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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언제든 신파로 추락할 영화적 외줄 타기 너머에 숨긴 것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언제든 신파로 추락할 영화적 외줄 타기 너머에 숨긴 것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16 2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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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더 썬(The Son)’

 

그 무엇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어

 

영화 <더 썬(The Son)>을 대표하는 문구이다. 배급사가 앞세운 카피이고, 아마 영화평이나 기사도 좋은 아버지 되기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십상이다. 표면상으로는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영화에서 그 얘기를 넘어선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았다면 연출과 각본을 맡은 플로리안 젤러 감독을 두고 기대주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신파에 그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좋은 아버지라는 신파

 

줄거리가 평범하다. 성공한 변호사인 피터(휴 잭맨)는 이혼하고 두 번째 가족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아내 베스, 둘 사이에서 갓 태어난 테오(Theo)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간다. 영화는 재혼한 피터의 행복을 잠깐 보여주고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갈등으로 접어든다. 전처 케이트(로라 던)가 찾아와 둘 사이에 태어난 피터의 큰아들 니콜라스(Nicholas)가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부자의 대화 이후 아버지와 살고 싶다는 니콜라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니콜라스는 어머니 케이트의 집을 떠나 피터의 집으로 옮겨간다.

 

피터는, 어머니가 다른 두 아들과 함께 살며 두 번째 아내와 협력하여 좋은 아버지의 삶을 의욕적으로 밀고 간다. 성공에 전념하느라 가정을 소홀히 한 자신의 아버지(안소니 홉킨스)와 다른 아버지가 되겠다는 피터의 포부는 그러나 좌초한다. 니콜라스가 자살을 시도하면서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니콜라스의 영혼은 얇디얇은 유리로 된 그릇이어서 좋은 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구원하겠다는 피터의 계획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난다. 나중에 할 이야기이지만 결과적으로 반대로 어쩌면 아버지인 피터가 아들로부터 기이한 방식으로 구원받는지도 모르겠다.

 

표면에 드러난 두 가지 주제는 가족 특히 부자 관계, 중증 우울증 혹은 심각한 정신질환이다. 이 두 주제는 자칫 상충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하나로 버무려져 있지만, 보통은 하나로 버무려지기가 힘든 주제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는 자녀를 둔 부모의 이야기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지나는 자녀와 부모 사이의 이야기는 관점에 따라 완전 별개의 이야기이다. 후자는 거의 모든 사람의 특정 시기에 국한하는 반면 전자는 특정한 사람들의 긴 시기에 관련된다. 누구나 겪고 짧은 시기에 지나가기에 힘들긴 해도 병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춘기 질풍노도와 우울증이 확연히 다르다고들 본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한 사람이 인위적으로 특정한시기에 겪는 증후군으로 설정하며 결과적으로 부성의 문제 또한 단순화하면 해프닝으로 귀결한다. 예상대로 비극적 결말로 매조짐으로써 사건 자체의 비극성과는 별개로 극중 상충을 봉합하게 된다. 아무튼 그것은 지나갔다.

 

두 주제를 가지고 부성의 문제를 정색하고 다루었으면 전혀 쉽지 않은 전개가 됐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다소 신파적인 분위기가 번지는 건 그러므로 피할 수 없다. 답이 정해져 있는 주제를 새로운 경로로 보여주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 게, 결국 영화 끝부분에 반전 장치를 두게 된다. 사실 이 반전은 반전이라기보다 일종의 지연이며, 황당한 지연을 배치함으로써 스테레오타입의 느낌을 희석한다. 좋게 보면 영화적 수완이고, 나쁘게 보면 관객 기만이다.

