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ören)처럼 어떻든 매우 쇠퇴해 버린 기독교에 의해 이끌려 살아온 것도 아니거니와, 또 시오니스트들처럼 유대교의 법의(法衣)의 옷자락에 매달려 온 것도 아니다. 나는 종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작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Kafka, Franz: 1883~1924)는 인용문에서 종말과 시작을 말한다. 근대를 연 작가로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카프카는 신(神) 없는 세상인 근대에서 근대인의 고독을 툭툭 내뱉듯이 심드렁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파고든다. 카프카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종의 냉담은, 식상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소외를 날것으로 드러내는 역설을 창출한다. 카프카 소설의 다의성과 중층성은 최초의 근대인으로 엄혹한 근대를 대면하면서 경악과 고통, 그리고 인간 전체의 위기를 체험한, 동시에 선취(先取)한 작가정신의 결과물이다. 한 작가에 관한 논문으로는 전 세계에서 카프카 논문이 가장 많다는 사실에서 카프카 이후의 근대인들은 근대인의 아담이라 할 카프카의 사유를 분석하고 전언을 해독하려는 열망에 휩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종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작이다
카프카 소설을 해석하는 스펙트럼은 넓게 형성돼 있다. 유대의 전설과 신비주의 전통의 맥락에서 바라보는가 하면 미래사회로 이끌 변화의 전형성 창조에 실패했다는 비난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실존과 연관 지어 카프카를 해석하는 방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이 방식에 대한 대중의 호응도 가장 큰 듯하다.
실존의 위기든 그 무엇이든 카프카의 많은 작품이 기본적으로 근대성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사이코패스적 냉담에 근거한 작가정신의 광활한 지평을 보여주는 『소송』이야말로 그중에서 백미라고 나는 판단한다. 『소송』의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됐기 때문이다. (…) “개같이” K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된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체포돼 1년 만에 “개같이” 죽음을 맞는 것으로 카프카는 요제프 K의 세계를 설정한다. 모두의 인용문에서 강조했듯 카프카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거나, 벗어나 있으려고 한다. 한 마디로 신이 없는 세계다. 『소송』의 요제프 K의 세계도 같다.
신이 없는 세계는 원죄가 없는 세계다. 근대가 신적인 질서를 완전히 폐기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서구에서 근대는 신적의 질서의 극복을 도모함으로써 성립했다. 근대가 신의 극복 혹은 신의 극복의 도모 없이 존립할 수 없었듯이 근대 이전의 서구 세계는 신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불멸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불멸성을 상실하고 죽어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로 변경된다. 이런 전락은 그러나 신이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보내어 구원을 약속함에 따라 인간이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극적인 반전으로 전환된다.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이향(離鄕)의 인간이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구상은, 이성을 앞세워 스스로를 신의 잠정적 대체물로 간주한 근대인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인간에겐 크나큰 위안이자 삶의 주춧돌이었을 것이다. ‘그저’ 죄를 자복함으로써 이 힘겨운 이승의 삶을 끝내고 본향에서의 복된 삶을 기약할 수 있다는 확신은 아무튼 삶을 살만한 것, 혹은 최소한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도래와 함께 ‘귀향’은 저지됐다. 이른바 이성을 지닌 (신을 잠정적으로 대체하는) 존재로 새롭게 계몽된 근대인은 귀향에 관한 신의 변증법적 구상에 반기를 든다. ‘귀향’ 자체는 어쩌면 근대인에게도 매혹적인 설정일 수 있었다. 아마도 근대인이 감내하기 힘들었던 건 죄의 자복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죄인으로 단죄하는 상태에서 근대인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죄인됨’이란 존재한정은 세계정복을 앞둔 진취적인 근대인에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걸리적거림이었다. 신이 만든 세계 안의 죄인이 아니라 신이 없는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는 인간은 그리하여 죄를 사함 받는 존재론적 번거로움을 피하고 대신 죄를 탕감받는 합리적인 개척을 선택한다. 여기서 문제는 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죄를 탕감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채권자의 의사를 묻지 않고 채무자가 부채 해소를 선언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에 대한 인간의 디폴트 선언.
