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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대학과 도래하지 말아야 할 대학
도래할 대학과 도래하지 말아야 할 대학
  • 이은지 l 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29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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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가 쏘아올린 온라인 강의

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도 계속되는 가운데, 온라인을 활용한 비대면 활동이 적극 권장되고 있다.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가장 파장이 큰 영역은 아마도 교육 분야일 것이다. 다수의 학생들이 밀폐된 공간에 모여 수업을 진행하는 기존의 교육방식은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기여하리란 우려를 피해갈 수 없었고, 정부는 초중고 개학을 거듭 연기한 끝에 ‘온라인 개학’이라는 사상초유의 결정을 내려 시행 중이다.

초중고보다 먼저 개강한 대학들 또한 자체적으로 기간을 정해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여러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가령 이용자들이 동시 접속하며 서버가 마비되는가 하면, 강사들은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강의자료를 제작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고, 학생들은 대학 캠퍼스라는 물리적 인프라를 활용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강의품질의 저하를 문제 삼는 목소리가 나왔을 뿐 아니라, 무려 16년 전에 제작한 온라인 강의를 그대로 재사용해 물의를 빚은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은 과도하게 지불된 대학등록금을 환불하라고 대학 당국에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가 및 임금 상승률에 대비해 과도하게 추징돼 온 대학등록금의 부당함이 꾸준히 제기된 상황에서 대학등록금 환불 요구는 새삼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새삼스러운 점이 있다면, 온라인 개강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등록금의 대차대조표를 객관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지역 내 교통의 요지에 자리해 그럴듯한 건물들로 채워 넣어진 캠퍼스 부지를 이용할 수 없다면, 양질의 강의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강사진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지 않다면, 철저히 서열화돼 강력한 문화자본으로 작동하고 있는 대학이라는 브랜드를 대외적으로 활용하고 과시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천정부지로 치솟은 대학등록금은 지불할 가치가 없게 되는 셈이다.

위에 나열된 대차대조표의 목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오늘날의 대학은 더 이상 교양시민을 육성하고 지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상아탑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높아진 등록금은 오늘날의 대학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임을, 나아가 이 서비스에 기꺼이 값을 지불하는 이들로 하여금 대학의 브랜드 가치를 사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곳임을 증명하는 척도가 됐다. 이로 인해 곤혹스런 상황이 발생한다. 대학등록금 인하 투쟁이 한편으로는 서비스 기업으로 전락한 대학을 거부하는 정치적 투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비스의 개선을 요구하는 소비자주의적 움직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국민국가의 몰락과 대학의 상품화

대학은 중세 유럽을 지배하는 신학 체계를 존속하기 위한 학문공동체로서 출발했다. 이후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분리되고 세속화된 근대 사회에서, 대학은 종교를 대신해 사회를 떠받치게 된 민족국가를 학문적으로 의미화하고 연구하는 이념적 기구로 기능했다. 사회가 국민국가 단위로 분절돼 발전하면서 정초된 합리적 이성의 수호자였던 칸트는, 대학이 국가에 봉사하는 기관인 동시에 이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근대 대학에서 국가 이념과 합리적 이성은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 있었다. 대학이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교육과 연구 활동을 수행해온 것은 이런 맥락과 닿아 있다. 이런 대학 모델은 독일이 근대적 국가 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구상한 것이다. 

한편 한국의 대학은 미국 대학 모델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국인 1.5세대 학자로서 한국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머무르며 기업화된 한국 대학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서보명은, 『대학의 몰락』(2011)을 통해 한국 대학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근대 초기 한국사회에는 성균관으로 상징되는 유교 모델과 미국 선교사들이 세계 선교의 일환으로 세운 미국식 선교학교 모델,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일본식 제국대학 모델, 이에 대항한 민중운동의 일환이었던 민립대학 모델이 혼재돼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 직후 미군정 체제하에서 미국 주립대학 모델이 이식되면서 백화점식으로 분업화된 단과대학이 정착된다. 미국의 주립대학 모델은 주 예산으로 사회와 산업에 유용한 지식을 가르치는 실용주의적인 의도가 다분한 모델이다. 한국의 대학은 식민화의 타율적인 제도이식의 역사와, 국가의 근대화 및 산업화 요구가 맞물려 탄생한 것이다.

