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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는 왜 계속되어야 하나’
‘쇼는 왜 계속되어야 하나’
  • 이호 | 영화평론가
  • 승인 2020.11.3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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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영평 10선

배즈 루어먼의 <물랑루즈>에서 극장주인 지들러는 “쇼는 계속돼야 한다(The Show must go on)”라고 비장하게 노래했다. 듀크는 극장과 여자를 차지하려 들고, 배우들은 죽음과 사랑 사이, 혹은 권력과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조만간 선택을 해야 한다. 여주인공 새틴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연인 크리스천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뒤이어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는 공연을 하게 된다. 지속가능한 삶(Zoe)을 위해 목숨(Bios)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과 시장 사이에서… 2020년 한 해 동안의 한국 영화 10편을 반추해 보는 페이지 위에서 새삼 이 영화가 떠오르는 것이 우연만은 아니리라. 

 

 

그래도 그들은 우리보다 행복했던 듯하다.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이념)이 있었고, 예술이 있었다. 어쨌든 ‘극장’이 있었으며, 미워할 수 있는 ‘권력자-부르주아지’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갈등’이라는 걸 할 수가 있었고, 선택을 통해 자기 운명을 결정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풍족하지 못하다. 우리들은 어땠던가. 먼저, 극-장. 극의 장(umwelt)이 극도로 위축됐으며, 극의 유통망에 ‘고객님’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밀폐·밀집된 장소에서 마음 편히 극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TV 극장과 온라인 극장들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모르되, ‘영화 극장’에 된서리가 몰아쳤다는 점은 쉽게 수긍이 간다.

그리하여 올해 한국 영화의 추수기는 빈한한 가을 들녘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긍정의 힘’을 발휘해 말해 보자. 이런 국면에서도 영화는 만들어졌고, 개봉했으며, 이런저런 형태로 이야기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환등상을 뿌려줬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에게도 쇼는 계속됐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뜬금없이 근본적인 질문이 솟아올라 새삼 묻게 된다. “쇼는 도대체 왜 계속돼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극장 주인도 아닌데 말이다. 

 

삶과 죽음, 참으로 시의적절한 테마

<물랑 루즈>를 뒤로 하고 ‘한국 영화 평론가 협회’가 선정한 <2020년 영평 10선>의 작품들을 반추해 보도록 하자. 다양하고 다질적인 영화들이 모여 있는 만큼 그것들을 한 번에 묶을 수 있는 범주는 커다란 것이어야 할 터인바, 삶과 죽음이라는 모티프로 이들을 묶어볼 수 있을 듯하다. 어떤 영화든, 어느 해이든 그럴 수 있겠지만,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이 시즌에 “참으로 시의적절한” 테마가 아닐 수 없다. 

“죽으려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 “삶 쪽을 향해 죽는 것과 죽음 쪽을 향해 사는 삶”(모리스 블랑쇼)도 있다. 공교롭게 올해의 영평 10선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삶과 죽음의 테마 위에서 변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 <남산의 부장들>은 과거 대통령의 죽음과 그를 죽였던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형을 죽인 사람을 죽이기 위해 찾아오는, 죽음의 사신(이정재)으로부터 딸을 살리기 위해 필사의 도주와 격돌을 다룬 이야기에 해당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할아버지가 죽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한다. <백두산>은 한반도 전역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화산 폭발로부터 소문자 가족과 대문자 가족(국가)을 살리기 위해 초죽음의 무기인 핵무기를 들고 분투하는 내용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감독의 돌연한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환경으로 내몰린다. 다른 영화들도 풍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 즉 죽음(비존재)을 강제하는 조건들에 맞서 삶을 창안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범주가 너무 헐거운가. 그렇다면 햄릿은 어떨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했던 햄릿의 말을 조금 확장하자면 그는 결국 “존재냐 비존재냐”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삶이 삶답지 못할 때, 삶을 삶답게 만들지 못하는 조건들이 강력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가끔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기를 멈출 것인가 묻게 된다. 그것은 절망으로 인해 타나토스의 끌개로 이끌리는 죽음의 궤적들이기도 하지만, 진정 충만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의 뒤집힌 모색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비존재할 것인가.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개별 작품들로 향해 보자. 

