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6월호 구매하기
기다려서 먹은 사과가 맛이 있을까?
기다려서 먹은 사과가 맛이 있을까?
  • 안치용
  • 승인 2018.12.26 14: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도 길에 제법 차가 많았다. 크리스마스이브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평소 휴일 저녁보다는 확실히 길이 막혔다. 라디오에서 마침 이 시간의 일상이 실시간으로 흘러나와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운전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차선 안에서 달리거나 차선 안에서 서 있거나 차선을 가로지른 선 앞에서(물론 차선 안에서) 대기하거나 밖에 없어서, 멍 때리거나 바하를 듣거나 라디오를 들거나 중의 (공식적으로는) 하나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어디서나 밥 먹기 위해 줄을 섰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떡볶이를 먹는 데에 30분 줄을 선 사연을 라디오 프로 진행자가 전해주었다.

압권은 2시간을 기다린 어느 청년의 사연. “배고팠을 텐데 함께 참고 기다려준 아무개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

갑자기 어느 식당에서 무엇을 먹기 위해 기다렸는지 궁금해졌다. 크리스마스에 연인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선택한 식당의 메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추억의 내용이 음식이 될지 그 기다림이 될지 혹은 다른 무엇이 될지.

훔친 사과가 맛있다

1984년 개봉된 한국영화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의 포스터(사진), 그때 기준은 모르겠지만 지금 미감으로는 확실히 좋은 평을 받지 못하지 싶다. “가을과 함께 온 관능의 세찬바람, 애마부인2의 오수비, 그녀가 지금 사과밭에 불을 질렀다는 문구가, 오수미 역의 오수비가 앙가슴 윗부분을 제외한 전신이 온통 사과 속에 묻혀 있고 사과를 쥔 오른 손을 내밀며 고혹(!)적인 표정을 짓는 사진 위에 찍혀 있다. 당연히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는 영화 제목 또한 큰 글씨로 사진 우하(右下)쪽에 들어있다.

<애마부인2>의 주연배우 오수비와 사과. 포스터 하단에 뜬금없이 혹은 친절하게 들어간 “A RIFE APPLE”이라는 문구와 이 문구보다 조금 더 큰 글씨로 적힌 미성년자 관람불가”. 식상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예측가능하고 솔직하게도 색조는 전반적으로 붉은 계열이다.

이 순박한 영화 포스터는 추가적인 사고의 여지나 상상의 가능성을 남기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사과=오수비”, “먹을 것=섹스를 표현하고 있어 일말의 외설성이나 선정성마저 상정할 수 없게 된다. 외설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obscenity’(또는 ‘pornography’)이며 형용사 외설적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오브신(obscene)’인데, ‘obscene’의 단어조성은 ‘ob+scene’으로 무대(scene) 에서 일어난 것을 뜻한다. (연극 등의 공연의) 무대 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선정성(煽情性)자는 부채질해서 부추기는 행동을 의미하는데 가 들어간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염이나 욕정의 불길이 타오르도록 부채질해 조장하는 모습이다.

