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여성 감독들의 섬세함으로 더욱 다채로워진 칸
여성 감독들의 섬세함으로 더욱 다채로워진 칸
  • 전찬일 l 영화평론가, 칸
  • 승인 2023.05.31 2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레드 카펫에 오른 영화 <거미집> 주역들

제76회 칸 영화제의 핵심적 화두는 크게 네 가지로 꼽을 만하다. 여성(성), 다양성(다채성), 세대 간 조화와 통합, 영화의 미래가 그것이다. 이 화두들을 ‘변화’라는 용어로 통칭할 수 있을진대, 올 칸은 유난히 그런 변화들에 역점을 뒀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지면 관계상 네 가지 화두 중 여성(성)과 다양성(다채성), 이 두 가지만 짚기로 하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역설해온 여성(성) 이슈부터 짚어보자. 당장 경쟁 영화제의 하이라이트인 경쟁작 21편 중 여성 감독의 작품들이 총 7편이다. 전체 편수의 1/3에 불과하지만, 칸 역사상 최다란다. 이미 진단했듯 “영화계가 얼마나 남성 중심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손색없다. 그럴 만한 영화들이 그만큼 늘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올 칸 선정위원회가 의식적으로 여성 감독의 연출작을 한 편이라도 더 선택하려고 애썼으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탈남성중심주의의 서막 

공개 순으로 소개하면 <임파서블 러브>(2018) 한국 개봉을 통해 지난해 국내 관객들과도 만난 카트린 코르시니 감독의 <귀환>을 필두로, <피부를 판 남자>(2020)로 시네필 사이에 이름을 알린 튀니지 태생 카우테르 벤 하니야의 <네 딸들>(올파의 딸들), 경쟁 부문 최연소인 36세의 세네갈계 프랑스 감독 라마타 툴라예 씨가 빚어낸 주목할 만한 장편 데뷔작 <바넬과 아다마>, <시빌> (2019)로 그 존재감을 각인시킨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미하엘 하네케(<하얀 리본, 2010>, <아무르, 2012>) 이후 오스트리아가 낳은 최고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예시카 하우스너의 영어 영화 <클럽 제로>, 한때는 동시대 여성 감독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문제작들(<로망스, 1999>, <지옥의 해부, 2004>)을 선보였던 카트린 브레야의 <지난 여름>, <더 원더스>(2014년) 칸 심사위원대상을 <행복한 라짜로>(2018)로 각본상을 안은바 있는 알리스 로르바허의 <키메라>가 그 주인공들이다.

올 칸에서 그 어느 해보다 강렬히 두드러진 ‘여성 파워’는 경쟁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 부문, 학생들 단편 경쟁 부문인 라 시네프(옛 시네퐁다시옹/시네파운데이션)와 기성 감독의 단편 경쟁 부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르는 공식 부문들과, 공식 비공식을 막론하고 올 칸에서 선보인 첫 번째 연출작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우수 신인감독상인 황금카메라상 부문의 심사위원장들 중 두 명이 여성이다. 단편 부문의 일디코 엔예디 감독(최신작 <내 아내 이야기>(2021)가 개봉 중)과 황금카메라상 부문의 배우 아나이스 드무스티에(<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2014, 프랑수아 오종>)다. 올 칸의 포스터를 빛낸 프랑스가 배출한 ‘세기의 디바’ 카트린 드뇌브도, 개막식을 진행한 명배우 키아라 마스트로얀니도, 개막작 <잔 뒤 바리>의 감독 겸 주연 마이웬도 여성이다. 

외(양)적으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남성 감독들이 연출한 일련의 경쟁작들에서도 사건·사연을 추동하는 주도적·결정적 캐릭터는 여성들이다.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에서의 두 디바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과 그레이시·줄리안 무어, 카림 아이누즈의 역사물 

<선동가>(FIREBRAND)에서의 왕비 캐서린 파·알리시아 비칸데르, 핀란드 영화의 대명사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낙엽들>에서의 안자·알마 푀이스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의 주도성은 단연 큰 눈길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는바, 한결같이 1991년 칸의 폐막을 알린 거장 리들리 스콧의 수작 <델마와 루이스>(1991)의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의 ‘멋진 후배’들로 손색없다.

