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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나기>, 뱀장어 정도는 되는 삶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나기>, 뱀장어 정도는 되는 삶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4.10.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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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1997)는 평범한 샐러리맨 야마시타 타쿠로(야쿠쇼 코지)가 아내의 외도를 알리는 익명의 편지를 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퇴근한 야마시타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여느 때처럼 아내가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낚시하러 갔다가 여느 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다. 편지의 내용이 사실임을 목격한 야마시타는 칼로 아내를 찔러 죽이고 피투성이 상태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한다. 그 후 8년 동안 감옥에 있다 가석방된 야마시타는 이발소를 하며 새 출발 하게 된다.

 

야마시타는 보호사 나카지마 스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동네 사람들과 교류하며 조용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감으로써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동네 사람들 가운데, 특히 혼자 사는 세 명의 남자들은 어딘가 야마시타를 닮은 데가 있는 인물들이다. 항상 야마시타를 데리고 밤낚시를 가는 목수는 야마시타에게 뱀장어의 생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컷 뱀장어가 머나먼 적도 바다로 가서 알을 낳고 수컷 뱀장어가 정자를 뿌리면 어린 뱀장어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밤낚시는 살인이 벌어졌던 그 밤을 거듭 소환하지만, 야마시타는 묵묵히 목수를 따른다. 야쿠자 지망생은 애인을 데리고 와서 식물처럼 살아가는 야마시타를 자극하려는 듯 눈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UFO와 접선하려고 광분하는 청년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외계인과의 만남을 고대한다.

그 청년처럼 야마시타도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진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감옥에서부터 기르던 뱀장어 한 마리뿐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그는 줄곧 “왜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질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아내에게 배신당했을 때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며 어항 속의 뱀장어처럼 갇혀 있는 상태로 지낸다. 그의 의식에서는 “아내를 사랑했기에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는 답변이 계속 맴돌지만, 무의식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답변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마시타와 같은 죄목으로 같은 감옥에 있었던 다카사키는 야마시타가 억압한 그림자 같은 인물처럼 등장한다. 마치 악몽의 한 장면처럼 밤에 이발소에 나타나 거칠게 행동하는 다카사키는 먼저 죽은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야마시타를 비난한다. 그런 다음 야마시타가 성적으로 무능해 아내가 외도를 저질렀는데 질투심에서 살해한 게 아니냐며 비웃는다. 심지어 다카사키는 편지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야마시타의 질투심이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조롱한다.

 

야마시타는 게이코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야마시타는 게이코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게이코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카사키가 야마시타의 그림자 같은 인물이라면, 외부에서 그를 혼란에 빠트리는 또 다른 인물은 그의 아내와 닮은 핫토리 게이코이다. 자살 시도를 한 게이코를 야마시타가 발견하면서 두 사람은 알게 된다. 아내를 살해한 야마시타가 아이러니하게도 죽으려던 게이코를 살린 것이다. 게이코는 돈은 많은데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엄마와 돈을 노리고 접근한 유부남 애인 도지마 사이에서 시달리다 자살까지 선택했는데, 그들과 너무 다른 야마시타에게 크게 호감을 느낀다.

야마시타는 게이코의 구애를 애써 무시하며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러나 도지마가 부하들을 이끌고 이발소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며 게이코에게 폭력을 휘두르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삶에 끼어들게 된다. 야마시타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이발소로 달려와 힘을 합해 도지마와 부하들의 깽판을 막아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모두 모여 즐거운 파티를 열며 공동체의 끈끈한 연대를 거듭 확인한다.

이발소의 소동 장면은 공동체의 가치를 부각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야마시타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된다. 서로 치고받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을 때, 게이코는 한몫하려는 듯 대나무 통발을 정신없이 휘두른다. 장어를 잡는 그 대나무 통발에 야마시타가 뒷머리를 맞고 장어가 들어있던 어항이 깨진다. 게이코의 손에 장어가 어항에서 풀려나고 야마시타의 머리가 깨진 건 곧 게이코를 매개로 한 야마시타의 해방과 각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다음 장면에서 야마시타는 혼자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 기르던 뱀장어를 놓아주며, “누구 자식인지 모르는 아이를 키우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 너와 같아졌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야마시타는 게이코가 임신한 아이를 자신의 아이가 아닌데도 키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때, 야마시타의 뒤편에서는 그의 새로운 인생을 축복하듯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야마시타는 말썽에 휘말려 가석방 조건을 어겼기에 다시 교도소로 가게 된다. 떠나기 전 야마시타는 게이코를 만난다. 그동안 게이코가 만든 도시락을 계속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받아 든다. 그가 “건강한 아이를 낳아달라”고 부탁할 때, 그녀는 “아이와 함께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야마시타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간다. 그러나 그가 경찰에게 “장어가 적도까지 갔다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게이코는 “간절히 기다리면 UFO라도 올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들의 앞날은 밝아 보인다.

 

게이코는 아이를 낳고 야마시타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한다
게이코는 아이를 낳고 야마시타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까? 그렇다고 바로 답하기에는 몇 가지가 걸린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야마시타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아주 노골적으로 연출한 다음, 게이코가 도지마와 성관계하는 장면도 그렇게 연출했다. 따라서 게이코가 야마시타의 아내와 정말 다른 사람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그녀처럼 성욕에 이끌려 야마시타를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또 마을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한 게이코는 하필 엄마의 카르멘 춤을 흉내 낸다. 그러므로 만일 그녀가 엄마와 닮았다면, 앞으로 정신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게다가 이발소의 소동 장면에서, 야마시타는 면도칼을 들고 망설임 없이 바로 도지마의 목을 공격했다. 그렇기에 그의 손에는 살인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조건이 된다면 또다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아내의 외도를 견딜 수 없어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마침내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기로 한 결심에 이르렀다. 야마시타가 뱀장어보다 낫지는 않더라도 그 정도의 삶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했기에 아마도 감독이 드리워놓은 지뢰밭 같은 함정을 무사히 통과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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