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더 불온한 것들을 더 급진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더 불온한 것들을 더 급진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 안치용/ESG연구소장
  • 승인 2023.05.06 0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ESG 세상을 위한 신박한 아이디어 21>을 출간한 이유

- <ESG 세상을 위한 신박한 아이디어 21>(안치용, 현예린, 이윤진 지음, 마인드큐브, 2023년 5월)

'ESG 세상을 위한 신박한 아이디어 21'
'ESG 세상을 위한 신박한 아이디어 21'

독일 이론물리학자로 양자역학 성립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새로운 과학적 진실은, 그 진실을 부인하는 기존 반대자들을 설득해 믿게 만듦으로써 승리를 쟁취한다기보다는 그들이 결국 사망하고 대신 새 진실에 익숙한 새 세대가 성장함으로써 자리를 잡게 된다.”

흔히 플랑크 원리(Planck’s principle)’로 회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그의 주장은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섬뜩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플랑크 원리가 과학이나 학문 분야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저명한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 1915~2009)장례식을 통해 사회ㆍ법률ㆍ과학이 진보한다고 플랑크 원리를 자기식으로 해석하였듯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플랑크 원리가 더 뚜렷하게 목격된다.

세상의 변화, 또는 하나의 폭발적 사건이 아닌 근본적 변혁을 뜻하는 혁명은, 과거를 장례 치를 때까지 기다려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적잖게 수긍하게 되지만,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금언일 것이다. 만일 현실이 시급한 변화를 요구하는 긴급상황이라면 플랑크 원리라는 것을 별 의미 없는 헛소리로 치부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뿐더러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봐야 한다.

ESG가 환경(Environment)ㆍ사회(Social)ㆍ거버넌스(Governance)를 뜻한다는 것을 이제 많은 사람이 안다. “ESG=MSG?” 이런 반응은 적어도 내 주변에선 사라졌다. ESG의 핵심이 환경이라는 데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인류문명이 단기간에 대규모로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온난화 문제가 우리 공동의 미래에 관한 인류 공동의 의제가 아니라고 할 사람 또한 거의 없다. ESG는 지구온난화를 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환경 문제를 사회와 거버넌스라는 추가적인 틀을 적용해 더 효과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또한 불가역적 개선을 만들어내자는 포괄적 방법론이자 보편적 철학이다. 물론 초기엔 자본시장에 국한하여 세상에 더 이로운 투자의 원칙을 모색한 협의(狹義)의 용어였지만 ESG가 자본시장을 벗어난 지가 제법 되었다. 일각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ESG가 시대변화의 침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의견일 것이라고 믿는다.

방법론에 관해 이견이 존재하는지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냐 주어졌느냐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변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개인적으로 대세로 느껴지지만, 괜한 호들갑 떨 이유가 없다고 반론을 펴는 이들이 적다고 할 수는 없다. ‘플랑크 원리의 지혜를 받아들이며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든 예외적으로 플랑크 원리를 무시하고 전격적으로 변화를 강제하든 아무튼 우리는 변해야 한다. 장차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될지 모르지만, 현실론은 가능한 한 최선의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지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플랑크 원리의 역설적 시사점은 유효한 변화를 적기에 만들어내려면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과 지금 더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변화에 우호적인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때까지 유유자적하게 기다리는 건 지금으로선 지혜라기보다 직무유기에 가깝다.

John Snow
John Snow

존 스노우(John Snow, 1813~1858)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의사로 역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스노우는 1854년 런던 소호에서 창궐한 콜레라가 오염된 물을 통해서 퍼졌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역학 역사에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19세기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 런던에서는 상수도ㆍ하수도 체계가 엉망진창이어서 오물이 포함된 생활하수가 정화되지 않은 채 상수도로 유입되곤 했다. 그해 소호에서 콜레라가 유행하자 그는 발품을 팔아 콜레라 발병자와 사망자가 나온 집들을 지도에 표시함으로써 거리의 특정 우물을 중심으로 콜레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임을 스노우가 확인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전염병이 퍼지는 원인이 나쁜 공기 때문이라는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장기설(瘴氣說, miasma theory, 독기설이라고도 한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장기설을 신봉하면 진원지로 찾는 것과 같은 역학조사가 불필요하다. 스노우 가설은 일종의 현장 검증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최초 콜레라 발병자 집 정화조와 그 우물이 지하에서 가깝게 위치했고 정화조 벽이 부식돼 정화조와 우물 사이 토양이 상당히 오염돼 있었다. 이 우물의 물을 먹은 사람이 콜레라에 걸렸다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물론이고 역학 역사가 새로 작성된 순간이었다. 이후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도시의 상수도ㆍ하수도 체계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이 책은 ESG를 광의(廣義)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며 ESG세상을 위해 필요한 변화를 제약 없이 급진적으로 상상하였다. 여성을 대신해 국가가 하는 임신, 서울대 폐지 및 새로운 대학제도 모색, 사회적 가치 계량화와 ESG 관점의 새로운 GDP 도입,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의 ESG보고 의무화, 기본소득과 대비되는 참여소득 가능성 타진, 다양한 가족 인정, 탄소중립 사회를 위한 기반 제도 검토, 순환경제 구상, 연기금의 ESG투자 의무화, 국가가 육아를 완전히 책임지는 사회, 3일 근무제 가능성 검토, 성매매 합법화 및 성노동자 인권 보호, 추첨민주주의 시행 등 현 사회체제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꼭 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하기 힘든 도전적 과제를 21개 제시했다.

누군가는 불온한 발상이라고 일소에 부칠 것이고, 누군가는 흥미로운 상상이라고 박수를 보냄 직하다. 스노우가 한 정도로 공을 들이지는 못했지만 우리도 적잖은 발품을 팔았다. 스노우가 해낸 정도의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그 변화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변화의 아주 작은 몫을 감당해냈다고 자평하며 보람을 느낀다.

<ESG 세상을 위한 신박한 아이디어 21>은 ESG연구소와 대학생프로젝트팀이 협업해 202112~20224월 주간경향에 청년이 외친다, ESG 나와라란 제목으로 연재한 기획물을 바탕으로 했다. 수정 및 보완 작업을 거쳐 책으로 나오는 데에 기획연재 종료 후 1년이 걸렸다. 많은 사람의 노고의 결과물이다. 감사드린다. 함께한 대학생들이 나중에 내 나이가 되었을 때 대면할 세상이 지금 예상보다 더 나은 것이기를 기도한다.

 

*특별히 함께 저술 작업한 이윤진 ESG연구소 연구위원과 현예린씨 등 대학생 프로젝트 팀에게 감사드린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