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언제조가로 꼽히는 조지 버나드 쇼는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는데, 하나는 절실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쇼의 재기발랄함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전혀 가볍지 않은 성찰을 담았다. 요즘 출판가에서 인기를 누리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우리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린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는 그 결핍 때문에 고통받고, 원하는 것을 얻은 다음에는 원하는 대상이 사라져서 권태에 휩싸인다. 충족은 대상의 소멸을 뜻하기에 현타와 비슷한 종류의 진공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욕망의 철학
자본주의는 욕망을 해방함으로써 성립한다. 종교의 세속화는 금욕적 세계관의 포기이다. 인간에게 더 많은 편익을 추구하게 욕망을 풀어놓은 근대사회는 억압에서 풀려남으로써 전진의 동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한 번 선을 넘고나자 그 선이 하나의 선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눈금자처럼 무수히 많은 선이 그어져 있어 계속 그 선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시적이고 무수한 선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욕망 충족에 따른 권태의 여지를 극도로 제한했다.
또한 최초의 선을 넘은 다음엔, 선을 넘지 않았을 때 타인과 비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과 완벽하게 달라진 기이한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즉 모두가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모눈종이 위에 서 있는 사태가 벌어진다. 욕망의 충족이 훨씬 더 사회적인 성격을 갖게 되며 충족의 쾌감이 한 자락 바람으로 스쳐 지나가는 반면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욕망은 무한루프로 던져져 인간은 그 속에서 반추동물처럼 고통을 삶의 조건으로 되씹는다. 욕망의 깔끔한 충족이 끊임없이 지연되며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욕망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에 갇힌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욕망의 철학, 내 삶을 다시 채우다-놓아버릴 것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일깨우는 철학자들의 통찰>(전광철 옮김, 착한책가게)은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욕망을 결핍의 관점에서 바라본 플라톤, 인간이 누려야 할 쾌락의 원동력이지만 절제가 필요하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거나 억눌러야 한다는 통제의 관점에 선 불교와 스토아 철학, 욕망을 인간의 본질이자 생의 약동을 높이고 완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힘으로 본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융 등의 견해가 소개된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 SNS에서 사회적 인정 욕구에 빠진 엄지세대,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와 욕망 조작, 포르노 공식과 섹스 능력의 숭배에 따른 성적 욕망의 고갈 등 욕망에 관한 현인들의 생각과 분석을 훑었다.
자본주의 도래와 함께 모눈종이 욕망 추구가 인간의 기본조건이 되었지만, 근대이전에도 욕망은 인간에게 비극의 원천이었다. 모눈종이가 펼쳐지기 전엔 존재론적 분열의 성격이 압도적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우리가 갖지 못한 것, 우리가 아닌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 그것이 바로 욕망과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신성과 분리된 인간의 영혼은 끊임없이 신성과 다시 이어지기를 원하고, 재연결이 좌초하며 가장 근원적인 욕망을 대신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물질이나 대상을 무한히 갈망하게 된다는 결핍으로서 욕망의 관점이다.
오늘날 뇌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은 선조체라는 인간의 원초적 뇌 부위가 음식, 섹스, 사회적 인정, 정보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선조체는 욕망을 충족할 때마다 쾌감을 일으키는 도파민을 방출하는 방식으로 보상회로를 작동한다. 문제는 선조체에게 충족이란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항상 더 많은 쾌락을 좇도록 부추긴다. 살펴본 대로 자본주의가 선조체를 사회의 중추로 격상함에 따라 인간은 개인과 사회 양쪽에서 탄탈로스적인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욕망의 억제만이 해결책일까. 기독교 사상사에서 초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교부 오리게네스는 자발적인 거세로도 유명하다. 대체로 성욕을 죄악시한 기독교에서 오리게네스의 뒤를 따른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아예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유방을 도려내는 결의를 보여준 사람만으로 구성된 비밀 종파도 있었다. 당연히 거세가 해결책이 아니다. 물리적인 발기를 차단했다고 의식의 발기마저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저자는 욕망의 제한과 억제가 궁극적인 해법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스피노자를 소환한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존재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인 ‘코나투스’에 기초한다. 존재의 원동력이자 인간이 생존하도록 이끌고 존재의 힘을 키우는 코나투스를 ‘욕구’라고, “욕망은 자기의식을 지닌 욕구”라고 정의한다. 욕망은 우리가 더욱더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동하는 힘을 키우고, 기쁨 속에서 성장하기 위해 길러야 하는 힘이라고 스피노자는 역설한다.
