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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강요하는 ‘사이비’ 보수와 진보, 그리고 설국 열차
언론이 강요하는 ‘사이비’ 보수와 진보, 그리고 설국 열차
  • 엄윤진 | 작가
  • 승인 2021.08.3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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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2014 - 브뤼노 바르베이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나뉜 것처럼, 대선이 가까울수록 대한민국 안에서도 유권자가 진보, 보수로 선명하게 나뉜다(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구분 짓는지 늘 의심스럽다). 중립과 객관을 표방하지만, 거의 모든 언론사는 특정 이념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언론사는 상대 진영의 후보에 관한 부정적인 의혹과 스캔들을 다루며 비판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면 공격받는 후보의 지지자들은 그 언론사의 공정성에 의문을 품고 항의한다. 진영 간 지지자들 사이에 흑색선전, 비방, 거짓말, 혐오 표현 등도 자주 눈에 띈다. 언론은 또 이를 여과 없이 보도한다. 사실상 언론이 두 진영 간, 그리고 양 진영 지지자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를 혐오하게 한다. 선거 때마다 이렇게 둘로 갈라져, 서로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 비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일이 5년마다 반복된다.

최근 한 지식인의 SNS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 대선 후보 중에 누가 당선돼도 우리 사회에 그리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게시물에서 자유주의 정부인 문재인 정권에서도 여전히 하루 평균 2~3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문제, 누더기가 된 중대 재해 처벌법,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 사망과 같은 노동 문제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이 때문에 집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좁힐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장년층과 이제 사회에 막 진입하려 애쓰는 젊은 세대 간의 갈등과 격차도 더 심각해졌다. 이뿐인가? 2030 세대에서 보이는 성별 간 갈등도 극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 대선 때마다 언론이 제시한 두 선택지 중에 어느 것을 고르든 이런 갈등과 격차 문제에 관한 개선보다는 현재 상태(the status quo)의 유지나 악화가 예상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경제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에 필요한 의제를 제시해야 하는 언론은 유권자를 진보, 보수 기준으로 둘로 나누어 서로에 대한 혐오와 분열만 조장한다. 1% vs 99%의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를 가리기 위해서다. 이런 지배 구조를 가리기 위해 진보와 보수란 기준에 더해, 남성과 여성,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장년층과 청년층 등의 기준으로 갈라치기까지 한다. 피지배자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 지배 구조를 은폐한다. 언론은 이러한 은폐로 매 선거를 진보, 보수 세력 간 경쟁으로 보이게 한다. 이른바 분할통치(Divide and Rule)다. 사전에도 나오고, 정치 철학자 마키아벨리도 군사 작전의 한 방식으로 권했던 방식이다. 문제는 소위 진보로 알려진 정당도 선거 때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진보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것이다. 법인세 인하와 같은 감세 정책이나 당내 선별 복지 주장 같은 것이다. 보수는 더하다. 안티 페미니즘이나 난민 혐오 같은 것을 활용해 표를 얻으려고 하는 극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경제 민주화나 가짜 기본 소득 같은 무늬만 진보적인 정책을 들고나오기도 한다. 표를 얻기 위해 정당의 가치나 신념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두 당의 이념적 경계가 모호해진 지 오래다. 노엄 촘스키가 미국의 민주, 공화당을 양 당이 아니고, 자본을 대변하는 일당(a party)에 속한 두 정파(two factions)일 뿐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게 미국 정치만의 이야기일까?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2019년 옥스팜(Oxfam)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최고 부자 26명이 지구 전체 인구 하위 50% 즉, 못 사는 38억 명이 가진 모든 돈을 합친 것만큼 가졌다고 한다. 소득이나 자산 격차라면 세계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선거 때마다 진보와 보수로 갈려 싸우는 게 말이 되나? 슈퍼 리치(the super-rich; 350억 원 대의 자산가)가 아닌 99%에 속하는 평범한 시민이 뭐 얼마나 지킬 게 많다고 선거 때마다 50% 가까이 보수 성향을 보이나?

 