()+으로 ‘ob+scene’만큼이나 상징적이다. 음란성을 더하여 살펴보면 선[, +]에서 남녀의 성기가 어울리는 모습(과거 유시민씨가 해일 오는데 조개 줍는다고 한 발언이 두고두고 씹히는 까닭은 유씨가 다룬 사건과 조개라는 비유의 과도한 직접성이 초래한 부박 때문이었을 것이다.)이 연상되고, 남성 중심으로 생각하면(사실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음란의 역사 또한 남성 중심의 역사였다.) 음경이 발기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음경의 발기를 유발하는 것이 알다시피 크게 허리상학의 심리적 자극과 허리하학의 물리적 자극으로 대별되는데, 발기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란 비유를 쓴다면 각각을 마저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 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所産的 自然, Natura Naturata)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싶다.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는 포스터를 보면 외설성이나 선정성이 오히려 고매한 가치처럼 여겨지게 된다. 이 포스터는 그저 메마른 성교를 연상시킬 뿐이다. 주체와 대상이 안 보이고, 그러니 엄밀하게 말해 성적 대상화가 이뤄졌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저 남녀의 성기들이 물기 없이 부딪히는 장면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헨리 밀러가 <북회귀선> 등의 소설에서 보여준, 인간의 몸과 정신을 관통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아우른 외설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역설이 발생한다고 하자.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와 같은 유형의 영화는 공식적으로 상영되는,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말하자면 (대중)예술이다. 대조적으로 소설 <북회귀선>은 판매금지 처분을 당하는 등 그 섬세한 외설성으로 인해 글자 그대로 한동안 무대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용어 자체에 집착하면,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소설 <북회귀선>, 물론 발표 당시의 기준이지만 외설에 해당한 반면 영화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는 외설이 아니다.(영화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의 탈()외설성은 헤어 누드나 영국 빅토리아조의 성적 위선 등 다양한 배경사를 통해 심층적으로 논의할 수 있겠다 싶지만 이 자리에선 생략한다.)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는 경계 밖 성욕의 방식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두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로, 당연히 경계 안 성욕의 방식과 우선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경계 안의 성욕의 방식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명선언과 동시에 도덕적 우위가 선포되고 그 우위가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물론 그 경계가 시대 및 사회 상황에 따라 가변적임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예컨대 근대의 일부 경건한 개신교 목사는 부부관계를 맺을 때 이른 바 정상체위만을 고집했다고 전해진다. 무엇이 정상인지는 논외로 하고 핵심은 전해졌다는 데에 있다. 선언과 공유가 중요하지 실제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개별적으로 그들이 실제 부부 생활에서 어떤 체위를 구사했는지는 내밀한 일이어서 신만이 알 수 있으며, 신은 그들의 체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것이기에 인간들 또한 실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터이다.

요약하면 무대 바깥의 성적 사건은 무대 위의 사건에 의해 범위와 성격이 규정된다. 즉 경계 밖 성욕의 방식을 다룬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는 피동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는 무대 위와 마찬가지로 무대 밖에서 양식화와 제도화를 꾀한다. 양식화와 제도화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가 사드 후작이다. 사드 후작 같은 이가 행한 작업은 그러나 완전히 창의적일 수는 없었다. 성적 사건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스스로 전개되었기에 외설과 음란, 금기의 등장은 사회적이고 공식적인 논의의 장인 무대의 출현 이후의 일이다. 사드 후작처럼 성적 사건에서 인간자유를 추구한 이들은 무대 위의 제도화와 규범화에 맞선 일그러진 미러링으로 무대 위의 가식을 폭로한다. 거울에 무언가 비춰지려면 거울 앞에 누군가가 서야 했다.

사드 후작과 경건 목사의 대결의 틈새

인간에게 오랫동안 신이 주어졌다면, 근대국가 이후의 인간에겐 이제 자본이 주어진다. 숨은 신은 더 꼭꼭 숨고 자본은 우리에게 시장화로 알려진 기제를 작동하여 성적 사건의 무대에 개입한다.

숨은 신이 뛰쳐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본은 무대의 범위를 확장한다. 자본주의의 목표는 무대 밖을 없애 세상을 남김없이 무대화하는 데에 있다. 무대 위와 무대 밖을 구분한 허위와 위선이 자유의 이름으로 격파되면서 가능한 많은 것이 제한 없이 무대 위에 오른 것은 분명 진보이고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몰고온 이 긍정과 진보는 양면을 갖는데, 어둠이 빛보다 크다는 데에서 우리 시대의 고난이 있다. 가능한 많은 것을, 바라건대 전부를 무대 위에 올리고자 하는 이유는 무대 위에 오른 모든 것을, 그것이 물건이든 현상이든, 시장의 권능에 힘입어 거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세상에서 상품을 파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상업화하는, 신의 탄생에 필적할 일대 사건을 기도하여 사실상 종교에 승리했으며 자본이란 세계의 유일신을 만드는 데에도 성공한 듯하다.

자본주의의 성적 사건에서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로 단죄받아 배제되는 범위는 극도로 줄어들어 거의 모든 것이 무대 위에서 양식화하고 제도화하여 통용된다. 즉 거래된다. 친밀성과 사적 영역마저 지배하는 현재의 고도화한 자본주의에 이르면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는 무대 밖과 무대 안에 두루 걸쳐지게 되어 사드적인 본래의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는 거의 종적을 감추고 외설과 포르노그래피란 이름의 마케팅이 범람하여 종국에는 무대를 쓸어버린다. 이제는 무엇이 외설과 포르노그래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진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가 붕괴되고 영역과 한계 또한 불분명해진다.

