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1939년 3월 4일,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제작자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O 셀즈닉과의 오랜 협상 끝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히치콕이 할리우드에서 처음 연출한 영화는 다프네 뒤 모리에의 고딕 원작 소설을 각색한 <레베카>(1940)였다.

히치콕은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인터뷰에서 <레베카>에 대해 “그건 히치콕의 영화가 아닙니다”라고 단언했다. 셀즈닉이 영화음악, 재촬영, 편집 과정 등 영화 제작의 전 과정에 걸쳐 너무나 많은 간섭과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여러 편 연출하면서 매번 원작과는 많이 다르게 각색한다고 알려졌는데, 셀즈닉은 <레베카>가 원작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편집의 권한이 없었던 히치콕은 이 영화의 최종본이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도록 하려고 편집실에서 사용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장면들만 촬영했다고 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필름이 편집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감독과 제작자는 끊임없이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사의 가장 위대한 감독 명단에 들어갈 히치콕은 끝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지 못했는데, <레베카>는 제작자에게 수여하는 작품상을 받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히치콕의 연출 역량과 개성을 뭉개버리려고 애썼던 셀즈닉에게 영광이 돌아간 것이다.
히치콕의 전체 작품 목록을 놓고 순위를 매겨본다면, <레베카>는 상위권에 속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히치콕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점이 많은 텍스트이다. 이 영화에서 죽은 자는 보트 사고로 사망한 맥심 드윈터의 첫 번째 부인 ‘레베카’이고, 죽은 자의 지배를 받는 인물은 영국 귀족 맥심 드윈터(로렌스 올리비에), 두 번째 드윈터 부인(조앤 폰테인) 그리고 맨덜리 저택의 집사 댄버스이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죽은 레베카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행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는 두 번째 드윈터 부인(원작에서 ‘나’로만 지칭되어 이름이 명시되지 않아 영화에서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드윈터 부인으로 명시한다)의 내레이션, “어젯밤, 맨덜리에 다시 가는 꿈을 꾸었다.…”로 시작한다. 내레이션에 따라 폐허가 된 맨덜리를 돌아다니던 카메라는 “꿈에서 나의 삶에서 기묘한 시절이었던 남부 프랑스의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는 대사와 함께 드윈터 부인이 맥심을 처음 만났던 몬테카를로로 넘어간다. 따라서 이 영화 전체가 드윈터 부인의 플래시백이라고 할 수 있다.
드윈터 부인은 파도치는 절벽 끝에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은 맥심을 보고 “멈춰요!”라고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맥심을 알게 된다. 당시 드윈터 부인은 경제적 문제로 부유한 미국인 밴 호퍼 부인의 수행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드윈터 부인과 맥심은 밴 호퍼 몰래 데이트하며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다 밴 호퍼가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드윈터 부인은 맥심에게 자신의 상황을 호소하고, 맥심은 급히 청혼하게 된다. 드윈터 부인으로서는 저속하고 심술궂은 밴 호퍼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이는 많지만 멋진 외모의 부유한 맥심을 결코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드 윈터 부인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된 밴 호퍼는 시기심에 가득 차 독설을 날린다. “귀부인이 뭔지도 모르는 너는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에 어울리지 않아. 맥심이 너를 정말 사랑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안주인이 없는 집이 신경 쓰이고 혼자 사는 데도 지쳤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 독설은 젊고 나약하고 소심한 드 윈터 부인 자신의 마음의 소리와 일치함으로써, 맥심과의 계급과 부의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은 더욱 커지게 된다.