 

젤러 감독은 “<더 썬>이 죄책감, 가족 간의 유대감, 궁극적으로는 사랑에 관한 영화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서 다른 어떤 영화도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정공법으로 가족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의도에서 우리는 상당한 난관을 예상하고 전술한 대로 난관의 돌파가 쉽지 않았다. 정해진 답을 보여주되, 기존에 정해진 방식을 벗어나 우회하여 답을 찾은 게 감독의 연출론이었다. 답에 다가갈수록 신파에 다가간다. 우리 삶이 어차피 신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런 삶에 충실하게 근거해 만들어진 <더 썬> 같은 영화가 마침내 드러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파를 넘어서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제목을 따르면 아들 니콜라스이다. 하지만 니콜라스보다는 피터가 주인공이라고 여길 사람이 더 많지 싶다. 실제로 많은 이가 이 영화를 부성에 관한 영화로 간주하기에 피터 즉 아버지 주인공 설이 더 설득력 있다. 그렇다면 제목이 잘못된 것인가. 감독이 구성한 3부작 가운데 <더 파더>에서 이미 제목을 사용해서 어쩔 수 없이 더 썬으로 한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더 파더>에서 열연한 안소니 홉킨스가 <더 썬>에서 니콜라스의 할아버지, 곧 피터의 아버지로 잠깐 등장한 게 단서라면 단서다. 안소니 홉킨스는 극중에서도 안소니로 나온다. 감독은 이 영화가 결국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니콜라스가 아버지가 되지 못한 아들이라면, 피터는 아버지가 된 아들이므로 두 사람은 아들이란 정체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피터 아버지로서 홉킨스의 짧은 출연은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니콜라스의 두 차례 자살 기도 중 결정적이라 할 두 번째에서 피터가 안소니에게서 받은 사냥총이 사용되도록 한 것은 정교한 노림수이다. 단순히 복잡한 의미를 내포한 대물림만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기독교 문화권에 기본적으로 깔린 기독교 상징이 작동한다. 안소니는 극중을 기준으로 유일한 아버지이다. 물론 그 또한 누군가의 아들이었지만, <더 썬>에서는 또 <더 파더>를 염두에 둔 관객에게는 더더욱 아버지 그 자체이다. 피터는 아버지이자 아들인 존재, 즉 보통 인간이다. 니콜라스는 그저 아들이다. 세상과 불화한 연약하고 순결한 존재이다. 이런 아들은 흔히 예수와 연결된다. 아들아버지의 총에 희생당한다.

 

아들이자 아버지로 대를 이어 인간사를 짊어지고 가는 존재, 즉 인간인 피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영화 대미에서 베스가 말하듯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제 피터의 이름이 피터인 까닭이 자연스럽게 해명된다. 우리 성서 표기법으로 피터는 베드로이다. 죽은 예수를 대신하여 세상에서 그 삶을 연장하는 역할을 맡은 예수의 수제자가 베드로이다. 이런 해석이 억지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감독은 피터의 두 번째 아들, 즉 니콜라스 동생의 이름을 테오로 지었다. ‘테오는 신이란 뜻이다. 피터가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베스가 테오를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기독교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테오가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참고로 니콜라스는 인민 혹은 사람들의 승리란 의미이다. ‘아들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다. 예수는 인간으로 와서 인간으로 죽었다. 그의 승리는 그의 승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으니, 잘 맞아떨어지는 이름이긴 하다. 너무 노골적으로 예수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부여하는 건 너무 촌스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 영화가 종교적인 영화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깔린 가운데 인간 존재를 나름의 방식으로 규명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대체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만 흔히 최악을 위한 최선임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그럼에도 그런 후회스러운 최선이 (또 최선 속에서) 인간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는 역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신파의 외양 속에 실존의 현상을 포착한 성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주제가 부성일 수는 없다. 문학과 영화 등에서 흔히 이뤄지는 인간 존재론의 탐색일 가능성이 더 크다. 평범하고 신파적인 피상 아래에 독특한 방식의 보편적 인간 탐색이 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이자 아들인 피터라는 사람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사건에 휘말려 그럼에도 더 나은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모습을 그렸다. 이혼과 부자관계는 무대장치 정도 의미로 부차적이다.

 

영화에는 또 하나의 아들이 등장한다. 젤러 감독의 첫째 아들인 가브리엘이 극중 프랑스 출신 인턴 역할로 출연했다. 그 인물의 역할을 관람 후에 자료를 보고 알았다. 개인적으로 부적절한 캐스팅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가 <더 썬>이니 일종의 위트로 받아들여야 할까. 게다가 이름이 가브리엘이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사진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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