근대인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체가 된다. 근대 이전의 유일한 주체가 신이었다고 할 때 근대 이후의 인간은 그러므로 형식논리상으로는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신(神)이 신(神)임을 인증할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지만, 만일 인간의 입장에서 신(神)이 신(神)임을 인증하고자 할 때(신(神)으로 하여금 신(神)임을 인증시키고자 할 때) 유일한 인증수단은 공인인증서도 아니고 오직 신(神) 자신밖에 없다. 반면 근대에 이르러 (형식논리상) 신적인 존재에 도달한 인간이 자신의 신성을 인증할 수단은 자신의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성’이었다. 그러나 곧 이성의 권능은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었다기보다는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존재론적 한계, 인식론적 분열을 일깨웠을 뿐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렇다고 이성이 아닌 다른 권능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신과 달리 인간은 마침내 자신에게서 자신을 인증할 수단을 찾아낼 수 없다는 숙명에 직면한다. 그것은 인간 밖의 인증수단으로는 이성 말고는 딱히 다른 수단이 발견되지 않은 데다 앞서 말했듯 인간 안의 인증은 원천 거부됐기 때문이었다. (예수처럼!)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근대인은 귀향이 좌절된 채 균열된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나오는 수용소의 인간군상처럼, 다른 희미한 주체들과 부대끼며 신을 떠나보낸 신적 존재라는 근대인으로서 공인인증을 헛되이 추구했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여기서 쟁점은, 신은 자신을 스스로 인증할 수 있는 반면 인간은 타자에 의해 인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타자는 신 아니면 인간일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인성(人性) 인증은 신과 인간 모두에게서 가능하지만 인간의 신성(神性) 인증은 (근대인의 기대와 달리) 부재한 신에게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드러났다. 만일 ‘결과’만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해도, 소거했거나 괄호를 쳐둔 ‘원인’을 현실 속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나아가 사실은 결과가 원인인 것으로 판명됐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근대성에는 신성을 포기한 인성만의 인간이란 극단적 대안이 가능하지만 100여 년의 짧은 그 역사는 인성만의 인간이 결코 감내할 만한 현상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신성의 공백은 너무 컸고, 신을 살해하거나 추방한 근대의 인간은 신성과 인성 사이의 심연에서 추락할 심각한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결국 신을 배제한 인간에 의한 신성 인증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해야 고독, 현실적으론 분열로 대체된다. 그 심연에는 근대인이 결코 원하지 않은 고독과 분열이 도사리고 있었다. 죄인됨을 거부함으로써 부수적으로 또는 의도하지 않게 인증의 최종심급마저 결여시킨 근대인은 거대한 심연 앞에서 불가불 공황에 사로잡히게 된다. 카프카 소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카프카는 나아가 공황으로 내몰린 삶이 다음 단계인 죽음에서도 치욕으로 귀결하는 ‘No exit’를 『소송』에서 묘사한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는 『소송』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보자.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금언은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는 데에 요긴한 윤리적 강령으로 종종 인용된다. 이 말의 화자로 거론되는 안토니오 그람시(Gramsci, Antonio : 1891~1937년)는 카프카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카프카와 다른 유형의 근대인이었다. 이 금언에는 그람시와 같은 유형의 근대인이 인식한 근대성의 절망이 함축돼 있다. 지금의 논의와 연결해 설명하면 ‘인성만의 인간’에 좌초한 근대인이, 신을 추방하고 난 뒤에도 ‘부재한 신’을 호출해 ‘신성의 인간’을 세상에 덧씌우려는 간절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의지만이 중요해진다. 익숙한 용어로 바꿔 쓰면 욕망이다. 앞에서 살펴봤듯 의지의 개입으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어 갑자기 눈이 밝아져 서로의 벌거벗음을 알게 된 인간 남녀에게 죄의 결과로 남겨진 건 욕망이다(에덴동산에서 출현한 ‘의지’에 관해서는 상세한 설명을 생략하고자 한다. 너무 길고 긴 논의가 될 터이기에).