 

한국 여성 감독들의 활약 주목

외국산 영화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한국영화도 그런 예가 없지 않다. 라 시네프 섹션에 초대된 두 단편 <홀>(황혜인)과 <이씨 가문의 형제들>(서정미)이 각각 한국영화아카데미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의 여성 감독들이 빚어낸 영화들이니 그러려니 치자. (장편 기준) 김성훈 감독의 <끝까지 간다> 이후 9년 만에 비공식 병행 섹션 중 하나인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우리의 하루>가, ‘연인’ 김민희를 위한 ‘연가’일 수는 있어도 70대 남자 역의 기주봉이 그 이상의 비중을 띄니, 더 이상 부연하진 않으련다. 영화에 대해 쥘리안 레지 집행위원장이 “삶의 온갖 즐거움을 자연스레 다룰 뿐만 아니라 김민희가 어떻게 진정한 여배우가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평했다지만… 

하지만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 이후 8년 만에 비공식 병행 섹션 중 하나인 비평가주간 경쟁작-지난해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폐막작으로 선정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경쟁 부문에 초대받은 것은 아니다-으로 선보인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에 대해서는 상술하지 않을 수 없다. 수면 중 이해 못할 이상행동을 보이는 남편과 임신한 아내가 그 ‘비밀’을 함께 극복・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공포성 스릴러이자 러브스토리에서 플롯을 이끌어 가는 인물은 남편 현수(이선균)가 아니라 아내 수진(정유미)이다. <아시아엔> 통신에서도 강변했듯, “정유미 캐릭터나 연기는 올 칸의 최대 화두 중 하나인 ‘여성(성)’에 완벽히 부응하는, 특별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 존재감은 2016년 비경쟁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대된 연상호의 <부산행>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차원이다.” 경쟁작인 <바넬과 아다마>에서의 ‘여전사’ 바넬・카디 마네나 등에 비견되기에 부족함 없다. 이러니 어찌 올 칸의 최대 화두로 여성(성)을 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양성(다채성) 또한 올 칸의 화두 중 화두로 꼽지 않을 수 없다. 21편의 경쟁작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에 대해서는 굳이 재론하지 않으련다. 경쟁 부분에 부름을 받았던 걸작 <슈렉>(2001, 앤드류 아담슨 & 비키 젠슨)같은 흔치 않은 예외가 있긴 해도 애니메이션은 76회를 맞이한 칸 역사에서 끊임없이 무시와 홀대를 받아온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올 칸은 폐막작으로 한국계 미국 감독 피터 손이 총감독한 디즈니·픽사 애니 <엘리멘탈>을 선택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가령 라 시네프 섹션에서는 출품된 2,000편 가운데 최종 선정된 16편 중 2편이 애니였다. 더욱이 공동 연출을 포함해 10편이 여성 감독의 영화였다. 흥미롭지 않은가. 

 

