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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고통 없는 구원은 없다, <인비저블 게스트>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고통 없는 구원은 없다, <인비저블 게스트>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2.20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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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가운데 크게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논란도 많이 있었던 작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의사 셰퍼드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살인사건의 범인이 화자(話者) 자신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셰퍼드의 서술에는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쫓아가게 된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에르퀼 푸아로 탐정이 셰퍼드에게 사건의 전모를 밝혀나갈 때, 범인의 정체는 점점 셰퍼드를 향하게 된다. 독자가 “설마?”라고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푸아로는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범인은) 다름 아닌…… 셰퍼드 선생님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추리소설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암묵적인 약속을 이용해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오리올 파울로 감독이 2017년에 연출한 <인비저블 게스트(넷플릭스의 방영 제목은 <세 번째 손님>)>는 크리스티의 이러한 아이디어를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패소한 적 없는 유능한 변호사 비르히니아 고드만이 촉망받는 기업 대표 아드리안 도리아를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아드리안이 처한 곤경이 드러난다. 그는 내연관계였던 사진작가 라우라 비달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드만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아드리안에게 설명할 때, 관객은 플래시백을 통해 그것을 보게 된다. 아드리안은 불륜을 폭로하겠다며 10만 유로를 요구하는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라우라와 함께 베야비스타 호텔에 갔는데,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기절했다 깨어났더니 지폐는 사방으로 흩뿌려져 있고 아우라는 죽은 상태다. 비명을 들은 투숙객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고, 아드리안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아드리안은 “누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호텔 방에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첫 번째 진술에서, 아드리안은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진범이 증발해버린 밀실 살인사건의 함정에 빠진 피해자로 자리매김한다. 아드리안은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라우라를 살해하려 했다면 현장에서 바로 체포될 수 있는 허술한 방법을 택할 리는 없으므로, 관객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독자처럼 그의 진술을 신뢰하게 된다.

 

아드리안은 라우라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다
아드리안은 라우라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다

고드만이 실종된 청년에 관한 신문 기사를 제시하며, 진실을 모두 말해야 도와줄 수 있다고 다그치자, 아드리안의 두 번째 진술이 펼쳐진다. 3개월 전, 아드리안은 라우라와 밀회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에 사슴을 피하려다 교통사고를 일으켰는데, 두 사람은 멀쩡한 반면 마주 오던 차의 운전자는 사망했다. 아드리안은 즉시 신고하려 했으나 라우라의 강권으로 단념하고, 그녀가 시키는 데로 사고 차를 운전자의 시신과 함께 호수에 빠트렸다. 두 번째 진술에서, 아드리안에게는 교통사고 은폐와 시신을 유기한 죄가 추가된다.

 

아드리안과 라우라는 밀회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낸다
아드리안과 라우라는 밀회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낸다

사망한 운전자의 이름은 다니엘, 실종된 청년이다. 다니엘의 부모인 토마스와 엘비라는 사라진 아들을 찾아 헤매다 몇 개의 실마리를 통해 라우라를 의심하게 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아드리안에게도 경찰이 찾아오지만, 유능한 사내 변호사 펠릭스가 솜씨 좋게 처리해버린다. 아드리안이 사업가로서 더욱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사건의 전모를 아는 듯한 누군가에게서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이러한 진술에서, 다니엘의 부모에게 살인 동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들이 아드리안을 협박하고 함정에 빠트린 범인이라는 추정이 타당해 보인다. 게다가 엘비라는 베야비스타 호텔에 근무하고 있다. 고드만은 토마스가 밀실 살인사건을 만들어낸 범인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그런 다음, 라우라 혼자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냈으며 다니엘의 차까지 은폐한 것으로 꾸미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되면 아드리안의 죄는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고드만이 라우라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다니엘의 차를 찾아야 한다고 하자, 아드리안은 시신의 부검을 막아야 한다면서 차를 수장하기 직전 다니엘이 살아있었다는 진술을 한다. 아드리안에게 살인죄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쯤 되면 아드리안이 실수와 오판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피해자라고 보기가 어려워진다. 그의 진술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고드만은 아드리안에게 진실을 말해야 도와줄 수 있다고 다그친다
고드만은 아드리안에게 진실을 말해야 도와줄 수 있다고 다그친다

아드리안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난 고드만은 또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사실은 아드리안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다. 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라우라가 다니엘의 부모에게 위자료를 주고 자수하자고 설득하자 격분해서 그녀를 살해했다. 아드리안이 이 시나리오를 긍정할 때, 그는 살인을 두 번이나 저지른 범죄자가 된다. 그러므로 영화 도입부의 텔레비전 뉴스에서 아드리안의 사진이 나올 때 창문에 반사된 모습이 함께 등장한 미장센, 그리고 이후에도 이와 같은 미장센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의 어두운 이면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아드리안의 아파트 현관문 앞 벽에 걸린, 아치형 회랑이 겹겹이 그려진 그림은 양파 같은 그의 정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무고한 희생자에서 악당으로 밝혀지는 과정에서의 반전이 다가 아니라, 마지막 반전이 아드리안과 관객의 허를 찌른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끝까지 숨기려 했던 진실까지 파헤친 고드만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하며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아드리안이 만난 고드만은 진짜 고드만이 아니라 고드만으로 변장한 다니엘의 엄마 엘비라이다. 다니엘의 부모는 경찰이 아드리안 회사의 막강한 권력에 휘둘려 수사를 허접하게 처리하자, 직접 해결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능력과 권력의 힘에 취해 세상을 우습게 보고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했던 아드리안은 죽은 자식의 행방도 모른 채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부모, 그래서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부모에게 완벽하게 패배한다.

영화는 고드만/엘비라가 등장해 뭔가 긴장한 태도로 아드리안의 아파트에 도착하는 장면을 무거운 느낌의 배경음악과 함께 길게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아드리안의 아파트 건너편 아파트에서 엘비라가 분장을 걷어내며 정체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의 시작이 아드리안이 아니라 고드만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또 이 장면과 함께 진짜 고드만이 아드리안의 아파트에 도착하는 장면이 교차 편집으로 연출되면서 극적 효과가 더욱 증폭된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아드리안은 자신의 아파트에 머무는데, 결국 그는 다니엘의 부모의 덫에 걸려 다시는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무고한 주인공이 음모에 빠지는 스릴러처럼 시작해, 악당이 피해자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으로 끝난다.

<인비저블 게스트>는 <자백>이라는 제목의 한국영화로 리메이크되어 2022년에 개봉했다(또 파울로 감독의 <더 바디>(2012)는 <사라진 밤>(2018)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가장 큰 흥행 요소가 반전의 아이디어에 있는 영화이므로, 각색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윤종석 감독은 원작을 따라가면서도 또 다른 반전을 만들어내는 전략을 선택했다. 만일 주인공(<인비저블 게스트>의 아드리안)의 부모 또는 아주 가까운 친인척을 ‘검사’로 설정했다면, 피해자의 부모가 진실을 밝혀내어 드디어 악인이 지옥으로 갈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공의 범죄를 증명하는 모든 것이 차례로 사라지는 반전, 더 나아가 피해자의 부모가 무고 또는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가는 충격적인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에 딱 맞는 리메이크가 되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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