이후 인간은 에덴동산 밖을 떠돌며 결코 충족되지 않을 욕망을 충족시키는 덧없는 삶을 영위해 지금에 이르렀다. 비유 차원에서 근대인은 막 에덴동산을 나온 아담과 하와와 같다고 볼 수도 있다. ‘출(出)에덴’ 이후에 아담과 하와는 신을 기억하고 경외했지만 근대인은 신을 잊고 박제했다고 마찬가지로 비유 차원에서 말할 수 있겠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런 관점과 흡사하게 신을 명백히 떠나 있지만 결정적으로 신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그 회귀는 공인인증서 없이 행하는 인터넷뱅킹처럼 지향은 뚜렷하되 무익할 따름이다. 결국 카프카의 말마따나 그는, 그의 소설은 종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작이지만, 동시에 종말이면서 시작이기도 하다.
『소송』 안에 등장하는 액자소설 『법 앞에서(Vor dem Gesetz)』는 종말이거나 시작인, 또는 종말이면서 시작인 근대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914년에 집필해 이듬해 유대인 주간지 <자기방어>에 단독으로 게재된 『법 앞에서』는 나중에 『소송』의 9장에 삽입됐다.
시골에서 온 한 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만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는다.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전 생애에 걸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난 뒤 죽음을 앞둔 그 사람에게 문지기는 이 입구가 단지 그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다.
카프카는 이 소설 『법 앞에서』를 각별히 좋아했으며 이 소설에 대해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소설에서 ‘법’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카프카가 왜 이 소설로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꼈는지는 직관적 짐작으로 넘어가자.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사항은 법이나 카프카가 아니라 ‘법’ 앞의 사람이다. 시골에서 올라오고, 법안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했고 노력했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뜻을 이루지 못한 이 남자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도(企圖)할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 “그 입구가 오직 너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을 문지기로부터 들었다면, 그의 심경이 어떤 것이었을까. 그래도 내가 올바른 입구 앞에 있었구나 하는 안도였을까, 아니면 내가 마땅히 들어갔어야 할 문 앞에서 그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평생을 허비했구나 하는 회한이었을까. 혹은 안도도 회한도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꼈을까.
근대성의 욕망
국내에는 2018년에 개봉된 북유럽 영화 <델마>는 스릴러물이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델마>는 스릴러라는 영화적 형식을 취했지만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탐구라는 전언을 담았다. 트리에 감독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는 인물이 언젠가는 그 운명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설명했다. 한 마디로 마녀 이야기다.
영화는 (욕망이 혹은 존재가) ‘금지된’ 주인공 델마(에일리 하보 분)가 금지를 금지함으로써 ‘금지되지 않은’ 델마로 거듭나는 과정을 스릴러의 기법을 통해 그려낸다. 영화는 이런 인간 존재론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사실적인 재료와 비사실적인 재료를 섞어서 쓴다.
델마가 6살 때 그가 ‘마녀’임이 밝혀지는데, 그것도 형제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다. 평소엔 그냥 평범한 인간이지만 델마는 특정의 강렬한 욕망을 계기로 마녀로 변신한다. 어린 마녀 델마의 욕망은, 욕망의 주체가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구체적인 행위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발현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순수한 욕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에덴동산의 최초 남녀에겐 의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개인의 존재 차원에선 죄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결과는 죄가 된다. 사회적으로 욕망만으로는 죄를 구성하지 못하고 그런 욕망을 행위로 옮겨 실제적인 ‘금지된’ 결과를 초래했을 때 죄가 성립한다. 영화 속 어린 마녀 델마에겐 물론 욕망 자체가 간절했지만 아무런 의지나 (물리적) 행위의 개입 없이 그저 욕망이 자동적으로 결과로 구현되고 만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구체적 죄는 존재하지만 죄에 합당한 책임을 질 죄인은 없는 역설이 발행한다. 성경의 창세기에 카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여호와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대답한 유명한 사건과 비교하면 결과는 동일하되 맥락이 달라진다. 카인은 죄인이되 델마는 죄인이 아니다. 델마에 대한 이런 판단은 근대성의 잣대에 의거했기에 가능했다.
