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이 연출한 <다운폴>(2004)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를 본 관객보다 패러디로 사용한 장면을 본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미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히틀러가 지도를 펼쳐놓고 불가능한 작전을 짜다가 격노해 부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 장면 말이다.

<다운폴>은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로 끝장나게 되는 마지막 보름 정도의 기간을 다룬 영화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승리를 자신하며, 전황을 사실대로 직시하려는 부하들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남아있는 부하들은 승리를 고하는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된다. 여기서 히틀러의 태도는 주목할만하다. 먼저 히틀러는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긴다. 부하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 했으며 그의 명령은 처음부터 무시되었다고 격분하면서, 그들은 처음부터 배신을 일삼은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한다.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대학에 가지 않았는데도 유럽 전체를 정복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또 히틀러는 약자들에게 동정을 느끼는 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며, 약자들이 몰살당할 때 강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면서 ‘양육강식의 원리’를 주장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히틀러는 사도마조히즘이 장착된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성격자’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힘을 갈망하는 반면, 무력감을 증오한다. 모든 걸 힘이 있는 것과 무력한 것으로 이분화하고, 강한 대상에게는 열광하지만 약한 대상은 잔인하게 공격한다.
히틀러가 패배를 인정하기는커녕 새로운 시작 운운하며 망상에 빠져 있는 동안 벙커 밖에서는 수많은 국민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간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목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면, 독일 국민 전체가 몰락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어쩔 수 없이 패전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지 부하에게 자문을 구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만을 생각한다.

벙커 밖이 점점 더 끔찍한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벙커에서 파티를 연다. 연회장에 연합군의 폭탄이 강타할 때까지, 춤과 향연은 계속된다. 그로테스크한 이 장면은 연합군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소련군이 그들의 벙커 근처까지 진군했을 때, 차례로 자살을 선택하는 장면과 맞먹는다. 히틀러와 에바뿐만 아니라 괴벨스 부부는 여섯 명의 자식들까지 직접 살해하고 자살한다. 괴벨스의 부인은 “우리 아이들은 결코 국가사회주의가 아닌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면서, 어린 자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뿐만아니라 히틀러의 부하들과 군인들도 줄줄이 자살을 선택한다.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의 자살은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죽음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가 지은 <나치의 병사들>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재현된 광기의 근원에는 정치를 신앙으로 바꾼 ‘총통 신앙과 숭배’가 자리한다. 그들(나치의 병사들)에게 총통 히틀러는 독일의 내부적 재건과 외교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독일 국민에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을 안겨준 구세주이며, 독일의 민족적 자긍심을 재구축한 천재적 민족지도자였다. 총통과 국가사회주의 프로젝트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믿음을 상징하면서, 독일 국민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냈다. 따라서 총통 신앙과 숭배는 전쟁의 패배가 확실해지는 데도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승리의 확신이 사라졌다 해도, 초인적 구세주인 총통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를 믿은 그들의 가치도 떨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에, 총통에 대한 믿음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유지하면서, 실재 사건이 기대에 어긋나게 전개될 때,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때 나타나는 ‘인지부조화 현상’에 빠져들었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해석 자체를 변화시키는 인지부조화는 미래의 전망이 암울할수록 총통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히틀러 자체의 문제를 의심하는 대신 문제의 원인을 모두 외부로 돌렸다. 이러한 히틀러의 신격화는 대안이 없다는 심리를 만들어내고,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전적으로 집중하고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면 파멸이 분명해지더라도 지도자에게 충성을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마지막 쉬는 숨까지 다 바쳐서 최후까지 전투를 수행했으며, 히틀러가 죽는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전체주의적 통치의 귀결인 셈이다.
“우리는 국민에게 우리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악명높은 나치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괴벨스의 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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