 

1. 남산의 부장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영화는 <남산의 부장들>이다. 이 영화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자, 한국 현대사의 기괴한 변곡점이 됐던 10.26 사건을 뛰어난 심리극으로 변환시킨다. 궁중비사의 저급한 흥미본위로 떨어뜨리지 않은 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한 인물의 내면성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주인공 심규평(이병헌)은 ‘오야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친구 박용각(곽도원)을 죽이라는 살해 명령을 내린 냉혈한이면서, 시민들의 시위를 탄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우리가 왜 목숨을 걸고 군사혁명을 했느냐?”고 소리쳐 물을 수 있는, 나르시스적이면서도 순수한 낭만주의자의 면모, 자신도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욕망의 속삭임에 대통령을 저격하는 인물이다.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이처럼 한 인간 안의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욕망의 중첩에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 대는 것부터가 절반의 성공이다. 마치 새롭게 번안된 햄릿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햄릿의 고뇌가 한국현대사의 실존 인물과 겹쳐졌다고 본다면 무리일까. 누가 죽였는가가 아니라 ‘왜 죽였는가’라는 이유를 탐구해 들어가면서 지금까지도 유령처럼 달라붙고 있는 망령의 시대를 한 인간과 시대의 미스터리로 다뤄 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살해 동기를 뚜렷한 이유로 제시하지 않고 해석적 여백의 공간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다. 영화가 살해의 이유를 말해줬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영화 말미에 뚜렷하고 확신에 넘치는 어조로 자신의 살해 동기를 밝히는 육성 녹취가 울려 퍼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 언표를 그대로 믿지 못한다. 그의 언술은 법정에서 자신 행위의 정당성을 혁명이라는 대의에 정초 지으려 계산된 언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죄가 드러난 다음에 뉘우치는 반성이 순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다. 누군가의 죽임과 죽음이 다음 시대를 열었고, 그 시대는 그 다음 시대를 만들어 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 시대보다 더 정교한 악의 시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날 마냥 흥겨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2.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그저 ‘미친 놈’으로 치부될 수 있었던 인물에 입체감을 부여한 것이 <남산의 부장들>이라면 ‘미친 또라이’에 불과할 인물을 문제적 주인공의 형상으로 만든 공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이정재)에게 돌아갈 것이다. 먼저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레이의 추격이나 살해의 동기가 부재하거나 적어도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사 상에서 인남(황정민)이 레이의 형을 죽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정돼 있지만, 그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레이는 혈육의 정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레이는 ‘무동기적 악한’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전해주는 피해자들의 한결같은 질문,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정당하지만, 무용한 애원이다. 그에게는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고집하는 게 중요할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극중에서도 그는 태국의 갱 보스에게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컷

그렇다면 그는 그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재미로 사냥하는 소시오패스이거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퍼니 게임>에 나오는 소름끼치는 가해자들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아마도 이유 따위를 묻거나 사유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마음먹은 것은 그 어떤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이뤄내려는 ‘집념의 화신’ 아니면 ‘순수욕망’의 메타포일 것이다. 만일 이 영화에 불만족을 느낀 사람이라면 액션과 스타일에 치중하느라 레이라는 ‘순수 악’의 형상을 더욱 심도 있게 그리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덧붙여 살인청부업자였던 인남의 ‘딸 살리기’라는 설득력이 약한, 공감되지 않는 동기도 문제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칼리토>에서 주연배우 알 파치노처럼 조용한 삶을 찾아 파나마로 탈출하려는 계획도 기시감을 선사한다. 

이유를 묻지 않고 터미네이터처럼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 돌진하는 살인마 추격자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새삼 가지게 된 도주자 사이의 충돌에서 누가 승리할까? 영화는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고 여자아이는 아직 트랜스젠더가 되지 못한 ‘유이’(박정민)가 돌보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야기의 논리와 인물의 개연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남’ 없이 도착한 파나마 시퀀스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미처 설명되지 못한 채 끝나듯 텅 빈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엔딩 크레딧을 띄운다.