델마가 소속된 시대에서 델마는 (사회적으로 실현된 죄가 존재한 반면) 죄인이 아니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죄인이다. 마녀라는 존재 자체가 일종의 원죄를 구성한다. 근대에선 죄인됨의 기준이 행위이지만 근대 이전에는 존재 자체가 죄인됨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마녀 델마의 욕망과 원죄에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마녀에겐 욕망 자체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델마가 ‘마녀’임이 판명된 이후 델마의 부모는 델마의 욕망 자체를 금지하는 방법으로 델마의 삶을 통제한다. 금지의 수단은 적절하게도 기독교 신앙이다. ‘원죄’에 대한 벌로 욕망이 금지된 삶을 사는 델마의 인간 존재는 타인에겐 무해하지만 자신에겐 무익한, 한 마디로 금지된 존재로 형상화한다. 영화의 대미를 준비하는 대목에 이르면, 델마는 금지된 존재라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금지의 금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욕망을 주체적으로 되찾는다.
이 영화의 기저에 놓인 키워드는 부친살해와 동성애다. 부친살해 코드는 동성애 코드와 함께 예수/사탄, 뱀 등 영화 속 흐름과 잘 호응한다. 마녀 델마가 동성애자이며 부친살해로 해방에 이른다는 스토리는 기독교와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 재미있고 감각적인 설득력 있는 영화적 설정이다. 영화의 결말이 해방이라는 점에서 분명 해피엔딩이기도 하다.
해피엔딩은 당초 근대인이 근대성을 기획할 때 염두에 둔 것이었다. 금지된 자아를 넘어서 욕망의 주체로 나가는 담대한 발걸음을 그렸다는 점에서 영화 <델마>의 델마는 근대인의 원형이다. 비사실적인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마녀 전설과 원죄의 스릴러 너머에 비치는 존재의 그림자를 포착해내는데, 그 그림자엔 근대성이 묻어있다.
델마의 담대한 근대성 지향과 기획은 그러나 영화 속에서만 가능했다. 현실에서는 요제프 K에게서 나타난 것과 같이 불길한 기획 아래 매우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목격될 뿐이다. 소설 『소송』은 덜 정교한 묘사와 우화 같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근대인의 본질적 불안이란 거대담론을 역설적이게도 편안하게 제시한다. 만일 불편함이 편안하게 전달됐다면 그 힘은 거친 서사와 크로키를 연상시키는 생략/부각의 묘사에서 나왔다. 비현실적 리얼리즘 기법에서 가장 충실하게 리얼리즘이 구현된 셈이다. 카프카 『소송』의 리얼리즘의 핵심은 요제프 K가 마녀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근대성의 담대한 기획이 결실을 거두려면 근대인이 델마처럼 마녀가 됐거나 신적 존재가 됐어야 한다는 뜻이다. 근대성과 근대인 간에는 원초적 간극이 존재했고 근대인은 존재론적 결여를 내재화함에 따라 탄탈로스적인 욕망 또한 운명으로 수용하게 된다.
광장
영화 <델마>의 처음과 끝에 광장이 등장한다. 인간 존재는 광장에서 입증된다. 밀실 안에 고립된 인간은 같고 다름을 모른다. 욕망과 금지 또한 광장 소관이다. 예컨대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됐다”면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돼야 한다.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또 다른 인간이 자신을 중상함으로써 ‘체포’에 이르렀다는 카프카의 우화적 제안은 신성 부재에 따른 최종 심급 부재의 시대에,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서로 늑대인 상태(homo homini lupus)’로 위태위태하게 불확정한 심급을 수립해나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인간을 초월한 최종심급이 존재했다면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서로 우애로운 존재(homo homini amicus)’로 남을 수도 있었다.
