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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으려면
정치개혁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으려면
  • 엄윤진 l 작가
  • 승인 2023.04.2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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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우정치의 미몽에서 깨어나기

총선이 앞으로 약 일 년 남았다. 그래서 국회는 선거구제와 연동형 비례제를 보완하려는 특위를 구성해 논의 중이다. 소선거구제니, 중대선거구제니, 병합형이니 연동형이니 말이 많다. 각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당에 가장 유리한 제도를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 자체를 지켜보면 주권자인 시민은 빠져 있고, ‘그들만’의 리그를 보는 듯하다. 국회의원이든 일반 시민이든 모두 대한민국의 주권자다. 주권자는 국가란 공동체의 여러 문제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니 시민 누구나 공동체의 살림인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참여해야 한다. 참정권 하면 먼저 투표권이 떠오른다.

하지만 투표권은 참정권 중 일부에 불과하다. 참정권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공동체의 규칙 제정에 참여할 권리다. 공동체의 규칙은 시 단위에서는 조례이고, 국가 단위에서는 입법권 즉, 법을 쓸 수 있는 권리다. 물론, 입법권은 그동안 국회의원들이 전유했다. 하지만 국회의원 300명만 입법권을 독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People’s rule; 일반 시민의 의한 지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에서 현행 대의 민주주의는 좋게 봐도 귀족제(Rule by the best)고, 나쁘게 보면 과두제(Rule by few; Oligarchy)다. 

귀족제의 정의대로 우리 국회의원이 정말 최고로 탁월한 사람인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아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소수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선거구제 논의나 연동형 비례제를 어떻게 개선하든 국회의원이나 기존 정당들만의 잔치에 관한 것이라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민이 결정권을 가진 주권자라는데, 정작 주권자인 시민에게 결정권이 주어지는 날은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국회의원 선거일,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일 정도다.

4년은 1,460일, 5년은 1,825일인데 이 많은 날들 중 주권(결정권)을 가지는 날은 고작 2일인 셈이다. 우리는 이런 제도를 학교와 언론을 통해 민주주의라 배웠다. 그래서 스스로를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회의 주인이 정녕 맞는가? 노예의 철학적 정의는 남이 정한 규칙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존재다. 반면 주인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스스로 지키는 자다. 그러면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 제도 아래 사는 우리는 주인인가, 노예인가?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반민주적인 인사를 축출하는 투표를 하는 시민들>, 연도 미상 - 허버트 M. 헤르겟(1885~1950).

유권자가 배제된 비례제와 선거구제 논의 

우리는 어려서 말을 배우며 소위 사회화를 겪는다. 이 사회화를 거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참으며 예전부터 있었던 여러 규칙을 그저 따른다. 이렇게 이미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며 성장하다 보니, 이런 습관을 내면화한다. 자유 민주주의하에서 자유가 보장된다는데, 실제로 우리는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왜일까? 우리 대부분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해 민간 회사나 공공기관의 직원이 된다. 우리가 속하게 되는 모든 집단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 이미 정해져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속한 집단의 규칙을 스스로 정한다는 인식 자체가 매우 낮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어떤 복지 혜택을 받을지를 선택할 권한도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행정부가 이런 문제에 관한 결정권을 가진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리고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행정부 관료와 그 수반인 대통령이 우리가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지 우리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안다며 그들 마음대로 다 정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모든 법률 제정에서도 우리는 대부분은 소외된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법률도, 내 이익에 반하는 법도 한 번 정해지면 따라야 한다. 국회의원 대부분은 소위 엄친아와 엄친딸이다. 이들의 경제적인 지위, 학문적 배경, 또 이들이 누리는 소위 상류층 문화는 다수 시민이 누리는 것과 다르다. 그런 데도 우리보다 우리의 처지를 자신들이 더 잘 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선거기간에만 서민의 삶을 ‘체험’한다고 전통시장에 가서 ‘서민 음식’을 사먹는다. 최근 집권당 의원들이 편의점 도시락과 대학 구내식당 점심을 먹어봤단다. 이 정도가 국회의원들이 우리 삶 전반과 우리가 처한 처지를 파악하는 최대치의 노력이다. 

