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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는 과연 필사적으로 현실을 극복해 나간 걸까?: 영화<전,란>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는 과연 필사적으로 현실을 극복해 나간 걸까?: 영화<전,란>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4.10.1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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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과 혐오

부조리극의 현실자각

영화 <전,란>에 박찬욱 감독이 참여한다는 소식에 부조리극의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해왔던 그가 재해석하게 될 역사적 부조리는 무엇일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질 그만의 신체 절단의 서사는 어떻게 흡수되어 있을지 기대했었다.(아래 관련기사 참고.) 김상만 감독의 뛰어난 미술 감각은 분명 또 하나의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리라 내심 기대하며 영화를 기다렸다. 당대 부조리극의 거장, 박찬욱 감독의 손길과 수려한 미술 디자인 감각을 지닌 김상만 감독과의 협업은 분명 영화 배급사 측 홍보 포인트가 될만했다. 그러나 <전,란>을 보고 나서, 이 기대는 현실 자각의 반성으로 바뀌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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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하고 고집스러운 선조, 그의 치세에 살아간 민초들은 어떤 부조리를 겪었을지, 과거의 인물들을 위해 미래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부질없지만, 그들은 두렵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천영(강동원)이 손을 검으로 관통당하거나 이종려(박정민)가 손등을 베일 때 아니면 막내(이민재)의 얼굴이 검 끝에 베이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려의 실수를 대신해 회초리를 맞아야 하는 일은 당연히 어린 천영이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천영이 건넨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종려의 아들을 품에 안고서 몸을 피하려다 기어이 불구덩이 속에서 생을 마감한 종려의 부인이 드러냈던 혐오다.

 

혐오의 현실

혐오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볼 순 없지만, 영화의 시작은 확실히 ‘대동’이 품은 의미에 적대감을 드러내 보인 선조의 혐오에서 시작한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혐오는 일방이 아니라 모두의 감정이라고. 그래서 종려가 천명에게 품게 된 감정도, 천명이 종려에게 드러낸 감정도, 아니면 민초들이 왜구에게 드러낸 감정도 모두 혐오라고. 그렇다면 여기서의 현실은 혐오의 현실인 것일까?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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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혐오는 문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제거하려 한다. 이 영화에서 바라보는 혐오는 그런 특징을 신체 절단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혐오의 대상을 제거했다고 해도 제거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보여주려 한다. 그 징후는 선조의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떠남)이 가져온 후과(後果)와 임진왜란 후 의병들이 반란군이 될 것을 우려했던 선조의 편집증에서 나타난다.

 

저항과 시대적 결속

영화 <전,란>은 무엇보다 선조 시대에 벌어진 임진왜란이 계급적 혼란을 자초했고 그로 인해 민초들이 일종의 해방감 또는 신분 상승의 기회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기대할 수 있었던 시기라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즉 반사회성의 기질이 정당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지배적 가치들에 정당하게 저항할 수 있는, 말하자면 혐오의 향연이 시대의 결속을 재편성하는 현실을 그대로 포착한 것이라고나 할까.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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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전,란>은 역사적 부조리가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이고, 신체 절단 서사는 머리를 참수하는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막대기에 걸어두는 형벌)를 점프 컷으로 실행하며, 미술적 감각은 창의력이 아니라 불에 타 주저앉은 경복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탐욕을 설정하고, 선량한 인간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라보는 것은 재현이 아니라 고증이다. 주인공끼리 나누는 한두 마디의 대사는 그래서 오히려 단순해 보인다.

 

천영, 종려의 대립각

이를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어째서 천영과 종려는 한 시대에서 만나야 했던 것일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왜 종려는 계속 낙방하고 천영은 장원급제 수준으로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무예까지 출중하여 종려를 가르치기까지 한다.) 이건 서사학에서 볼 때, 문제를 전제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손쉽게 설치할 수 있는 대립 전략 중 하나다. 대립각이 단순하면 갈등의 구조는 예민해질 수 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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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인 단순함은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 어렵게 할 때가 있기도 하다. 거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이른바 한마음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으면 안성맞춤이다. 선조의 몽진. 단순한 대립각과 선조의 몽진은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인지하는 방식을 직관적으로 구현한다.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지금의 모든 부조리와 혐오가 오차 없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는 자각은 그래서 모두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과연 현실을 필사적으로 극복해 나간 걸까?

이야기를 현실감각으로 단숨에 격상시키는 <전,란>의 이 전략은 저것은 그저 영화일 뿐이라는 안도감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수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반복되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과연 필사적으로 현실을 극복해 나간 건지 회의적으로 되묻게 된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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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란>을 보면 그런 혼란스러운 질문이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먼 과거인 걸 알면서도 여전히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 때 괴로운 이유는 집요한 그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잊고 있던 충격을 무방비 상태로 맞았을 때 드는 멍한 느낌이랄까. 마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 충격을 전제한 듯 말이다. 그건 마치 잘린 코가 잘라야 될 손가락으로 바뀐 것과 같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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