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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아직 살아있다!
전두환은 아직 살아있다!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0.05.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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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혁명’의 달이라면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5월이 저 멀리 유럽에서는 젊은이들이 모든 권위와 부조리에 맞서 저항한 68혁명의 달이자, 우리에겐 시민들이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분연히 거리에 나섰다가 군의 총칼에 희생당한 광주혁명의 달로 기억된다면, 6월은 6.25 전쟁에 참전하여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을 기리는 애국의 달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매년 현충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 또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대통령과 3부 요인, 정당 대표, 참전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추념식을 거행한다. 이 추념식에서는 오전 10시 사이렌 발령과 동시에 조포를 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대개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정부 주관 추념식을 거행하지만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정부 주관 추념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현충원 외에도 참전용사가 안장된 호국원과 순국선열공원 등지에서 각 지자체가 주관하는 추념행사가 진행된다. 생존 참전용사 등에 대해 국가유공자증 수여식도 같이 전개되는데, 순국 시 유가족이 받는다.

현충일이 6월 6일로 지정된 이유는 6월에 6.25 전쟁이 발발한 달이라는 점도 있지만 24절기 상으로는 망종과 겹친다는 점에서 착안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고려 현종 5년(1014) 6월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골을 집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망종 즈음에 전몰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던 전통을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인 유어 마우스(그룹 잭 오브 하트의 앨범표지>, 2011 - 엘조 더트

 국립현충원에는 6.25전쟁 당시에 주로 순직한 군인들이 영면해있고, 더러 국민의 안전을 위해 헌신한 경찰관, 소방관, 나아가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있지만, ‘기이’하게도 “1980년 5월 00일 광주에서 전사”라고 씌어진 비석이 더러 세워져 있다. 권력 쟁취에 눈 먼 전두환과 그 추종세력의 발포 명령으로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누다가 졸지에 순직한 병사들까지도 남북 간의 동족상잔인 6.25 전쟁이나 우리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들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기에 국민의 이름으로 이 영광스러운 국립 현충원에 모시게 된 것”이리라.(1) “광주에서 전사”라는 글귀는 ‘전장터’ 광주에서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산화(散花)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비석 아래 묻힌 병사들은 역사적인 ‘장엄한’ 전장터가 아닌 평화로운 광주에서 적이 아닌 시민을 상대로, 전쟁 아닌 살육전을 벌이다 졸지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이며, 어쩌면 지하에서 아직 구천을 떠돌며 전두환과 그 무리들이 자신들을 영웅으로 바꿔치기한 ‘살육전’의 진실 규명을 염원하고 있을 일이다.

 국립 현충원과 같은 똑같은 ‘국립’의 수식어가 붙은 5.18 국립묘지의 ‘기록’은 ‘전장터 광주’ 참전용사의 비석문과는 상반적이다. “그때 (광주에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일어났고, 군의 진압으로 산화하고 희생된 이들이 ‘추앙받을 영령’으로 안치되어 있다.” (국립 5.18묘지 홈페이지). 국립 현충원의 병사들이 ‘전사한 전쟁’과 국립 5.18묘지의 영령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죽임을 당한 학살사건은 광주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같은 시각에 일어났으나, 대단히 모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에는 시민들을 죽인 병사들이 다른 한편에는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시민들이 똑같이 ‘국가’를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고 하며, 똑같이 우리의 현충 대상으로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희극적인가? 5.18묘지의 시민들이나 국립 현충원의 군인들이나 모두 대한민국의 같은 국민이지만, 죽임을 당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권력에 눈이 먼 정치군인 전두환과 그 무리의 탐욕 탓이다. 이들은 권력 쟁취를 위해 명령복종밖에 몰랐을 젊은 병사들에게 총칼을 쥐어주고 시민들을 정조준하도록 명령하고, 이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한 시민들을 오히려 폭도로 매도했다. 수백 명의 시민을 도살한 작전명이 ‘화려한 휴가’라는 것이 어처구니없지만, 시민 학살에 앞장선 추종세력과 일부 정치군인들이 훈장과 상금을 나눠 가진 사실에서는 깊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역사는 지나온 일을 말하지만, 모든 지나온 일이 다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강탈한 전두환과 그 무리가 남긴 ‘역사’는 진실의 연혁을 새긴 역사(歷史)가 아니라 완력을 앞세워 왜곡을 일삼은 역사(力事)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부역 언론과 어용언론을 이용해 광주의 5월을 ‘빨갱이들’의 무법천지로 날조했고, ‘근거 없는’ 지역감정과 이념전쟁을 부추기며 국민들에게 일상의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공포정치를 꽤 오랫동안 자행했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월호 21면 참조. 라틴아메리카의 민중 운동가를 빨갱이로 왜곡 보도한 서구 언론에 대한 비판) 

