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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2) - 근대의 개인이 찾는 잃어버린 집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2) - 근대의 개인이 찾는 잃어버린 집
  • 안치용 l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 승인 2020.03.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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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근대성의 산물이다. 근대사회에서야 등장한 개인은, 기동하는 또는 사용되는 기본단위이다. 물리학에서 개인의 등가물은 분자이다. 예를 들어 물 분자(H2O)는 물의 성상(性狀)과 특질을 유지한 마지막 단위이다. 수소와 산소로 분해하면 전혀 다른 물질이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추상으로서 사람은 구체적인 개인 미만으로는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나눠지지 않는다. 

개인(個人)이란 말 자체가 낱낱의 존재라는 의미를 담았다. 낱낱의 사람을 뜻하는 개인은 추상 수준의 파악을 실체적 이해로 전환한 말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 주장이 선행한다는 측면에서 보기에 따라 사람의 주체성을 인정한, 말하자면 인본주의적인 접근법인 셈이다. 반면 개인에 해당하는 영어 ‘individual’(독일어 Individuum)은 덜 인본주의적이고 더 기능적인 접근법이다. ‘individual’은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in’은 ‘not’을 뜻하는 접두어. 이 자리에서 개인과 ‘individual’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진행하지는 않겠다. 다만 근대성 논의에서 개인이라는 우리말을 쓰지만, 내용상으로는 ‘individual’의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논의를 진척시키는 데에 주효하다는 점만 적시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서구 문명이 주도하고 개척한 근대사회는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다. 근대성을 영토 안에서 실현하고 강제하는 체계를 근대국가라고 할 때 근대국가는 약간의 예외적인 실험이 있긴 했지만, 불가분 자본주의를 배태한다. 역으로 자본주의가 근대국가를 배태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개인을 필요로 한다. 즉 개인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을 뜻하는 ‘capital’이 사람(의 머리)과 한 뿌리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capitation’(인두세), ‘per capita’(1인당) 등 어원을 공유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연관단어를 찾을 수 있다.

분명히 할 점은 자본주의가 개인을 찾은 데에는 어떠한 인본주의도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시장과 합체하고 사회에는 시장화체계를 대대적으로 전파한다. 시장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본은 스스로를 계상(計上)이 가능한 것으로 변용함으로써 시장에 적응시켜 나가야 하였다. 자본과 시장이, 인간이 아니라 노동을 시장화기제에 편입시키면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노동단위인 ‘individual’을 요구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정성 들여 분석하였듯, 자본은 인간 혹은 노동 자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노동력의 단위를 발굴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 단계의 논의를 위해 정리하고 넘어가자면 개인은 확실히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이 근대성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또한 개인이 근대국가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느냐는 의견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가자. 내가 보기에 개인과 근대성은 밀접하게 관련하지만, 개인과 근대국가는 그 정도로 밀접하게 관련하지는 않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드러나듯 개인과 근대국가는 종종 상충한다. 개인과 근대성/근대국가/자본주의 사이의 관련과 상충은 근대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감당하는 근원적 고충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 1896 - 뭉크

자본주의 이전의 개인

개인이 자본주의와 근대성이 창안한 인간형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 혹은 근대 이전의 인간형은 어떤 것인가. 철학과 관점에 따라 수다한 의견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지금 논의를 연장한다면 근대 이전의 인간이 개인이 아닌 인간임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individual’에서 ‘in’을 없앤 상태이다. ‘in’을 떼어낸 ‘dividual’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듯, 근대 이전의 인간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피, 종교, 땅 등과 결부된, 독자적으로는 존재라는 표현을 성립시키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은 통시성과 공시성의 촘촘한 그물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는 결코 개개의 존재로 성립할 수 없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등 혈연과 신분, 공동체의 질서에 소속되어 살아가야 하는 ‘적분된 인간’이다. 대응하는 표현을 쓰자면 그렇다면 개인은 ‘미분된 인간’이다. 