스피노자는 기쁨을 “덜 완전한 것에서 더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으로, 반대로 슬픔을 “더 완전한 것에서 덜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이라고 말한다. 기쁨과 슬픔은 우리 생명력의 증가 또는 감소에 따라오는 두 가지 기본 감정이다. 존재하고 행동하는 힘이 줄어들 때마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그 힘이 늘어날 때마다 기쁨을 느낀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영원한 기쁨에 도달할 때까지 기쁨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러한 기쁨에 도달한 상태를 “완전한 행복”이라 불렀다. 스피노자의 성찰은 앙리 베르그송의 엘랑비탈(élan vital)과 연결된다.
현대는 욕망의 역동이 사라지고 욕망 추구의 조울증만이 만연한 시대다. 사회와 존재 양쪽에서 비롯한 탄탈로스적인 이중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욕망 추구의 과잉과 욕망 자체의 거세를 동시에 경험한다. 저자는 제시하는 해법은 욕망의 발견과 정직한 대면이다. 이 일이 쉽지 않지만 그다음이 더 어렵다. 철학하기. 자신의 욕망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 흔한 용어로 매핑하고 철학하기를 통해 올바른 욕망의 경로를 발굴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단순하고 진부해 보이는 결론이지만, 사실 이 결론 외에 가능한 결론이 있을 수 없다. 지혜는 단순하고 진부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현란한 갖가지 미혹에서 비롯한다. 다만 여기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
왜 사는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르누아르의 다른 책 <왜 사는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이푸로라 옮김, 마인드큐브)엔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에서 인류 영혼의 스승 3인이 내놓는 대답이 <욕망의 철학>의 해제 같은 성격이 아닐까 싶다.

<왜 사는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는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알아야 할 정의, 사랑, 자비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신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의 실제 삶을 조명하며,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현재의 우리 삶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는 활동한 장소, 시대, 문화가 비록 서로 다르지만,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다. 세 인물 모두 인류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간 내면의 탐구, 인간적인 관계와 사랑, 그리고 영적인 이해를 강조했다.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해답을 구한다.
이 책의 독창성은 동시대 혹은 후대의 제자들이 전하는 세 인물의 기록을 분석하고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전달하는 명료하고 체계적인 방식에 있다. 세 스승의 삶과 사상을 개별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삶의 각 단계를 병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서로 다른 세 갈래 길을 비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길이 모두 같은 목적지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면의 삶
같은 저자의 <내면의 삶>(강만원 옮김, 마인드큐브)의 부제는 ‘인생은 어떻게 풍요로워지는가’이다.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주제이다. 피아노를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돌과 나무로 조각하는 방법을 배우듯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점점 실용적 관점에서 ‘성공하는 방법’에 몰두할 뿐,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외부의 도전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부의 도전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좋은 삶’은 외부의 조건을 향상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내면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야 하며, 삶의 본질에 대해 과감하게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내면의 삶”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통해, 삶의 목적과 의미를 다룬다.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과 구체적인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저자가 고백하듯 우리는 ‘버린다’는 소극적 포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한다’는 능동적 획득을 통해 보다 윤택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당연하겠지만 <욕망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한다.
저자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강조한다. 보다 가치 있는 삶,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르누아르는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레데릭 르누아르
저자의 삶의 여정은 독특한 편이다. 마다가스카르 태생의 프랑스인인 그는 어릴 때부터 고대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철학서들을 접했고 ‘불교와 서양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한 유명 출판사 편집자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다 서른 살에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전업 작가의 길이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의심에 흔들리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침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현재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고 20개 언어로 출판했으며 세계적으로 1000만 부가 넘는 책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었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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