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호 구매하기
[장윤미의 문화톡톡]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 1
[장윤미의 문화톡톡]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 1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1.01.04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 없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역사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 있다. 힘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어 주류 역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 말은 ‘유럽의 역사는 유럽인들이 만든 것이다’라는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인류학자 에릭.R.울프가 사용한 반어적 표현이다.

울프는 유럽 팽창의 역사는 주류 역사에 끌려 들어간 수많은 집단의 역사가 얽히고 맞물려 만들어진 역사임을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1400년부터 1948년 동안 유럽인들의 비유럽지역 이주 경로와 변천 과정을 연구한다. 그러면서 유럽발 이주민과 토착민과의 물리적 접촉과 소통, 그리고 이 접촉과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른바 비주류 문화는 결과적으로 유럽의 역사가 팽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증명한다. 울프는 이주민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해관계를 토대로 하는 물리적, 정치적 교류 관계가 토착민과 이주민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역사는 지금과 같은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밝힌다. 더불어 유럽인들이 유럽을 떠나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력으로 자본을 꼽는데 그 근거로 이주민의 동선과 자본의 흐름이 일치함을 내세운다.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한다는 뜻의 이주는 거주하는 공간을 바꾼다는 뜻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과거 태어나는 곳이 곧 죽는 곳이었던 과거 생존 습성을 생각해보면 이주/이주민에 대한 정의에는 개인적이라기보다 사회적/정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주의 목적과 명분은 분명하고 또 절실해야 했다. 최고의 권력자가 허락하지 않는 이주는 반역 행위나 마찬가지였고 이주를 도모했다가 실패하거나 후에 잡히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이주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토착민이나 기성 이민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나 집단에 소속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생김새와 생활방식, 가치관의 차이 등에서 비롯된 물리적/심리적 이질감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가도 공공 영역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침입자/더러움/질병(전염병)과 연결되어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괴물 또는 불결하여 격리/추방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런데 15세기 이후부터 이주와 이주민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활성화되면서 이주에 대한 프레임이 반역/저항/도주 대신 발견/욕망/개척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울프가 지적했던 바로 자본(축적)에 대한 인간의 본능과 이것의 가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관통하는 경제적, 정치적 원리인 동시에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이후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본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부자는 더 많이 돈을 모으기 위해,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자가 가진 조건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기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이 새로운 집단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주변과의 관계를 파악하고 재정립하려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자본가와 노동자, 이주민과 토착민, 그리고 먼저 도착하여 기반을 잡은 이주민과 이제 막 유입된 이주민 사이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매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울프는 이것을 권력 관계라고 불렀다. 이 권력 관계는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형성되는 여러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데 이것은 곧 ‘다른 집단들과 관련하여 자신이 어떤 지위를 얻게 되는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 관계란 물리적, 사회적 위치와 힘의 여부를 기반으로 형성된 결과물인 동시에 ‘누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는 이른바 ‘정신적 선행지식체계’를 잇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권력 관계에 따라 이주민은 자신이 (먼저) 가진 자원 중에서 어떤 것을 이용할 수 있는지, 또 어떤 자원을 획득해야 하는지 결정하거나 또는 그 위치가 결정된다. 예를 들면 자본이 부족하거나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정보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노동 이주민의 경우 하급 노동자를 자처하거나 자본가의 거래 대상인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토착민이나 다른 이주민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않은 자원을 확보할 경우 노동 이주가 목적이었던 이주자도 자본 축적이 가능한 것은 물론 이를 발판 삼아 주류 집단으로 편입되거나 그것에 대등한 집단을 새로 형성할 가능성도 높다.

이주를 결심하고 소속된 공동체에서 탈각한 개인은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그리고 권력관계 따라 그들의 행동과 사고의 외연은 넓어지기도 때로는 좁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것에 대해 순응하는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는 역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와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우리가 말하는 역사는 결국 수많이 많은 역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가 없었다면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 없는 사람들’의 선택과 이동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역사를 가지지 못한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 없는 조선의 여자들

 