한국의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는데, 그중 하나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라운드 제로’가 도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미국의 군정 등 두 번의 외세지배와 한국전쟁은 ‘적분된’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인간형 중에서는 오직 ‘individual’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국사회는 그렇게 폭력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개인을 들여온다. 적분이 아니라 미분, 혈통이 아니라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는 합리적으로 보였지만(합리성! 근대가 금요일 밤에 클럽에 놀러가서 쓰는 이름이다) 그 합리라는 것이 곧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개인은 상시적인 위기에 봉착한다. 그렇다고 전근대적 인간으로 근대사회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살펴볼 시점이다. 이 소설은 아프리카 문학이지만 영어로 작성되었다. 원제는 “Things fall apart”이다. 외세의 침략과 함께 이식된 근대의 파도를 온 몸으로 맞은, 19세기 말 나이지리아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소설의 주인공 ‘오콩고’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시대적 모순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세대 간의 갈등, 계급갈등, 그리고 제국주의 침탈에 따른 내외부의 식민주의 옹호세력과 반(反)식민주의 세력 간의 대립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제국주의는 자체로서 사회갈등의 하나의 축이면서 모든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는 촉매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도 개인은 발견된다. 그것은 명확하게 개인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맹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자기동일성을 상실하였지만 새로운 정체성은 확보하지 못한 제3세계의 근대적 개인이 출현하는 초창기 모습이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3세계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에겐 우월감으로 피식민세력에겐 열등감으로 나타난다. 아체베가 묘사한 것처럼 자학하는 아프리카의 근대인은 고통ㆍ적대감ㆍ열등감이 복합된 상태에서 몸부림친다. 프란츠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노정한 모습과 흡사하다. 이러한 모습은 제3세계에서 공통적이다. 제3세계 근대의 여명기는 평화 하고는 거리가 먼 시기였으며, 그 시기를 예민하게 산 사람들은 끝내 현실을 모호하게만 바라보다 과거의 인물로 사멸한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주인공 오콩고가 그랬던 것처럼.

 

탐욕스런 근대인

『모비딕』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보다 과거에 출간된 소설이지만, 서구를 배경으로 하기에 개인은 더 진전된 양상을 보인다. 논쟁적인 대작 『모비딕』은 주인공이 누구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다. 나는 에이헤브 선장이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본다. 에이헤브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탐욕스런 왕으로, 우리 성서에서는 ‘아합’으로 표기돼 있다. 아합은 역사에서 구시대의 대표이자 신시대의 대표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어느 정치인이 스스로를 구시대의 막내이자 새 시대의 맏형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모비딕』에는 온갖 성서 지식과 일화, 암시가 넘쳐난다. 숫자의 상징 또한 두드러지는데, 단적으로 아합의 고래잡이 연수는 40년이고 육지생활은 3년이며, 아합이 모비딕을 추격한 기간은 3일이다. 굳이 꿰어맞추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허먼 멜빌이 성서적 비유와 암시, 상징을 충분히 의식하고 집필하였으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에 해석에 충분히 참고할 필요는 있다.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모비딕』은, 기독교 전통 속에서 자본주의의 임재를 받아들인 근대 속의 개인을 찾는 방식을 그려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비딕』과 기독교 사이의 연관은 곳곳에 넘쳐나기에 “그렇다”고 언급하고만 지나가자. 기독교와 함께 소설 『모비딕』을 떠받치는 양대 축의 하나인 포경산업은 자본주의를 곧 바로 표상한다. 고래를 잡은 행위야 고래(古來)로부터 있었지만 산업적 포경은 자본주의의 등장을 전제한다. 원양포경업을 가능케 한 자본, 기름에만 특화한 상품화전략, 광범위한 물류와 유통 등 『모비딕』에 묘사된 산업 전반은 발달된 자본주의를 보여준다. 

포경산업은 고래를 잡았으며, 고래를 잡은 목적은 기름 획득이었다. 먼 바다에 나가서 사투를 벌이며 기름을 채집해 올 정도로 기름에 대한 강력하고도 상업적인 수요가 있었다. 수요는 근대인의 조명 욕구에서 비롯했다. 조명(照明)이란 말 자체가 계몽(啓蒙)이란 말과 등가성을 내포한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었는데. 근대의 인간은 그 어둠을 자신의 빛으로 몰아내고자 한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포경산업이 발전하게 된다. 