 

3.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는 ‘이유 있는’ 악당들이 듬뿍 등장한다.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이들은 사람과 짐승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데, 이유는 돈가방 때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 영화적 긴장을 이끌어 가다 결말에서 사태의 전모가 파악되는 서사적 배치들도 나쁘지 않다. 돈가방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 비존재화의 유혹을 받는다. 화폐가 말가방(언어)처럼 사회-기호적 속성을 갖는 것이라면 돈가방은 바이러스의 은유가 아니라 바이러스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 

바이러스가 신체의 비존재화를 촉진한다면, 이 영화에서 돈가방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죽음으로 초대한다. 살기 위해서 아니, 생존하기 위해서는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잘 살기 위해서도(well-being) 돈은 필요하다. 돈가방은 빵이자, 집이고, 지위이며 ‘존재’다. 그것이 있어야만 “나는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코기토(Cogito). 그러니 누군들 그것을 가지려 하지 않겠는가. 그것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면, 비존재화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실행할 유혹을 누군들 받지 않겠는가.

돈가방은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 우리 시대 사람들의 초상화와 사회의 풍경화를 주조해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처럼 돈가방을 찾으러 따라오는 살인마 안톤 쉬거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돈가방 자체가 안톤 쉬거이며 우리는 차라리 안톤 쉬거를 애타게 갈구하는 형편이다. 그러니 돈가방은 절대로 시어머니를 모시며 열심히 바닥을 쓸고 닦는 사람(진경)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돈가방은 없는 것이다. 돈가방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이미 가난하지 않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백두산

그렇게 생각하노라면 돈가방은 이미 하나의 ‘재난’일 터인데, 백두산 폭발로 인한 지진을 소재로 다룬 재난 영화 <백두산>도 있었다. 이 영화는 장르적 관습을 충실히 준수한다. 공식을 성실히 이행하는 신파극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던 사례를 재현하려는 듯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공학적으로 정확하게 등장해 제 기능을 수행한다.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거나 오락이라면,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이리라. 그 클리셰들에 겨우 분장을 하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였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암시 받았던 최면 메시지는 백두산이 폭발해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아직은 살 만하다는 그런 긍정적 메시지였을 것이다. 자연적 재해가 문제로 등장했기 때문일까. 디스토피아는 몇 사람의 구김살 없는 유머와 희생의 정신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백두산> 스틸컷

5.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은 강요된 성적 불평등과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 인식이 ‘여성-희생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상황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는 영화인데, 당연히 그 공감은 여성 쪽이 많았을 듯하다. 공감 여부를 떠나 영화가 지적하는 내용은 지극히 타당하다. 이 영화에 깊이 공감하지 않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인데, 함부로 반대 의사 발언을 했다가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남을 “맘충”이라고 비아냥거렸던 사람 취급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였던 사회(들)에서는 억압과 착취를 당한 여성들은 타자화 됐고, 그에 대한 발언과 이야기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다. 

그러나 명백하게 김지영(정유미)이 빙의(?)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자들이다. 다시 말해 억눌려 발언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말을 대신해 주는 것이 김지영이다. 그녀는 이데올로기 신전의 무녀처럼 신들린 듯 올바른 소리를 해준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대신 해주고 그녀는 정신병 진단을 받는다. 억압되고 배제된 타자들(비존재자들)의 목소리에 논리를 부여하자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정상과 병리를 구분하는 훨씬 더 견고한 현실의 규칙일지도 모르는데, 영화 말미에 그녀는 ‘그녀들’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승화의 방식으로) 정상성을 되찾아 가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또 그것을 발언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들의 그녀는 치유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왜 맘충이냐고, 왜 벌레냐고, 당신이 나를 얼마나 아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는, ‘발언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난다.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문제는 영화 속에서 주체와 타자의 자리바꿈이 발생한다는 점인데, 거꾸로 남성들이 타자화되는 환위가 일어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복수극이다. 타자의 목소리가 또 다른 타자를 낳는 식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주인이 되기 위한 인정투쟁이지, 타자의 해방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피억압자들에게는 여유가 없다. 여유가 있다면 그는 이미 피억압자가 아닐 것이다. 

