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바운드>(1945)는 앨프리드 히치콕과 계속 불화 상태에 있었던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제작한 영화이다. <에드워즈 박사의 집>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소재로 하고 있다. 때문에 히치콕은 시나리오 작가 벤 헤크트와 함께 코네티컷과 뉴욕에 있는 정신병원과 정신의학 수용소 시설을 찾아가 실제 이야기를 많이 수집했다. 또 정신의학 관련 내용에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명 인사들의 치료 전문의로 알려진 메이 롬에게 자문을 맡겼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2차 세계 대전 시기를 지나면서 미국에 대중적으로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1950∼70년대 미국의 상류층에서는 정신분석을 받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히치콕 자신도 정신과의 ‘카우치’에 누워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히치콕은 “꿈을 믿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프로이트의 이야기는 허튼소리에 불과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히치콕은 <스펠바운드> 이외에도 정신분석과 연관된 영화를 여러 편 연출했는데, <싸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등장해 히치콕 영화답지 않게 연쇄살인범 노먼 베이츠의 상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스펠바운드>는 히치콕 자신의 평가처럼, 다소 어설프게 정신분석학을 적용한 사례인데, 그럼에도 정신분석과 관련해 흥미로운 점이 많은 영화이다.



먼저 이 영화의 플롯을 스토리로 정리해서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의 주인공 존(그레고리 펙)은 어릴 때 계단 난간에서 미끄럼을 타다 동생을 앞으로 밀어트려 죽게 했다.(사진 1, 2) 물론 의도가 전혀 없는 비극적인 사고였지만, 존은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어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의식에 억압해버렸다. 따라서 그 사건은 존의 의식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어른이 된 존은 어느 날 우연히 정신병원 원장 머치슨이 정신과 의사 에드워즈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존은 큰 충격을 받고 그 여파로 무의식에 억압했던 기억과 죄책감이 왜곡된 형태로 귀환하기 시작한다. 존은 먼저 에드워즈가 부임할 예정이었던 정신병원인 녹지원에 찾아가 에드워즈 행세를 한다.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존의 트라우마가 에드워즈의 죽음을 부인하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즈의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다. 녹지원의 정신과 의사 콘스탄츠(잉그리드 버그만)가 “정체가 뭐냐”고 질문하자, 존은 자신이 에드워즈를 죽였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억상실증 증상을 보인다.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존으로 하여금 에드워즈의 살인자라고 자백하게 만든 것이다. 존이 나타내는 또 다른 증상은 흰색 바탕에 줄무늬 같은 걸 보면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사진3) 그 이미지가 동생을 죽였던 순간의 이미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콘스탄츠는 존이 살인자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그녀는 존이 살인자로 체포되기 전에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존과 함께 예전의 스승인 브룰로프 박사를 찾아간다. 머치슨과 에드워즈를 만나고 살인사건을 목격하기까지의 사건은 존의 꿈에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존은 브롤로프 박사에게 꿈의 내용을 이야기한다.(사진 4, 5)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히치콕은 미술품의 수집과 투자에 열을 올렸으며, 특히 후기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한다. 히치콕은 처음부터 이 꿈 장면을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원래 계획에서 꿈 장면은 훨씬 길이가 길었고 제작 규모도 훨씬 거창했다. 그러나 달리에게 지불한 돈의 액수가 너무 많은 게 못마땅했던 셀즈닉은 꿈 장면의 길이와 예산을 확 줄여서 손실을 벌충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기분이 크게 상한 히치콕은 다른 장면을 다 포기하더라도 달리의 꿈 장면은 반드시 영화에 포함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보는 존의 꿈 장면은 셀즈닉과 히치콕이 밀고 당기는 갈등 속에서 도출된 결과물이다. 비록 원래의 계획에서는 많이 후퇴했지만, 여전히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달리의 회화를 동영상으로 구현한 꿈 장면이다(어릴 때 이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을 때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의 방영 제목은 <백색의 공포>였다).
콘스탄츠는 좀더 적극적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존에게 스키를 타러 가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이 스키를 타고 질주할 때, 그들 앞에는 절벽이 있다.(사진 6) 여기서 콘스탄츠는 <레베카>, <의혹> 또는 <의혹의 그림자> 같은 히치콕 영화의 여주인공들이 마주했던 혼란과 공포에 봉착하게 된다.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존이 에드워즈를 살해한 진짜 범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절벽에 떨어져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절벽에 도달하기 직전, 미끄러지는 상황이 비슷하게 반복되자 존은 그토록 오랫동안 완강하게 억압했던, 동생이 죽었던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존은 콘스탄츠를 추락의 위험에서 구해내며, “동생을 죽이지 않았어, 그건 사고였어”라고 소리친다.

이제 나머지 장면에서 존은 누명을 벗고 콘스탄츠는 존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머치슨이 에드워즈를 살해한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대목에서 존이 실제로 경험했던 트라우마적 사건이 꿈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나타났는지 하나씩 밝혀내는 설명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히치콕 영화다운 연출은 콘스탄츠가 존(그가 에드워즈로 행세하고 있던 시기)을 향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밤중에 그의 방으로 찾아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콘스탄츠는 에드워즈가 저술한 책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며 뭔가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내지만, 진심을 감추지는 못한다. 존이 그녀의 구애에 화답해 두 사람이 처음 키스할 때, 그들 뒤로 복도의 문들이 차례로 열린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콘스탄츠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냉정하고 딱딱한 얼음공주 같은 인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문이 열리는 장면은 그녀가 존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이 모두 열리고 나면 마지막에 벽이 나타나고, 이 벽의 이미지와 키스하는 두 사람의 이미지가 오버랩 된다.(사진 7) 그 벽이 암시하는 장애를 해결하고 두 사람은 문밖으로 나가서 결국 완벽한 연인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P.S: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엠파이어스테이트 호텔에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장면으로 카메오 출연을 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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