다큐멘터리에 관심 집중 

다큐멘터리에 눈길을 돌리면 그 흥미는 배가된다. 경쟁작 중에도 다큐가 한 편 있다. 중국태생이긴 하나 언제부터인가 프랑스에 거주하며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온 왕빙의 <청춘(봄)>이 그것이다. 주 제작국 프랑스와 중국의 합작품인 영화는, 그의 첫 경쟁 부문 진출작이다. 9시간 10분여의 다큐 데뷔작 <철서구>(Tie Xi Qu: West of the Tracks, 2003)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중국여인의 연대기>(和鳳鳴, He Fengming, 2007), <석탄 가격>(煤炭,錢, Coal Money, 2009), <이름 없는 남자>(无名者, Man with No Name, 2010), <세 자매>(Three Sisters, 三姊妹, 2012), <아버지와 아들>(Father and Sons, 父與子, 2014), <타앙-경계의 사람들>(Ta’ang, 德昂, 홍콩/프랑스, 2016), <상하이 청춘>(Bitter Money, 苦錢, 2016) 등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중국의 모습과 사람들의 삶을 긴 호흡으로 기록”해왔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감독은 사회의 변화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고, 그 현상을 영화에 녹여내야 한다”(포털 다음, 근현대 영화인사전 |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참고・인용)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나름의 영화관(觀)을 피력했는바, <청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영화는 2014년부터 5년간 찍은 2,600시간 분량의 어마어마한 자료에서 추출해, 약 3시간 반으로 최종 완성시켰다. 상하이 근처의 즈리(Zhílì; 직례, 중국어 간체자 直隶, 정체자 直隸)를 주 무대로 1만 8,000여 개의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의 수많은 ‘어린’ 노동자들의 그렇고 그런 일상들과, 가끔씩 벌어지는 일탈들을 별다른 가공이나 수식 없이 기록해 보여줄 따름이다. 별다른 개인적 의견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그간 명성만 들어왔지 그의 다큐를 처음 접한 내게는 ‘올 칸의 수확’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Cool) 체험이었다. 무엇보다 감독의 그 꾸밈없는 ‘정직한 시선’ 때문이었다. 상영시간도 긴 다큐인지라(1) 지루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하고 큰마음 먹고 영화를 끝까지 지켜봤는데, 지루하긴커녕 여간 흥미진진한 게 아니었다. 호불호가 확연히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에 대한 칸 데일리 평점들도 양호한 편이다. 칸 현지에서 가장 널리 참고되는 스크린 12인 평단으로부터는 4점 만점에 중위권의 평균 평점 2.8점을 얻었다. 

왕빙은 ‘특별 상영’ 부문에 60분짜리 중편 한 편을 더 선보였는데, <맨 인 블랙>이었다. 중국 출신의 가장 중요한 클래식 음악 작곡자인 80대 후반의 왕시린(王西麟)에 관한 다큐다. 그가 읊조리거나 포효하는 독백이나 일성(一聲)들이야 그렇다손 쳐도, <청춘>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예술적 스타일은 ‘발견’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술가의 벌거벗은 몸과 (목)소리들, 그가 작곡한 교향곡 등 음악들, 더 이상 유려하기 힘들 카메라워크 등이 결합된 일생일대의 예술체험으로 손색이 없다. 올 칸은 이 다큐가 남긴 인상만으로도 잊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서자 취급에서 벗어난 다큐의 진면목

빈말이 아니라 2023년 칸의 도드라지는 경향 중 하나는, 실사 영화에 비해 으레 ‘서자’ 취급을 받아온 ‘다큐의 비상’이라 한들 과장은 아니다. <완벽한 날들>로 오랜만에 경쟁 부분을 찾은 ‘뉴 저먼 시네마’의 살아 있는 신화 빔 벤더스도 왕빙이 그랬듯 또 한 편을 특별 상영작으로 선보였는데, 다큐 <안젤름>이다. 독일의 설치미술가로 ‘20세기 후반의 신표현주의 미술 운동의 주요 인물’이라는 안젤름 키퍼에 관한 기록이다. 놀라지 마시라. 2008년 칸 황금카메라상 등에 빛나는 걸작 <헝거>를 비롯해 <셰임>(2011), <노예 12년>(2013) 등을 통해 세계적 명장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해온 스티브 맥퀸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관한 4시간 20분여의 다큐 <오큐파이드 시티>로 화제몰이를 했다. 

1997년 첫 방문 이래 26년간 22차례 칸을 찾은 내가 기억하는 한, 다큐의 위상이 이렇게 드높았던 적은 없었다. 세기의 문제적 감독들이 이렇게 다수 다큐로 칸을 공식 방문한 적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쯤 되면 올 칸의 핵심적 변화들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을까? 

 

 

글·전찬일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역임, 중앙대학교 글로벌예술대학 겸임교수. 비평 활동 외에도 글로컬 컬처 플래너 & 커넥터 및 퍼블릭 오지라퍼를 표방하며 다양한 문화 기획·연결을 추진해오고 있다. 저서로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2020),『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2008) 등이 있다.


(1) 공식 섹션에서만도 올해 유독 긴 길이를 자랑하는 영화들이 적잖았는데, 비경쟁작이면서도 올 칸의 최고 최대 화제작이었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상업영화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도 무려 3시간 26분을 자랑(?)한다.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인지 최종 개봉 때는 줄일 것인지는 몰라도 국내 포털의 영화 소개란에는 상영 시간이 아예 나와 있지 않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