이 시대에 사드 후작 같은 이가 태어난다면 패배자가 될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드의 정신사적 활동범위를 정확하게 진단한 미셸 푸코가 무대 위와 무대 밖이 잘 구분되지 않는, 관점에 따라 무대 자체가 사라진 우리 시대의 특징의 하나로 복종하는 신체를 제시하게 되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푸코의 영혼은 신체의 감옥이란 언명까지 연결하여 이해하면 푸코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성욕의 상을 그릴 수 있다. 복종하는 신체의 전제는 복종시킨 영혼이고, 영혼의 복종 과정에서 탈주체화를 거쳐 획일화하고 상업화한 욕망을 산출한다. 외부의 억압에 어쩔 수 없이 굴종한 노예적인 삶이 아니라 복종을 내면화한 노예적인 삶이 현대인의 욕망이자 삶이다. 노예 상태를 자각하고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하였지만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 주어진 노예가, 노예임을 모르고 자유인으로 알고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사는 존재로 격상되었다고나 할까.

가식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과거 정상체위를 고집한 게 개신교 경건목사의 표식이었다면 이제 목사 성생활의 체위가 경건함과 무관하다고 할 때 굳이 따지자면 무엇으로 경건의 표식을 삼아야 할까.

모든 것이 외설이지만 실제 외설은 사라진 자본의 세상에서, 외설은 경건한 외설과 저속한 외설 등으로 위계화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공식적인 경건과 내면의 외설 간의 불일치와 갈등, 위선이 사라짐으로써 마침내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몸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지만, 그 사이 최후의 소도로 간주된 인간의 영혼은 무엇인가에 포획되고 말았다. 외견상 욕망과 몸의 자유를 누리는 현대인이 실상 노예적인 욕망과 노예적인 또는 푸코식으로 말해 반응하도록 훈육된 몸을 부여받았음을 인식하기란 앞서 말하였듯 불가능하다. 신을 추방한 근대성의 기획은 주체의 확립에서 시작하였지만 끝은 주체의 소멸로 귀결한다. 이 아이러니의 풍경을 바라보며 숨은 신은 미소 짓고 있을까.

 

이제 이 자리에서 하려는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모든 이야기를 다 하자면 책 한 권 분량으로 한 없이 늘어질 것이기에 시작한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한국인 중에는 줄 서서 먹는 이들이 많다. 배달이라는 수단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배달이라는 게 줄서기의 회피로 보이기에 크게 보아 줄서기와 다르지 않다.

줄서기와 배달로 대표되는 음식 소비 행태의 근간에는 위계화의 방식으로 정돈된 정보가 존재한다. 여기에 인터넷TV를 통해 위세를 떨치고 있는 ‘MUK BANG’쿡방까지 맛과 음식의 정보그물은 한국인의 취향과 미각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랑하는 사람과 2시간을 기다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은 물론 아름답다 할 것이지만, 기다림의 시간마저 맛있게 여겨졌겠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해명되지 않는 게 남는다손 쳐도 그래도 아름답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일상에서 목격되는 기다림의 식사문화는 꼭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흔히 쓰이는 용어 중에 푸드 포르노라는 것이 있다. 1984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잘린 카워드(Rosalind Coward)<여성의 욕망(Female Desire)>이란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식욕과 성욕의 유사성과 근접성을 감안할 때 푸드 포르노란 용어에서 우격다짐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두 가지 욕망 혹은 사건의 작용기제의 동일성까지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두 가지 욕망의 참여자가 다르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성적 사건에서는 실제 주체와 대상이든 유실된 주체와 대상이든 상대와 결합하는 상호욕망이, ()의 사건에서는 개별적 식욕을 함께 해소하는 공통욕망이 작동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둘 다 몸의 사건이라는 한계 내에 위치한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나도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훔친 사과가 진짜로 맛이 있을까? 그렇다면 줄 서서 먹는 사과도 맛이 있을까?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을 받아보시고, 동시에 모든 PDF와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PDF와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