고래기름과 조명의 논의에서,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재미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자기만의 방』은 여성해방을 주창한 책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란 말 자체가 개인의 독립적인 공간, 즉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근대인의 사적인 영역을 의미한다고 할 때 근대의 조명은 ‘자기만의 방’을 가능케 하는 여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계몽이란 말로 등치시킬 수 있는 조명과 프라이버시의 탄생을 예고하는 ‘자기만의 방’은 근대의 언어이다. 세계화를 가능케 한 포경의 산업적 특성은 자본주의의 발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전기의 발명과 함께 포경산업이 쇠락한 것까지, 자본주의의 모든 현상이 목격된다.

『모비딕』의 아합은 탐욕스런 자본주의 산업의 대표자이지만 탐욕과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고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기이한 집착에 사로잡힌 광기의 인물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노인과 비슷한 외양을 보인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사실 아합과 노인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노인은 시대와 사회와 무관한 지혜의 인물로서 우화의 주인공이다. 반면 아합은, 당연히 우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의 시대상을 체현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인물이다. 그의 집념과 집착은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생성되고 고착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아합에게서 만일 실존적 광기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동시에 자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징후이다. 

여담으로 『노인과 바다』처럼 시대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소설이 얼핏 더 깊은 지혜와 삶의 통찰을 주는 것 같지만, 자신의 시대와 사회에 확고하게 닻을 내린 『모비딕』과 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그 지혜와 통찰이라는 것이 얼마나 겉핥기에 불과한 것인지를 금세 알게 된다고 할 때 역사에 들어섬으로써 역사를 넘어선다는 금언을 새삼 확인한다.

 

불행한 근대인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는 불행한 근대인을 그린다. 『갈매기』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지식인 계층의 삶을 다룬다. 그 시기면 서유럽은 자본주의를 충분히 발전시키고 완전한 근대사회를 향해, 그리고 파멸적인 제국주의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을 때이다. 근대의 조짐이 러시아 서쪽에서 완연하였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의 지배하에 있는 봉건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러시아 지식인들은 그것이 칸트가 되었든 마르크스가 되었든 근대의 이념을 수용하고 흡수하고 있었다. 『갈매기』의 주인공 트레플로프 또한 그런 사람이다. 조국 러시아는 아직 근대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반면 러시아의 근대적 지식인들은 개인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충은 『갈매기』에서 단지 후경으로만 그려질 뿐이다. 거대한 비극의 후경 속에서 트레플로프는 사랑과 문학에 관해서만 고민할 뿐이다. 봉건성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지만 불가피하게 그것을 암시할 세대갈등이 극의 전반을 지배하고, 주인공이 목을 맨 사랑에는 근친상간적 색채가 드리우며 결국 사랑에 좌초한 트레플로프는 자살한다.

트레플로프는 불행하고 또 불행하지만 어떤 비상구도 주어지지 않는다. 『갈매기』는 활로 없이 발굴된 19세기 말 러시아의 근대적 개인에게 보내는 조사이다. 트레플로프는 니나를 사랑하지만 니나로부터 사랑을 얻지 못한다. 대신 황망하게도 니나가 스스로의 상징이라고 말한 갈매기를 쏘아 죽인다. 갈매기의 박제조차 트레플로프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일본 근대소설의 효시로 불린다. 제목에 들어 있는 ‘마음’을 활용하여 ‘마음의 서사’라는 수식어가 소설에 따라다닌다. 주인공은 ‘나’이다. ‘나’ 자체가 어쩐지 근대성을 표방한 듯하다. ‘나’는 부모와 갈등하고 선생과 갈등하며 ‘나’의 근대적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 행로는 어쩐지 불안하다. 『마음』에서는 근대성의 현상이 천황제란 기호가 표기된다. 근대성은 근대국가를 호출하였고, 일본에서도 그러하였는데 일본에서는 특이하게도 근대국가는 봉건성을 온존시킨다.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과거의 정수를 밀봉하여 미래로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분명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근대를 향한 출발점이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메이지와 이별해야 함을 『마음』은 시사한다. 그러나 마음과 눈은 미래로 향하지만 발은 과거에 붙들려 있다. 천황의 죽음 이후 순사(殉死)를 택한 노기 대장과 그를 연민하고 동감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일본 식 근대를 보게 된다.

