친일 세력과 군사정권 세력, 그리고 천문학적인 자본력을 갖춘 재벌과, 재벌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와 대학, 권력과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디어와 시민단체들이 독점해왔으나, 이들을 지적· 도덕적인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이들 진영에서는 막강한 자본과 권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논리와 철학에 부합하는 지식인들을 마음껏 동원하고, 때로는 이런 류의 지식인을 속성 양성한다. 그람시는 이처럼 자신의 고유 철학이 아닌, 타율에 의한 맞춤식 철학에 봉사하는 지식인을 이른바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칭했다. 

이들 유기적 지식인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진영에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상이한 사회집단들을 동질화해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블록’을 결집시킨다. 유기적 지식인들은 역사적 블록의 형성을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자신들이 속한 진영의 철학 및 이데올로기를 유기적으로 확산시키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유기적 지식인들의 헤게모니 획득전략은 견고하고 넓은 역사적 블록을 얼마나 많이 구축하고, 또 조직적으로 공들이는 진지전을 얼마나 튼실하게 구축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세력이 ‘양질’의 유기적 지식인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지에 따라 헤게모니의 승패가 갈라지는 셈이다. 

권력과 자본이 풍부한 집권진영과 재벌진영에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차고 넘치지만, 최저 생계비 수준의 급여를 주는 시민단체와 진보 정당에는 자원봉사자나 각별한 신념의 소유자만 남을 수밖에 없다.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연구소와 언론사, 대학, 심지어 ‘공익’을 내세운 사단법인, 재단법인을 소유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논리와 철학을 다듬고, 확산시킬 유기적 지식인들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국 최고의 기업인 삼성의 경우 인적 네트워크를 보면, 국무회의나 검찰회의, 법원장회의, 심지어 언론사 편집국 회의를 열 수 있을 정도로, 장관 출신이나 검사장, 법원장, 보도국장, 편집국장 출신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삼성과 직접 고용관계를 맺은 고위공직자 출신들의 상당수가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원, 공정위원회, 국세청 등 감독기구 출신이거나 검찰, 법원 등의 사법기구 출신이라는 점에서 기업의 인재영입 목적이 단순히 경영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참여적 지식인이 기교적 지식인으로 

최근 들어 유기적 지식인들을 확보하려는 기업들의 노력에는 좌우, 정파,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조차도 포섭한다. 자신들의 기업에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을 고액연봉의 사외이사에 앉히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신문사와 TV에 한때 자신들에게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른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고정출연자나 칼럼니스트로 초대한다. 진보진영의 지적 아이콘으로 군림해온 진중권 전 교수가 보수매체가 운영하는 종편에 출연하며 보수언론에 칼럼을 쓰기 시작하고, 이름처럼 ‘서민적으로’ 진보매체에 칼럼을 줄곧 써온 서민 교수가 역시 보수언론의 정체성을 격찬하며 보수언론의 입맛에 맞는 재담을 과시하고 있다. 진보매체에 실린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글로 단숨에 ‘칼럼계의 아이돌’로 급부상한 김영민 교수도 역시 보수매체에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진영을 넘나든 이들 지식인의 전환적 사고는, 물론 이들의 유연한 의지(意志)에 따른 것이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거대한 자본을 내세운 보수 우파 진영이 ‘적과의 동침’을 통해 자신들에게 결핍된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취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125년 전의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한 대로 부르주아 기업 또는 상인의 윤리의식으로 칼뱅주의의 현세적 금욕이 필요했다면, 현 자본주의의 울트라 부르주아에겐 금욕 대신 자신들의 탐욕을 희석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다채로운 지적인 스펙트럼,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MBC에서 사회자로 활동하며 삼성 등 재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손석희 앵커가 삼성이 출자했던 중앙일보의 자회사인 JTBC의 공동대표로 영입된 것은 아무리 손 앵커가 스스로 저널리즘 정신을 다짐한다고 해도 ‘울트라’ 부르주아 진영의 지배 네트워크를 좀 더 유연성 있게 만드는 ‘소임’을 말게 된 셈이다. 노무현 정권의 책사이자 강원도지사를 거쳐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아 여의도 무대에 선 이광재 의원이 삼성가의 사돈인 홍석현 전중앙일보 회장이 만든 싱크탱크 여시재 원장을 맡아 재벌 이념의 충실한 전파자가 된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촛불시민 혁명을 통해 졸지에 정권을 잃은 보수야당은 과거의 달콤한 꿀물을 끊은 데서 오는 단말마적 고통을 잊기 위해 광화문 태극기 집회와 여의도를 오가며 방황하고 있고, 별다른 준비 없이 권력을 쥔 집권세력은 어떻게 헤게모니를 발휘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대선을 2년 남짓 남겨두고 대권을 꿈꾸는 유력인사들이 ‘특보’라는 이름으로 언론계 인사들과 시민운동 활동가들을 하나둘 영입한다는 소식을 도처에서 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뭉개지고 탈난 헤게모니가 복원될 수 있을까?  