 

6. 윤희에게

타자의 목소리를, 소리쳐 말하지 않으면서도 피아노 선율과 나레이션을 통해 가슴으로 듣게 하는 영화는 <윤희에게>가 압권이다. 레스보스 섬의 거주자들이 아닌 사람들도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보편의 문제로 듣게 할 줄 아는 울림을 가진 영화.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윤희(김희애)가 다수자들의 관념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여성이고, 사회적으로 가난한 여성이기도 해서다. 즉, 윤희가 성적 소수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행위 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아름다운 것은 홋카이도 오타루의 설국 풍경 뿐만은 아니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는 자신이 당했던 고통과 어려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반사)하거나 증폭시킬 생각이 없으면서도 신음하며 병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해 다시 출발할 줄 아는 역량(Vis)이 있었다. 사회적 편견 속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왔음에도, 그녀는 일방적인 피해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존재)을 유지하면서도 자기 역할을 수행해 온 성인이다. 사람들 사이에 건너뛰기 힘든 존재론적 고독을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그 옆에 또 다른 사람들이 ‘함께-있음’에 대해서도 말할 줄 아는 균형감도 돋보인다. 윤희의 딸 커플이 보여주는 발랄함도, 영화를 납덩이처럼 무거워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7. 찬실이는 복도 많지

건강하고도 명랑하게 삶을 개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삶을 긍정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찬실이’(강말금)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꿈이 사라지고, 열정을 바쳤던 일로부터도 축출당하는 당혹스러운 상황.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 여러 면에서 찬실이는 비존재가 돼버린다. 거기서 이 영화는 슬픔이나 자기연민으로 치닫지 않는다. 없음, 부재와 결핍(비존재)을 ‘복’으로 해석해낼 줄 아는 긍정과 포월의 윤리가 이 영화의 미덕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시종일관 유지하는 유머의 힘일 것이다. 찬실에게 나타나는 상상 속의 존재 장국영(비존재자)과 꿋꿋하게 삶을 살아내는 할머니(윤여정)가 어우러지면서 찬실은 위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줄 알았다. 거기서 그녀는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은 회의와 절망에 질식할 질문이 아니라 삶을 더 웅숭깊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다. 이로써 한국영화는 건강하면서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얻어낼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해도 괜찮을 것이다. 

 

8. 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여름밤>은 카메라워크부터 미장센, 캐스팅과 연기, 시나리오 등 모든 면에서 영화적 작위를 최소화한 내추럴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찬실의 말을 흉내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본래 아무것도 아닌 게 중요하다고 말해 줄 수 있으리라.

 

9. 프랑스 여자

<프랑스 여자>는 과거의 유령들과 조우하는 현재의 상처를 잘 그린 심리극이다. 영화를 서사 논리학적으로 해명하자면 테러 현장에서 부상당한 여자(김호정)가 의식을 잃은 잠깐 사이에 그녀가 의지적으로 망각한 기억들이 내용으로 펼쳐지는 것이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 꿈은 그 여자의 죄책감에서 비롯하는 것으로서 이 영화의 윤리감은 그로써 확보된다. 

 

<프랑스 여자> 스틸컷

10. 도망친 여자

직무유기인줄 알지만 <도망친 여자>는 미처 감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언급하는 것을 삼가는 편이 옳겠다. 적어도 이 영화는 필자에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짧은 일별(一瞥)을 통해 올해 영평 10선을 살펴봤다. 올해 한국 영화들은 거칠고 쎈 캐릭터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구경(究竟)을 달리고 있거나, 억압됐던 소수자-타자들의 목소리를 건강하게 발언하면서 삶을 개척해 가려는 인물들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끝으로, 햄릿은 ‘존재냐 비존재냐’라고 묻기보다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아니면 왜 비존재인지’, 적어도 ‘비존재적 존재’인 ‘아버지-유령’에게라도 물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랬다면 오늘 우리도 ‘쇼는 왜 계속(존속-지속)돼야 하는지 희미한 답이라도 듣게 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건대, 영화 자체가 비가시적 가시성의 양식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유령 같은 환등상에 묻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묻고 싶다. 

영화는 왜 계속돼야 하는가? 만일 쇼가 계속돼야 한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 있기(bios) 때문이라고, 우리 영화들이 힘겹게 그리고 애써 말 건네고 있듯이 바람직할 삶(Zoe)을 찾아내야만 하고, 그럴 수 있는 힘이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하리라. 비록 극장 골목에는 스펙터클만을 즐기려는 소문자 듀크들과 삥을 뜯으려는 대문자 듀크들이 판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글·이호
영화평론가.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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