서구와 달리 일본에서는 근대국가와 봉건성이 합체하게 되고 근대적 개인들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공존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된다. 여기서 빔 벤더스 등 독일의 젊은 세대 영화인들이 1962년에 발표한 ‘오버하우젠 선언(Oberhausen manifesto)’을 기억하게 된다. 그 유명한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Papas Kino ist tot)”는 언명은 나쓰메 소세키 같은 근대의 문턱에 선 일본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한다.

그러나 뉘앙스는 다르다. 당시 젊은 독일 영화감독들에게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가 결연한 단절의 의사표시였다면 나쓰메 소세키 등에겐 애통해하는 유대의 표시일 수 있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그러므로 일본에서 서구적인 개념의 근대적 개인이 출현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일본에게 개인은 있지만 ‘individual’은 없다고 말해도 되겠다. 모든 근대인이 근대성에 비롯한 고통을 겪지만, 일본에서는 개인은 있지만 ‘individual’이 없는 상황이 또 다른 고통의 근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정신 나간 근대

정상적인 근대라는 것이 있지는 않다. 근대가 와야 했기에 왔을 뿐이다. 한데 근대인에게 주어진 근대는 정신 나간 근대이거나 문제 있는 근대였다. 어쩌면 정신이 나가고 문제가 있는 게 정상적인 근대일지도 모르겠다. 근대는 근대 자체를 위해서 도래하였지 근대인을 위해서 도래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근대인은 근대가 오면서 할 수 없이 따라온 존재다.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미스 블랜디시』는 정신 나간 근대의 고갱이를 보여준다. 『미스 블랜디시』의 등장인물들은 『모비딕』의 아합에 비해 훨씬 더 ‘근대적’이다. 무엇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자본의 본성을 완전히 체현한다. 합리성이 욕망과 힘에 의해 추동된다. 얼핏 욕망과 힘은 합리성과 배치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욕망과 힘이 폭력과 계시의 형태로 출현하는가 하면 합리성의 몸을 입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니이체가 ‘힘(Macht)에의 의지’와 초인을 표명함으로써 근대를 선포한 것은 매우 합리적인 맥락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무질서가 질서 있게 표명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특정한 진실을 담아낼 수 있듯이 힘과 합리성은 쉽사리 친구가 될 수 있다.

근대국가의 기획기에 홉스 루소 같은 서구의 기획자들은 항상 ‘최초의 인간’을 가지고 논의를 펼치기를 좋아했다. 그들이 말한 ‘최초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피조물에 가까운 존재이며 ‘적분형’에 속하는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공통의 규칙이 없어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주지하듯 마침내 공권력의 위임을 통한 만인의 규율자가 초대된다. 리바이어던이다. 

리바이어던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늑대(homo homini lupus)’인 세상의 구원자로 기획되었지만 기획 의도는 좌절된다. 늑대를 압도하여 세상을 평정하는 괴수로서 리바이어던을 기대했지만 실상 나타난 리바이어던은 ‘거대 늑대’에 불과했다. 강아지들과 개들이 여전히 제멋대로 구는 가운데 ‘거대 늑대’는 기획 의도와 달리 규율자가 아니라 선수로서 기능하며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대국가의 기획자들이나 근대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보이지 않는 기획자’가 리바이어던의 자리를 꿰어 찼고, ‘거대 늑대’는 점차 이 보이지 않는 리바이어던의 경비견이 되어 갔다. 짐작하듯 이 보이지 않는 리바이어던은 자본이다. 