늑대로 만나든 친구로 만나든,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나간다. 만남의 장소는 광장이다. 최초의 정치적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폴리스적 존재’에서 확인된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아고라를 넘어서 폴리스가 단일의 광장으로 기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인간이 폴리스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였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통칭해서 도시국가로 이해하는 당시 폴리스는 소위 근대국가로 통칭되는 지금의 국가와는 너무나 다르다. 지금 우리가 근대국가 시스템 아래에서 서구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반면, 과거 폴리스의 그리스인들은 지금과는 판이한 체제와 제도하에서 고대 그리스 문명을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간 방식은 ‘폴리스적 동물’이라는 대전제 하에, 폴리스 안에서 살거나 폴리스 밖에 살거나 하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두 가지 가운데 기본값은 당연히 폴리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도편추방제(Ostrakismos)’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널리 알려진 대로 국가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인물의 이름을 아고라에서 도편(陶片:오스트라콘)에 적어내, 정해진 기간 폴리스 밖으로 쫓아내는 제도였다. 도편추방제는 ‘폴리스적 존재’를 ‘비(非)폴리스적 존재’로 변경하는 정치적 절차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비(非)폴리스적 존재’는 얼핏 근대국가에서 목격된 ‘비(非)국민’과 유사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비(非)국민’과 비교해 (인간 개체가 처한 물리적) 상태의 ‘비참’ 정도와 무관하게 ‘비(非)폴리스적 존재’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본질적인 예외상태로 간주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비(非)폴리스적 존재’ 자체가 ‘폴리스적 존재’의 다른 표현이다. 국민국가의 자의적 공권력에 의한 추방과 달리 도편추방이 폴리스 구성원의 민주적 의사결집에 따른 결정이란 사실을 감안할 때 ‘비(非)폴리스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폴리스적 존재’를 위해 성립한다. 또한 ‘비(非)폴리스적 존재’는 전적으로 ‘폴리스적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아가 폴리스의 시민은 ‘폴리스적 존재’로 생활하지만 잠재적인 ‘비(非)폴리스적 존재’이기도 하다. 폴리스의 구축과 지속은 도편추방을 통해 언제든지 ‘비(非)폴리스적 존재’가 될 수 있는 ‘폴리스적 존재’에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를 차용하면 ‘폴리스적 존재’와 ‘비(非)폴리스적 존재’는 폴리스 시민의 현실태와 가능태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현실태는 가능태에 우선한다.
반면 ‘비(非)국민’이 ‘국민’의 다른 표현이란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 폴리스의 시민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국가의 공개적 표명과 달리 국민은 국민국가를 구성한다기보다는 국민국가에 의해 동원된다. 간단하게 말해 국민은 국가와 별개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민은 폴리스와 별개가 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은 참으로 ‘폴리스적 존재’였던 것이다.
‘폴리스적 동물’인 인간은 시민으로서 자신을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정치적 주체로서 자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배제와 소외가 없는 정치적 주체의 원형이자 전설이 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곳은 재삼 상기하자면, 광장이었다(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노예제와 여성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자).
폴리스, 즉 광장은 고대 그리스 사회의 최종심급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가 수립되고 신의 도성의 섭리가 서구를 지배하던 시기에 인간이 모인 광장의 최종심급은 저 위로 몰수된다. 죄인들로 구성된 최종심급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근대성은 광장을 복원한다. 국민국가는 최종심급으로 신의 도성을 폐하고 근대인의 새로운 신분인 국민을 최종심급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고대 도시국가 시민의 광장과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 국민의 광장은 내용상 판이했다. 폴리스는 신적 질서까지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최종심급이었으나, 국민국가의 광장은 최선일 때 ‘부재한 신’을 그리워하는 근대인들의 분열된 주체성으로 채워진 유사 최종심급에 불과하다. 카프카는 이런 사실을 『소송』 등과 같은 소설을 통해 예리하게 관찰하고 고발해내고 있다.
근대인의 본원적 불안과 분열이 이렇게 해명됐다면 그 너머를 향한 근대인의 새로운 기획은 불가능할까. 체코의 저명한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결말 부분에서 노발리스의 시구를 인용하며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고 말한다.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로서 지상에서 천국의 고갱이를 실현하는 꿈을 꾸고 욕망하는 것. 그것이 분열과 불안이 숙명으로 주어진 근대인에게 주어진 사실상 유일한 해방의 길인 셈이다.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하지만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무엘 베케트의 깨달음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근대인은 신성을 파괴함으로써 어렵사리 자기 존재를 성립시켰지만 이제 파괴된 신성을 복원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완성할 기회를 앞두고 있다는 역설은 역설로 그치지 않는다. 고대인이든 근대인이든 존재는 인간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존엄의 최종심급이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르몽드 북클럽 ‘금오문향(금요일 오후,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의 매과정 결과물을 정리해 격월로 연재됩니다.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금오문향”은 2달에 6권씩 모두 17개의 2개월짜리 과정으로 구성돼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 ③근대인의 고독과 구원 … 신 없는 신성의 탐색은 ▲사탄의 태양 아래(조르주 베르나노스)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심판(프란츠 카프카)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조서(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알렉산드르 솔제니친)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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