신혼여행을 마친 드윈터 부인은 맥심을 따라 맨덜리 저택으로 간다. 드윈터 부인은 상상 이상으로 광대한 저택의 규모와 즐비하게 늘어선 하인들을 보고, 기가 질린다. 저택에 도착하기 직전에 내린 폭우로 드윈터 부인은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초라한 행색이 되었기에 더욱 주눅이 든다. 여기에 집사 댄버스가 가세한다. 댄버스에 의하면, 레베카는 지성과 교양과 재치가 넘치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벽한 여자로서 만인의 숭배 대상이었다. 밴 호퍼는 맥심의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을 보고 “죽은 아내 레베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잊지 못해서”라고 설명했는데, 댄버스 역시 “맥심은 레베카가 죽은 상처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드윈터 부인은 맥심을 두고 죽은 레베카와 경쟁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맨덜리에는 도처에 레베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레베카가 사용하던 방뿐만 아니라 이니셜 ‘R’이 새겨진 베게 커버, 손수건, 편지지 등이 공격하듯 나타날 때마다 드윈터 부인은 점점 위축된다.
댄버스는 히치콕 영화에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동성애자 캐릭터이다. 댄버스가 레베카에 대한 숭배를 넘어 연인 이상으로 흠모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댄버스는 끊임없이 레베카를 찬양함으로써 드윈터 부인을 열등감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댄버스가 맥심이 선물했다는 레베카의 모피를 드윈터 부인의 뺨에 들이대는 장면, 그리고 “레베카의 발소리가 모든 방에서 들려요. 죽은 자가 돌아와 산 자들을 지켜보는 거죠. 마님이 맨덜리로 돌아와 당신이 주인님과 같이 있는 걸 보시지 않을까요?”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정말 으스스하다. 맨덜리는 맥심이 아니라 죽은 레베카가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얘기다. 레베카에 대한 댄버스의 찬양에는 각종 셀럽을 향한 팬들에게서 발견되는 ‘병적인 나르시시즘’도 작용하고 있다. 찬양하는 대상과 동일시 하면서 그들이 위대하고 훌륭할수록 자신들도 그렇다는 환상에서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댄버스가 하녀임에도 불구하고 맨덜리의 새로운 안주인을 무시할 만한 근거와 정당성이 구축된다.

드윈터 부인은 섹시하게 꾸미거나 저택에 걸린 귀부인의 모습으로 변신해 맥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댄버스는 “주인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맨덜리를 떠나요”라며 드윈터 부인을 레베카 방의 창문에서 투신하도록 유도해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이때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던 배가 떠오르면서 레베카의 시신이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맥심이 의기소침하고 침울했던 진짜 이유가 밝혀진다. 레베카는 완벽한 여자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결혼한 다음에도 남편을 두고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다. 맥심은 레베카에게 환멸을 느꼈으나 가문의 명예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영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커플 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레베카는 맥심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 맨덜리의 후계자로 키우겠다고 비웃으며 말한다. 격분한 맥심은 레베카를 한 대 쳤는데, 바닥에 쓰러지면서 연장에 머리를 부딪쳐 죽게 된다(원작에서는 맥심이 레베카에게 총을 쏴서 살해한다. 당시 할리우드 검열의 제작 규범에서 맥심이 레베카를 죽인 게 명백하다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다소 모호하게 각색했다). 맥심은 레베카의 시체를 배의 선실로 옮기고 배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게 했다. 그런 다음 신원미상의 시신을 레베카로 확인하고 납골당에 안치했다. 이후 맥심은 레베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과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아왔다. 맥심은 레베카의 시신이 나타나자, 결국 “레베카가 이겼다”며 절망에 빠진다.
그러므로 레베카를 제대로 매장하지 못한다면, 죽은 레베카가 살아있는 맥심과 드윈터 부인을 영원히 지배하게 될 것이다. 맥심이 살인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레베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드윈터 부인은 이보다 맥심이 레베카를 사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녀가 레베카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확신할 때, 레베카는 패배하게 된다.

또 법정에서 레베카의 죽음이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레베카의 자살로 처리됨으로써, 맥심은 무죄로 풀려난다. 레베카의 죽음이 문란한 여성에게 가해진 당연한 처벌로 치부됨으로써, 레베카는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레베카의 지저분한 사생활이 공개되고, 레베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했다는 실망감 속에서 댄버스의 환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때 죽은 레베카는 힘을 잃는다. 환상이 무너지는 걸 견딜 수 없는 댄버스는 맨덜리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맨덜리와 운명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맥심에게는 진짜 죄가 없는 것일까? 히치콕 영화에서 반복되는 질문이다. 드윈터 부인이 여전히 꿈을 통해 맨덜리로 거듭 소환된다는 점, 맨덜리가 불에 탄 상태 그대도 남아있다는 점은 레베카가 완전히 매장되지 않았다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가 여전히 그들 부부에게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P.S.: 2025년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를 다루려고 한다. 대학원 영화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기 아주 훨씬 이전인 초등학교 때 텔레비전에서 히치콕의 <백색의 공포/스펠바운드>를 보고 매혹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 영화를 계기로 해서 이후 텔레비전에서 하는 모든 영화를 섭렵하게 되었다. 히치콕 영화는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을 상기하면서 영화를 시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올 한 해 동안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 돌아보려고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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