영문학자인 동시에 문화이론가인 빌 레딩스는 『폐허의 대학』(2015)을 통해서 오늘날의 대학이 국민국가의 이념적 기구가 아닌 관료주의적 수월성에 입각해 작동하는 기업조직이 돼가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의 중심에는 국가가 더 이상 개인을 주체로 형성하는 단위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 놓여 있다.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태생적으로 주어지기는 하지만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마치 쇼핑을 하듯 더 나은 국가를 선택해 이민을 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저자는 이런 풍조를 ‘경제적 선택’에 따른 경우가 지배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듯 민족국가와 그 문화는 경제적인 이해에 따라 소비하는 품목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게 됐다.

민족국가의 핵심 기구였던 대학은 이처럼 국가의 성질이 변화된 상황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지금의 대학 현실은 전적으로 미국 대학의 모델을 따른 것이다. 미국의 대학은 20세기 초 이민자들이 증가하고 입학생의 출신이 다양화되면서 국가이념이나 민족문화를 중심으로 운영하기보다는, 관료적이고 행정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오늘날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세계화’의 동의어로 ‘미국화’를 사용하기도 하듯, 미국은 초국적인 가치체계를 국가적 차원에서 정립해왔다.

지금의 세계화 열풍 속에서 서구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이들이나, 한국(정확히는 서울)으로 유학을 오는 이들은 해당 국가를 문화 상품으로 소비하는 이들인 셈이다. 대학은 대학대로 이런 상황을 브랜드 가치 상승 및 영리 추구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국민국가와의 연계성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대학은 마치 다국적 기업과 같은 초국적, 관료적 합리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경제적인 합리성이다.

 

대학 이후의 대학

그러나 아무리 경제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더라도 대학은 여전히 특정 국가의 영토 안에 속해 있으며 그곳의 민족적, 문화적 가치를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지리적 특수성마저 초월하며 세계시민을 대상으로 해 주목받고 있는 곳이 미네르바 스쿨이다. 2014년 개교한 이 학교는 캠퍼스가 없다. 재학하는 동안 서울을 포함한 전세계 7개 도시를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온라인으로만 강의를 듣는다. 따라서 국경을 경계로 이뤄지는 각종 규제를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캠퍼스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대부분의 투자금을 교육에 집중할 수 있다. 학비도 기존 사립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미국적인 수월성과 합리성을 극도로 추구한 형태의 이 대학은 국민국가라는 단위체가 유명무실해져가는 오늘날의 상황이 요구하는 시민주체를 양성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이런 유형의 대학은 기존의 대학이 지역 단위 공동체에 져야 했던 각종 책무를 면제받는다. 또한 보다 혁신적인 기업형 인재의 배출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능주의에 매몰돼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위의 대학 모델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다. 국민국가의 이념적 요구와 초국적인 수월성의 요구 사이에 끼어 괴이한 존재가 된 대학이 처한 모순에 처방전이 될 수도 있다. 가령 국내의 대학들을 미네르바 스쿨처럼 운영한다면, 서울과의 지리적 접근성을 중심으로 서열화돼 있는 대학 간 위계를 상당 부분 허물 수 있다. 지방의 학생들은 서울로 ‘유학’ 오느라 불필요한 주거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된다. 캠퍼스가 필요 없으니 기존의 부지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부지를 관리하던 비용은 강사진을 고용하는 데 투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는 문제적인 대학을 탄생시키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대학 모델이 종교성이든 민족성이든 공동체적 가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데 반해, 이 새로운 유형의 대학은 그런 측면으로부터 사실상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교육은 왜 교육하지 않는가』(한울, 2019)에서 헝가리 출신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교육이 유례없는 지구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수사가 현재의 교육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수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던 ‘과거’라는 그릇된 대비를 전제함으로써 과거를 폐기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본령임에도 말이다.

흥미로운 건, 코로나19 정국 이후 미네르바 스쿨과 같은 모델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프랭크 푸레디가 지적한 왜곡된 접근에 기초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혁신을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기되는 주장들은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새로움에 떠밀려 공동의 세상을 떠받치는 과거를 가차 없이 밀어버리는 오류야말로 남의 손에 지배당하던 시절의 것으로 남겨둬야 마땅하다. 

푸레디가 주장한 바와 같이, 교육이란 과거를 보존함으로써 새로움을 맞이하는 것, 그렇게 공동의 세상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래할 대학’과 ‘도래하지 말아야 할 대학’을 신중하게 구별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공동체 합리성 위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글·이은지

문학평론가. 2014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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