사회적 지위와 소득 기준으로 상류층에 속한 국회의원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법을 만들고, 5060 이상의 의원들이 2030을 위한 법을 만든다.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일까? 문제는 우리는 그들이 만든 법과 정책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입법의 영향을 피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도 정작 자유를 느끼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에 중요한 것을 남들이 다 정하고 우리는 따르기만 해야 하니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나? 이렇다 보니 우리는 부모에게 독립해 성인이 돼도 여전히 내가 아닌 남이 만든 규칙을 따라야 하는 신세다. 이처럼 우리 사회엔 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독립적인 삶과 정치적 자유를 누릴 여지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가디언십인 대의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를 소위 가디언십(Guardianship: 후견)이라 한다. 선거로 뽑힌 소수 정치 엘리트가 우리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중요한 모든 것을 우리 대신 결정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가 나온 배경에는 플라톤의 『국가론(The Republic)』이 있다. 플라톤은 이 유명한 저서에서 국가의 운영을 바다에서 배를 운전하는 것에 비유한다. 플라톤은 배가 난파되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선 선장이 배의 운전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장이 바다와 배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의 운영도 세상에 대한 이치를 이해하며 학문적 깊이가 있는, 동시에 도덕적으로 청렴한 철인(The philosopher king or queen; Guardians)이 맡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도덕성에, 세상의 깊은 이치에 대한 깨달음까지 겸비한 철인은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도 어렵다. 철인 통치에 관한 플라톤의 이런 주장은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다. 개인의 도덕성이 중심 주제인 『국가론』에 이런 철인의 지배가 담긴 이유가 있다.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시민 배심원 500여 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 것을 플라톤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청년의 정신을 타락하게 하고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지는 반감도 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플라톤이 죽고 이천 년이 훌쩍 넘은 19세기 영국에 플라톤의 『국가론』이 다시 주목 받는다. 19세기 초부터 영국 시민은 참정권 투쟁을 시작했다. 영국 귀족은 이때 시민에게 단계적으로 조금씩 참정권을 주면서 ‘망할 민주주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영국 지배계층은 ‘망할 민주주의’의 첫 단계로 투표권을 재산이 있는 남성에게만 줬다. 시민들의 참정권 투쟁이 계속되자, 두 번째 단계로 재산이 없는 남성에게도 투표권을 줬다. 그리고 여성들의 참정권 투쟁이 거세지자, 20세기 초에는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영국 시민의 기나긴 참정권 투쟁과 그 성취 과정에서 영국 귀족은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참정권의 일부인 투표권을 모든 성인에게 다 주고 나서, 시민들이 급기야 입법권까지 요구할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입법권은 공동체를 구성한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귀족만이 독점했다. 이것만은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 영국 귀족은 2,000년도 더 전에 죽은 플라톤을 무덤에서 꺼내 부활시켰다. 이들은 플라톤의 저서들 중에서도 유독 『국가론』을 집중 조명했다. 국가론을 고전 철학 입문, 철학 입문, 정치 철학 등의 이름을 붙여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게 했다. 지배 계층은 철인의 지배를 시민의 참정권 요구 논리를 제압하는 이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위 ‘중우정치(Mob rule; 어리석은 무리의 정치)’라는 개념이 나왔다. 선장 대신 승객이 배를 운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처럼, 어리석은 시민(Ignorant crowd; 중우)이 정치에 직접 참여해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논리다. 영국 귀족은 중우정치 논리를 그동안 정치적 자유를 요구한 시민의 입을 틀어막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플라톤이 살던 고대 그리스나, 영국 귀족이 플라톤의 국가론을 부활시킨 19세기 영국에 비해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전문적이고 세분화돼있으며, 소득, 학력, 지역, 성별, 종교 등의 차이로 인한 여러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인공지능, 나노공학, 그리고 양자 컴퓨터가 융합해 일으키는 소위 4차 산업 혁명이 도래해 전환기를 맞은 사회이기도 하다. 집단이나 계층 혹은 지역이나 성별이 다른 이해 충돌을 조율하는 일도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 측면에서 급변하는 전환기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신속하게 내려야 한다. 이와 같은 현재의 여러 조건을 고려해 보면,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해 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19세기 영국이나 플라톤이 살던 고대 그리스보다 더 어렵고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같은 조건을 가진 환경에서 더 적극적으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환상은 지금까지 우리 대신 법과 정책을 정했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 관료도 그리 전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국회의원과 정부 관료도 한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 다른 영역에 관해 결정권을 행사할 만큼 그 분야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이렇게 지식이 부족한데도 그동안 국가를 그럭저럭 운영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 사회 내 다양한 전문가 집단의 조언과 자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초소형 시민의회를 무작위로 구성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것도 정당, 자본, 그리고 이익집단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시민의회엔 특정 입법이나 정책을 찬성하는 전문가 집단과 그 법이나 정책을 반대하는 전문가 집단 모두 시민의회 의원과 함께 참여한다. 여기에 중립적인 또 하나의 전문가 집단이 시민의회에 참가해 해당 의제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돕고 토론과 숙의 과정을 이끌게 한다. 

당연히 진지한 토론과 충분한 숙의 과정을 통해 근시안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이 나오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니 중우정치 논리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막으면서 동시에 정치 엘리트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이념적 수단이었다.

  

진정한 중우정치가 민주주의의 토대

청소년 시기에는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불화를 겪기도 한다. 또 이런 과정을 거치며 경험을 통해 인생을 배워 나간다. 때로 내 뜻을 고집하다 실패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인이 돼 부모를 떠나 독립해 현실에 부딪히며 세상을 조금씩 알아간다. 당연히 작은 실패와 큰 실패를 겪으며 좌절하기도 하고, 그 실패와 좌절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타인과 교류하며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기 잘못을 인식해 성숙해지기도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모순을 가진 완전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며 갈등하는 과정 그 자체가 정치다. 이런 갈등과 이해 충돌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순과 상대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발견하며 성숙해질 기회를 얻는다. 우리는 완전하지도 않고, 여러 모순을 보이는 이기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열띤 토론과 충분한 숙의가 여러 층위에서 이뤄지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우리 사회의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충분히 풀어낼 수 있다. 

언제까지 ‘엄친아’들, ‘엄친딸’들에게 죽을 때까지 매년 수백만 원을 세금으로 바치며, 우리를 보살펴 달라고, 우리를 대신해 그 돈을 잘 써달라고 사정해야 할까? 우리는 성인이 돼서도 또 다른 성인(국회의원)이 만든 법을 따라야 하는 ‘이등의’ 혹은 ‘덜 현명한’ 시민인가? 그들이 만든 법치의 대상으로 우리의 처지를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 시민을 위한 정치제도 개혁의 바른 방향이 잡히지 않을까?

그래서 내 눈에는, 선거구제나 비례제 논의가 우리의 문제가 아닌 그들만의 리그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리석은 무리 즉, 중우로 인정할 수 있을까? 참된 민주주의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그들만의 리그에 동조하는 소리로 들릴까? 

 

 

글·엄윤진 
독일 본 대학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정치 철학서 『거짓 자유』와 실존주의 서적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을 쓴 인문교양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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