언론의 판타지 장사

월터 리프만은 그의 책『 여론(Public Opinion)』에서 세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개인의 상황을 설명한다. 사람들이 사는 실제 사회는 너무 크고 복잡하며, 순식간에 변하기 때문에, 그 개인이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직접 경험해 파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 현실과는 다른 자신만의 가짜 환경(Pseudo-environment) 즉, 판타지를 구매한다. 거의 공짜지만 그 값을 어떤 형태로든 지불해야 한다. 더 직접적인 문제는 이 가짜 현실을 제작해 유통하는 여러 업체의 제작자는 매우 주관적이며 편향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가짜 현실을 구매한 사람들은 같은 물리적 세계에 살면서도, 다르게 생각하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느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이 산 이러한 가짜 환경이 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해 실제 세계에서 그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최근에는 리프만의 가짜 환경을 ‘지어진 현실(Constructed reality)’로 부르기도 한다. 가짜로 지어진 현실을 구매한 사람들은 너무나 크고, 복잡한, 그리고 빠르게 변하는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언론인과 시사 평론가의 지식, 경험, 그리고 판단에 의존한다. 언론인과 평론가는 사실상 우리의 마음속에 요약된 세계상을 만들고 유포해 우리의 세계관을 보이지 않게 지배한다. 실례로, 이들은 뉴스를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통해 우리가 어떤 이슈에 관해 가장 먼저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이슈에 대해서는 어떤 내용과 그 내용을 떠받치는 논거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미리 알려준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뇌라는 일종의 하드디스크에 이것을 내려받았다가, 여론 조사나 정치 이슈에 관해 답하거나 말해야 할 때, 내려받은 것을 불러낸다. 마치 우리 의견인 양. 그리고 자신의 식견에 대해 뿌듯해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우리가 언론과 시사 평론가들에게 포획당하는 전통적이며,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소수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시사평론가의 관점에서 비롯한 세계의 모형은 그들만의 착각이거나 판타지다. 99%인 우리의 관점에서 얻은 객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세계의 모형을 짓고, 그 세계로 그들이 지은, 그래서 절대 객관적이지 않은 가짜 환경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을까? 5년마다 언론과 시사 평론가가 지은 가짜 환경에 열광하거나 분노해봤자, 우리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언론이 제시한 그 두 가지 선택지에 변변한 답이 없으니까. 젊었을 때, 누구나 사회의 아픔에 공감하거나 분노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 꿈꿨던 대안적인 세상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무력감을 떨치고, 내가 살고 싶었던 그 사회에 대해 다시 말해보는 건 어떨까? 엘리트의 관점이 아니라, 시민의 관점에 선 독립 언론을 후원하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독립적인 시민 정치 학교나 연구소를 세워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청사진을 함께 고민해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사회의 정치 수준과 여러 제도는 그 사회 구성원의 평균적인 의식 수준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동료 시민의 서명을 받고 숙의를 거쳐 시민 누구나 법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나? 내가 낸 세금의 사용처와 사용 방식에 관해 결정권(주권)을 갖게 하는 사회를, 회사의 이윤보다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중시하는 사회를, 여성과 다양한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기후 위기를 극복할 지속 가능한 사회를, 경제적 자유가 보장돼 헌법이 보장한 학문, 예술, 주거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된 사회를, 운이 나빠 저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기회의 평등이 보장돼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하게 하는 공정한 사회를, 끊임없는 경쟁이나 노동에만 집중하는 사회보다,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고 자아실현의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집중하는 사회를 원하나? 어차피 정치 판타지에 빠지려면, 그리고 그 판타지가 내 고통과 일상의 무의미를 잊게 하는 수단이라면, 이런 정의롭고, 꿈꿔볼 가치가 있는 판타지에 빠져 보는 게 어떨까? 사실 우리가 함께 만든 판타지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부동산 대기업이 소유한 24만 채의 집을 국유화하는 시민 투표가 올해 9월에 열린다는 기사를 읽었다. 베를린시 정부가 민간 부동산 기업이 소유한 주택을 최저가로 구매해 국유화할지를 결정하는 시민 투표다. 주택을 공공재로 보고 국유화하려는 시도도 정의로운 발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시민 투표를 정치인이 제안한 것이 아니고, 시민들이 직접 주도했다는 데 있다. 정해진 수 이상의 시민 서명을 받고, 그 서명의 진위를 파악하는 과정을 거쳐 시민 투표가 결정되었다. 시민이 자신의 삶에 필수적인 주거 문제 해결을 정치인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나선 거다. 언론과 평론가가 제시한 늘 똑같은 두 개의 선택지 밖에 이처럼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해법이 더 많이 있지 않을까? 기업의 광고비로 만든, 언론과 시사 평론가가 합작해 대량으로 뿌린 판타지는 질리도록 봤다.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한, 그래서 내가 꿈꿨던 사회에 대한 판타지를 스스로 만들고 유통해 보는 건 어떨까?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이제 더는 남이 만든 가짜 세계에 생각과 시야가 갇힌 포로가 되지 말자.

 

‘설국 열차’ 밖에도 사람은 산다

대선 때마다 언론과 시사 평론가가 제시하는 늘 똑같은 두 개의 선택지에는 우리 문제를 풀 해법은 없다. 진보든, 보수든 어느 정권이 권력을 잡든 결국 이기는 건 자본이다. 자본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는 그런 멍청한 짓을 절대 하지 않는다. 진보, 보수 양 정당 모두에 자본의 편을 들어 법을 만들어 줄 국회의원이 넘쳐난다. 자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으니까. 그러니 대기업 광고비로 먹고사는 언론과 시사 평론가가 5년마다 제시하는 늘 똑같은 두 개의 선택지 바깥으로 이제 눈을 돌려보자. 그 두 개의 선택지 바깥에도 판타스틱한 길이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나가면 얼어 죽을 것 같았던 <설국 열차> 밖에도 이미 생명이 살고 있지 않았나? 찾아라! 찾는 만큼 보인다. 우리가 반도체나 나노 크기의 단백질로 만든 나노 로봇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정치학이나 정치 철학과 같이 세상을 바꿀 방식에 관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을 수 있으니까. 언론과 평론가들이 제시하는 열차 안의 규칙과 질서가 아닌, 열차 밖 삶의 방식 즉, 그동안 있는지도 몰라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혁신적인 시민 정치의 방식에 이제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글·엄윤진
독일 본 대학에서 종교학 석사를 했고, 정치 철학서인 『거짓 자유』(도서출판 갈무리, 2019)와 실존주의 철학을 다룬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도서출판 흔, 2021)을 썼다. 독서 모임 '생각공장'을 운영하며 인문학 강의와 책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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