 더욱이 가관인 것은 6.25 전쟁은커녕 어떠한 전쟁조차 치러보지 않은 이들이 호국보훈의 6월의 참뜻을 왜곡하여, 국립 현충원에 무자격자들의 비석을 세워, 조국을 위해 희생당한 고귀한 영혼들을 모욕했고, 국민 모두의 추모의 날이어야 할 현충일에 조폭들처럼 떼를 지어 거짓 애국심을 과시하며 자신들의 영속 집권을 도모했다는 점이다. 마치 로마의 율리우스 케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딴 7월(July)을 만들어 불멸의 권좌를 꿈꿨듯이, 전두환과 그 무리는 호국보훈의 6월을 자신들의 ‘안위보훈’을 위해 전용하고 독점했다! 전두환 세력에 뿌리를 둔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역시 6월의 가치를 자신들의 권력에 이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6월이 되면 늙디 늙은 전두환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그의 무리와 추종세력이 다시 활개를 친다. 전두환은 그의 죄를 묻는 법정에서 영락없는 치매 노인 행세를 하지만, 그의 무리와 골프채를 잡을 때와 고급식당에서 박장대소할 때는 젊은이와 다름없는 총기를 보인다. 그가 내란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선고를 내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면서까지 도입한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으며 졸수(卒壽)의 여유를 즐기는 현실은 엽기적이다. 우리 사회에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면, 전두환과 그 무리일 것이다. 이들이 흩뿌린 반역사적이며 반사회적인 독소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모질고 위험하다. 

지난 5월 18일, 광주의 5.18 국립묘지에서는 전두환 무리의 도살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으나, 같은 시각 광화문 광장에서는 전두환의 유산을 짊어진 극우보수 세력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광주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고장 난 축음기처럼 빨갱이와 종북 타령을 반복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 우려 탓에 모두가 공중도덕으로 지키려 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것은 이들에겐 애초에 관심 밖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각에 잠을 자고, 일하고, 밥을 먹었지만, 그들의 삶과 가치관이 일반 국민과 이처럼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기억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준거로 삼는 집단의 기억이 주관적으로 편집되어 있어 그들의 기억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뒤틀린 역사는 무섭지만 잘못된 기억은 더 무섭다. 기억과 역사의 관계에 관해 박태균은 “역사가 사회를 움직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역사가 아니라 기억이다. 사람들은 기억이 곧 역사라고 믿는다. 그러나 기억은 역사일 수도 있고,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역사를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때로 일정한 기억은 역사 속에서 없었던 일도 있다.”고 말한다.(2)

 유감스럽게도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시위대는 선동가들이 만든 소설 같은 글과 말을 믿으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들을 역사로 기억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법원과 검찰, 학계 일부가 전두환류의 역사관에 얽매여 과거의 뒤틀린 기억들을 바로 잡기는커녕, 오히려 이 기억들이 온전한 역사로 오인되도록 방치하고 부풀리고 있다는 점이다. 

‘내 사유체계와 다르면 일단 빨갱이로 취급하는 식’의 편견과 독선은 사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 자주 목격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에 극에 달해 이 무렵부터 대한민국이 둘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신념과 언어, 믿음, 공동체, 현재와 미래가 상반되게 갈려 왔다. 그들은 하나의 국가 안에서 한쪽의 국민과 다른 쪽의 국민 사이의 단순한 의견 분열이 아니라, 국민과 비국민으로 갈라놓는 경계선을 보이지 않게 높이 세웠다.        

 올 6월에도 순직한 애국지사들이 주로 잠들어있는 국립현충원에는 참배하려는 가족·친지, 정치인들로 붐빌 것이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군의 사람들은 경계선 너머의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높이 치켜 흔들며 확성기에 빨갱이 타도를 부르짖을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해 죽음 너머의 사회질서를 잘 모르겠으나 국립현충원의 비석 아래에 잠든 ‘광주 전장터’의 전사자들과 이들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시민들에게 저 세상에서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갈림이 없는 온전한 조국이 되길 기원한다. 따지고 보면 서슬 퍼런 살인정권 아래에서 죽은 이도, 죽인이도, 모두 추모되어야 할 희생자이자 동지이다. 이제, 현충일과 호국보훈의 달을 온전하게 우리의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궁극의 국가적인 적은 분명하지 않은가? 전두환, 그는 아직 살아있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1)김항, ‘국가의 적은 무엇인가?’, 『무한텍스트로서의 5·18』(문학과 지성사, 2020,5)
(2) <한겨레> 2015년 4월17일, ‘그리하여, 다시 이라크로 군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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