『미스 블랜디시』는 리바이어던이 되지는 못했지만 ‘거대 늑대’가 아직 거대한 힘을 행사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힘의 근대성을 자각한 개인들 중에 일부가 폭주하였고, 그것이 욕망의 기제와 결합하면서 야생화한 개들의 무리 같은 것이 출현하였다. ‘거대 늑대’와 미친개들이 욕망의 법칙 아래 할거하는 느낌이 『미스 블랜디시』를 지배한다. 그래서일까, 직선적이고 평이하며 감정적 판단을 배제한 이 소설에서 독자는 포스트모던을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착시를 유혹하면서도 탈근대나 탈합리의 지경으로는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정신 나간 이러한 유형의 근대인은 어쩌면 근대인 중에서 도달 가능한 가장 진보한 개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포스트모던이 운위된 지 한참 지난 요즘에서는 이 진보한 개인이 조금 더 세련되질 필요가 있고, 현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세련된 방향의 진보 경로를 택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질이 변하지 않음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이제 근대와 함께 발굴되며 도래한 개인의 낙오와 실패를 이야기할 때이다. 근대의 개인은 사실 과거의 전근대적 인간에 비해 위험천만한 처지에 놓인다. ‘적분된 인간’에서 ‘미분된 인간’으로 이행하며 애초에 예기된 위험이다. 물론 어떤 개인은 ‘적분’에서 풀려남으로써 존엄과 자유를 누리고, 근대성에 근거한 성취를 적극적으로 꾀하였다. 이처럼 근대의 수혜자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다수는 근대라는 짐승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한, 실존적 위기의 존재로 전락한다.

패트릭 맥케이브의 소설 『푸줏간 소년』의 소년 프랜시는 전락의 극단을 설명한다. 평단으로부터 히치콕의 플롯과 베케트의 독백을 결합한 작품이란 평가를 받은 이 소설은 근대인의 비극을 처연한 양식으로 소화해낸다.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제시될 수 있는 가장 슬픈 형상이다. 특별히 이 소설에선 프랜시의 의식의 흐름이 복화술로 흘러나오면서 ‘의식의 흐름’ 기법이 추구할 수 있는 비극적 가능성을 정교하게 구현해낸다. ‘의식의 흐름’ 하면 떠오르는 소설의 하나인 『댈러웨이 부인』을 보자. 『댈러웨이 부인』은 ‘의식의 흐름’ 중에서도 전지적 시점을 택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동하며 휴대폰으로 통화할 때 셀과 셀이 이어받기를 하며 전파를 전해주어 전체로서 통화가 완성되듯이 독자는 등장인물 간의 의식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조망하여 단절 속의 소통과 종합을 이룬다. 그러나 『푸줏간 소년』은 복화술을 사용하기에 독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세계와 부딪혀 끊임없이 튕겨 나오는 프랜시의 의식뿐이다. 단절되고 고립되어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이 고통은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뒤섞인 양태로 분출하기에 때로 공격성을 드러내어 동정마저도 자아내지 못한다. 

‘적분’에서 ‘미분’으로 던져진 근대의 개인은 실존적 고립 속에서 탈출구로서 연결을 모색한다. 공교롭게도 그 연결이라는 것이 근대로 오면서 개인들이 버리고 온 ‘적분’을 다르게 일컫는 것에 불과했다. 마치 집게(Hermit crab)가 자신을 보호해주지만 자신을 억누르는 고둥 껍데기를 버리고 맨몸으로 세상에 나왔지만, 곧 위험을 절감하고 작은 페트병 안으로 숨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대부분은 몸을 숨길 수 있는 페트병을 발견하는 데에 실패하고 기존의 고둥 껍데기들이 사라져버려 집게들은 맨몸으로 버텨내야 한다. 『푸줏간 소년』의 프랜시는 맨몸으로 살아가는 집게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된 상황에 비견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사회계약은 복화술로만 근근이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사회적 억압으로 바뀌었다. 중립적이고 공정한 규율자로 초대한 리바이어던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여러 분야에서 각양각색의 수다한 리바이어던이 생겨나 증식하고 증폭하며 맨몸으로 살아가는 집게 같은 개인들을 착취하고 핍박한다. 

프랜시가 우리에게 제공한 복화술이라는 활로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트레플로프에게 복화술이라도 있었다면 자살이라는 결말은 막을 수 있었을까. 실존주의는 개인의 실존 선택지에서 무턱대고 자살을 제외한다. 남은 활로가 유일하게 복화술이란 진단은 그렇다면 ‘참’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만 더 나은 인간 혹은 더 나은 삶을 기획하고자 한다면, 복화술의 언술을 기를 써서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시도해봄 직하다. ‘미분’이 숙명이라면, ‘적분’이 복원 불가능한 과거라면, 우리가 ‘미분’에서 끌어낸 대화걸기를 결행하고자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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