이제 우리나라의 역사 없는 사람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개인적 이주나 국내 이주를 제외하고 최초의 공식 이주는 언제였고 그들은 누구였을까. 최초의 공식 이주단은 조선 고종 때 조직된 하와이 이민단으로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주도로 만들어졌다. 출발은 121명이었지만 경유지 일본에서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20명을 뺀 나머지 101명만이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질로 15명이 신체검사에 탈락하여 실제로 호놀룰루에 발을 디딘 사람은 86명이다) 이후 한인 이민 금지법이 시행된 1905년까지 3년 동안 약 7,400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떠났는데 당시 하와이 이주를 선택했던 사람들의 신분은 주로 백정, 군인, 거지, 홀아비 등등 조선에서 하층민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하와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했지만 1년 내내 따뜻해 추위로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열심히 일만 하면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며, 가난과 신분 차별로 설움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약속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문제였지만 조선에서 들었던 소문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이 좋아 노동자지 노예에 가까웠고 농장주와 십장의 폭력과 감시, 고강도의 노동과 형편없는 임금은 조선에서의 생활보다 절대 낫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의 의욕은 저하되었고 도박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 등 탈선이 계속되었다. 이들이 가정이라도 있었다면 가장의 책임감을 이유로 버텼겠지만, 가정을 가지고 있거나 앞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당시 이민단 중 여성의 비율은 전체 10%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낯선 나라 여자와의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한인노동자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자본가나 농장주들은 유럽인이나 미국인에 비해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 노동자들을 선호했는데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유럽인들에 비해 형편없는 임금에 불만을 느낀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거나 노동을 거부하는 일이 계속되자 농장 운영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 자본가와 농장주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결혼을 제안했다. 노동자들이 결혼 하고 가정을 꾸리면 탈선이나 이탈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자식을 낳으면 잠재적 노동력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자 자본가와 농장주들은 노동자들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 본토 법에 따라 이민자들의 결혼에는 제한 조건이 많았던 까닭에 같은 국가의 여자를 하와이로 데리고 오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사진신부’ 제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조선의 여자들은 하와이에 가면 지주의 아내가 될 수도 있으며, 원하는 만만큼 돈을 벌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말에 사진 신부를 선택했다. ‘사진신부’ 제도는 양질의 노동을 원하는 자본가, 물리적, 정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원하는 노동자, 그리고 돈과 자유를 원하는 여성, 이 세 집단이 욕망이 맞아떨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최초의 사진신부는 최사라라는 여성으로 당시 스물셋이었다. 그녀는 하와이 행을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예수쟁이라고 놀림 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하와이에는 빗자루로 돈을 쓸기 때문에 그걸로 친정을 돕기 위해서…”[1]

 

조선에서 태어난 이상 여자는 그 자체로 규제와 금기의 대상이다. 여자에게 선택은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행위이며, 좋은 여자란 남자에게 선택받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고 관리하며 인내하는 사람이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는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므로 기꺼이 견뎌야 하며, 가난과 부는 의지나 선택이 아닌 타고난 팔자에 포함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와이는 여자라는 이유로 참지 않아도 되는 곳, 하지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누구라도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곳, 팔자나 운명이 나의 삶을 좌지우지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사라를 비롯한 수많은 ‘사진신부’들은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첫 번째 좌절을 겪게 된다.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사진 속 말끔하고 부유한 남자가 아니라 흙투성이 옷을 입은 언제 씻었는지도 모를 검은 피부에 노동에 찌든 남자였다. 개중에는 아버지뻘 되는 백발의 늙은 남자도 있었다. 저 사람이 당신의 남편이라는 소리를 듣고서 기절하는 여자, 통곡하는 여자는 물론 기를 쓰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빚을 낸 여자들까지 있었다는 증언을 짐작해 보면 사진신부들이 상상했던 것과 현실은 얼마나 달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좌절에 비하면 첫 번째 좌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자신은 하와이로 시집온 조선의 여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편입된 이민 노동자라는 것, 동시에 유색인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인종 차별을 겪게 된다는 것. 특히 조선의 경우 ‘한민족’, ‘단일민족’과 같은 정치 사회적 이념 아래 연대를 지속‧유지했던 국가였던 만큼 민족/국가가 아닌 인종이라는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차별은 굉장히 낯선 방식의 차별이기도 했다.

 

그녀는 누구와 연대할 수 있을까

 

이방인들에게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나는 누구와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과 연대는 필연적이다. 게다가 나는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결정은 곧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와 연결되기에 그 대상을 누구로 선택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느냐는 개인의 삶의 방향과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와이의 별명은 인종 용광로라는 뜻의 melting pot이다.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주민인 까닭에(하와이 인종 비율은 백인(하올리) 34%, 일본계 32%, 필리핀계 16%, 중국계 5%라고 한다) 토착민과 이주민 출신이 다른 이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수직적이기보다 수평적인 경향이 이물감이나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울프가 지적한 토착민과 이주민, 이주민과 또 다른 이주민 간의 권력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필자는 이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조선(변방)/이민자/유색인/여자의 조건을 가진 한 개인이 하와이라는 낯선 땅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신부’ 이야기는 조선 이민자들이 낯선 땅에서 가족을 만들고 자식을 낳아 세대를 지속하며 동시에 사회적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한국의 이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주민, 유색인으로서의 특수성과 정체성 등 공적 스토리텔링은 물론 여성, 자유, 자아 찾기와 같은 사적 스토리텔링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금이의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과 앨런 브렌너트의 소설 <사진 신부 진이>는 ‘사진신부’라는 동일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바라보는 시각과 서술의 결이 매우 달라 비교할 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주자란 신분과 그 사회적 위치를 해석하는 데 있어 민족의 공간적/문화적 확장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이주민/이방인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그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은 민족이란 상상의 끈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 의식을 끌어낼 수도 내는 거대 서사로 이어질 수 있고, 반대로 한 개인이 새로운 사회에서 겪는 격렬한 혼란과 부침 그리고 그 안에서 재탄생하는 개인 서사가 될 수도 있다.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사진신부 진이>이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다음 회를 통해 이 두 소설을 비교해보고 사진신부를 풀어내는 방식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한다.

 

 

[1]이 증언은 1977년에 동아 방송 소속의 라철삼 기자가 제작한 육성 다큐 <아메리카의 한인들> 시리즈에 담겨 있다. 이 증언은 방송 내용 중에서 채록한 것이다. 방송은 https://www.youtube.com/watch?v=nfs8OlTlnzg를 통해 볼 수 있다.

 

글·장윤미(문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