헤게모니는 맞춤식 용역 기술자로 전락한 유기적 지식인들을 중용한다고 발현되지 않는다. 집권당 유력인사들은 자신들의 입맛을 돋울 ‘특보’들을 고용하는 대신에, 보수언론과 일부 진보언론이 던져준 사이비 의제를 내던지고, 그보다는 자신들이 애초에 약속한 본질적인 의제에 집중해야 하며, 보수 야당 역시 포용력 있는 보수의 가치에 부합한 의제들을 내놓아야 한다. 정파를 초월해, 대다수의 국민이 기득권층을 재생산하는 교육제도, 자산격차를 무한 확대하는 부동산 제도, 지지부진한 검찰개혁, 출발도 못한 언론개혁, 기득권층 옹호센터가 된 일부 개신교단, 불법 승계에 올인해 온 재벌에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치가 정치답지 못할 때, 지식인들이 지식인답지 못할 때, 그 빈자리를 비집고 기업의 탐욕이 어느새 들어온다. 특히 늘 깨어있어야 할 지식인들이 보편적 가치의 규범아래, 사회의 발전과 역사적 진보를 위해 실천적 삶을 살기보다는 물적 이익을 앞세운 프로젝트에 자신들의 지식을 동원할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뤽 볼탄스키와 에브 시아펠로는 2005년 펴낸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참여적(Participatif) 지식인들을 기교적(Artistique) 지식인들로 전락시킨다고 지적했다. 술자리와 카페에서 재치 문답을 하고, 신문과 방송에서 자본의 입맛에 맞는 말과 글을 늘어놓는 이들이 현대 자본주의가 원하는 지식인상이라는 얘기다. 

10월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은 창간 12주년을 맞는다. 독자 여러분은 잘 아시겠지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지금껏 어느 정파에도 기울지 않고, 거대한 권력에 의한 확증된 사실의 이면을 뒤집어보고 또 다른 진실을 찾으려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파고 속에 첨예하게 대립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이해관계, 빈익빈부익부의 심화, 실업문제, 노동문제, 환경오염, 다문화사회의 도래, 소수자 인권문제 등 복잡다단한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일반 대중의 확신에 대한 갈망에 편승해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려는 국내 언론과 차별성을 보여 왔다. 

그 많던 지식인들이 각 정파나, 자본의 적절한 ‘쓰임’을 위해 ‘엄중한 공론의 장’을 떠날지라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예전처럼 묵직하고 본질적으로 핵심이 되는 주제를 들고서 독자들을 만날 것이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는 본질적 언론관을 잃지도, 잊지도 않고 말이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1) 이정혁, ‘이재용· 정의선· 최태원· 구광모, 한국형 헤리티지 설립논의’, <머니투데이> 9월23일. 
(2) ‘20년 집권’ 말한 까닭, 시사IN 제 679호, 2020.09.11. 
(3)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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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원 2020-10-15 22:16:49
균형감과 본질을 위한 목소리. 응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